크리스마스에 만난 의사남친과 결혼해요
평범2222222
|2016.01.19 15:10
조회 4,135 |추천 6
안녕하세요
저는 말하면 알 만한 회사 다니는 30살 여자입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처음 만난 남친과 1년 가까이 잘 만나왔고
얼마전 프로포즈를 받았어요 ㅎㅎ호
남자친구가 나이도 있고 해서 올 여름 오기 전에 식 올리려고 계획 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나 마음에 빛이 들지만
사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정말 죽을 것 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지금의 행복한 날들, 사랑받는 내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죠.
결혼 준비 시작하면서 작년 생각도 나고,
지금 우울한 분들, 나쁜 사람 만나고 계신 분들
기운내고 힘내시라고 올려 봐요
이 글 읽고 조금이나마 밝은 생각 가질 수 있다면 좋겠네요
(얘기가 길 수 있어요 미리 죄송)
저와 남자친구는 소개팅어플로 처음 만났어요
재작년 늦가을 3년 만난 남자에게 어마어마하게 배신당한 후였습니다
학교 2년 선후배로 만나 졸업 후 사귀게 된 케이스였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만날 때는 좋았지만
알고 보니 지네 회사 후배와 1년 가까이 썸? 데이트메이트? 암튼 이성의 관계였고
심지어 그걸 저희와 친했던 학교 사람들한테 먼저 얘기했어요 ㅠㅠㅠㅠ
감기 때문에 아파서 제가 빠진 술자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만취해서 얘기를 했다더라구요
그 여자는 볼 때마다 설레인다, oo를 오래 만났고 결혼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여자로 안 보인다 등등...
피해자 코스프레를 그렇게 하면서 울기까지 했다더군요
듣는 사람들도 어이가 없어 미친놈아 정리해라 욕 한마디씩 해주고
저한텐 차마 말을 못했다네요
이틀쯤 지나 저와 제일 친했던 여자선배가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헤어지라고 말해주는 거라더군요, 그 놈은 남자로는 아닌 것 같다고...
빡쳐서 그날 바로 전화하고 헤어지자고 했어요
회사 앞으로 찾아온다는 걸 됐다고 했더니 정말로 안 오더군요
일주일 쯤 지나 마무리는 지어야지 싶어 연락해서 만났더니
미안하다 좋은 남자 만나라, 하더군요
힘들게 쌓아왔는데, 쌓아온 3년의 시간은 정말 깊고 많은데 그 시간들이 의미 없어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더군요...
특출나게 이쁘지도 똑똑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나 잘난 맛으로 열심히 살아온 터라
자존감만큼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았는데
그때는 정말 자존감이 바닥까지 무너지는 걸 느꼈습니다... ㅠㅠㅠ
3년을 사랑했던 남자 뿐만 아니라 함께 알아왔던 지인들에게까지 매력 없는 여자로 낙인찍힌 셈이니까요
사랑만 끝난 게 아니라 한 여자로서의 인생까지 같이 끝난 느낌?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땐 심각했어요
잠도 안오고 배도 안고프고 회사에선 모니터만 쳐다보며 로봇처럼 일하고
퇴근해서 9시에 침대에 누워 밤을 꼴딱 새는 일상이 반복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말에 동생이 안되겠다 싶었는지 핸드폰을 가져가 소개팅어플을 다운 받아주고 가입도 시켜줬어요
그때는 뭔가를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의사조차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우울증 증세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동생이 사진 이거 올릴게
언니 명함 찍어서 올릴게
이런 질문 있는데 이렇게 쓸게
전화번호 인증할게
이렇게 말로 허락받고 진행하고 저는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동생의 도움으로 가입은 했지만 어플을 열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어요
괴로운 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12월이 되었습니다
토요일 밤이었어요
자려고 누웠는데 역시 잠은 안오고 생각은 많고 머릿속은 복잡하고...
뒤척뒤척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어요
그 시간에 문자 보낼 사람이 없어서, 뭐지 하고 봤더니
쪼로남 님이 저에게 OK를 보냈다는 거에요.
쪼로남? 쪼랩? 스팸인가? 한참을 들여다보다 드디어 생각이 난거죠,
아 나 소개팅어플 깔았었지 하구요
아마 평소 같으면 확인 안하고 그냥 넘어갔을 거에요
그런데 그날은 새벽 한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었고, 그 시간에 몇 달 째 혼자 깨있었고, 아마도 외로웠겠죠. 어쩌면 남친을 만날 운명이었는지도... ㅎ
암튼 그 시간에 어플을 켜서 쪼로남이라는 쪼랩스러운 닉네임을 쓰는 남자가 누군지 확인하게 되었던 거죠 ㅎㅎㅎㅎ
정말 아주, 아주 평범한 남자분이었습니다. 치의대를 나오셨고, 나이는 38살. 나이에 걸맞게 푸근하시고, 인상은 좋았지만 남자로는 솔직히 느낌이 오진 않았어요.
그런데 프로필을 읽다보니 취미로 애니메이션 원피스를 좋아한다고 쓰셨더라구요, 특히 조로 캐릭터의 광팬이라고. 저도 원피스 완전 좋아하거든요, 특히 조로 캐릭터!
그 순간 쪼로남이라는 닉네임을 이해하게 되었고, 원덕만의 동지애도 느끼면서 ㅎㅎㅎ 이 사람 인간적으로 궁금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인데, 어쨌든 그 새벽에 포인트 결제까지 해서 저 역시 ok를 보내게 되었던 겁니다
(아마 처음부터 남자로서의 호감을 느꼈다면 오히려 그러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다음날 오전부터 문자를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역시 원피스 얘기로 죽이 잘 맞았어요
정상전쟁 에피소드 얘기하면서 (이건 원피스 팬들만 아시겠죠 ㅎㅎ) 출근길에 웃기도 하고, 정말 오랜만에 핸드폰을 보면서 웃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바쁘신지 워크타임에는 연락이 거의 없었지만
아침엔 출근 잘했냐, 점심은 맛있는 거 먹었냐, 퇴근 잘하고 있냐 등 꼬박꼬박 연락을 먼저 주셨어요.
아침에 거의 식사를 못하고 나온다고 했더니 기프티콘으로 아메리카노 셋트를 보내주기도 하구요
그런데 그렇게 호감을 보여주실수록 어느 순간부터 저는 부담감이 커지더라구요...
자존감이 살면서 제일 바닥을 친 시기였는데 자기 병원이 있는 치과의사라니 주눅도 들었고... 남친의 적지 않은 나이도 부담스러웠죠
동생은 뭐 그렇게까지 멀리 보냐고, 일단 언니 좋다는데 만나나 보라고 했지만 그럴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였어요
그래서 점점 연락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답장을 띄엄띄엄 보내거나 아예 보내지 않거나 하면서 저절로 멀어지겠거니 생각했어요
어플로 알게 된 사이고 아직 만난 적도 없고... 솔직히 저는 그렇게 정리될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어영부영 지나다 어느덧 크리스마스 날
씻지도 않고 혼자 집에 있는데 점심때쯤 문자가 왔어요
그때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아서 아 이제 정리됐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라 좀 놀랐죠
오늘 약속 없죠? 이렇게 온 거예요
피식 웃고는 어떻게 아셨어요? 라고 보냈더니
동네에서 동생 만났어요. 이러더라구요
동네??????????? 동생???????????????
너무 놀라서 손이 덜덜 떨렸어요.
뭐지 이남자 스토컨가? 또라이였나? 인연은 아니라도 좋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또 잘못 봤나?
잠깐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오타 내면서 문자를 쓰고 있는데 전화가 오길래, 고민하다 일단 받았어요
여보세요- 하시는데 그 와중에 목소리가 좋더군요 ㅎㅎㅎ
암튼 뭐부터 물어봐야 하나 정리가 안돼서 잠깐 멍하게 있었어요
그랬더니 놀랐죠? 하시면서 조곤조곤 자초지종을 설명하더군요
외모도 취미도 제가 딱 자기 스타일이었대요. ㅎㅎㅎ
근데 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아 연락 그만 해야겠다, 고 맘먹고 있었는데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눈을 뜨니 갑자기 ‘한번 만나는 봐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대요
한참 재밌게 문자 나눌 때 동네 맛집 얘기하면서 저희 동네 초입에 진짜 맛있고 유명한 족발집 있다고, 그 집 상호를 얘기한 적 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계셨던 거죠
차 가지고 무작정 나와서 그 집으로 네비 찍고, 앞에 차를 세웠대요.
차 안에서 저한테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지
외출하던 제 동생이 길 건너 정류장에 서있는 걸 딱 본 거에요 ㅎㅎㅎㅎㅎㅎㅎ
제가 그 얘기도 했었거든요, 저랑 동생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다고, 얼마 전에 동생이 머리를 단발로 잘라서 좀 달라졌는데 그 전엔 진짜 비슷했다구요
남친 왈 제 셀카랑 똑같이 생긴 단발머리 여자가 버스 정류장에 있길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차에서 내려서 말을 걸었대요
저기, 혹시 oo씨 여동생이세요? ㅋㅋㅋㅋㅋㅋㅋ
(이 사람은 원래 성격이 이런 오지라퍼가 아니에요, 수줍음 있고 낯도 가리는 성격인데, 그때는 뭘 생각하기 전에 몸이 그렇게 움직였대요)
여동생이 황당해서 네? 누구세요? 했는데,
우물쭈물 하는 이 남자의 태도와 외모 ㅋㅋㅋㅋㅋ 를 보고 감 잡은 거죠
아, ‘그 사람’ 이구나!
그 다음이야 뭐 짐작하시는 대로...
오지라퍼 제 동생은 언니 집에 있다, 언니도 그쪽 싫지 않아한다, 의사라 부담스럽다고 했다, 연락해라. 브리핑을 했고, 남친은 저한테 문자를 보낸 거죠 ㅎㅎㅎㅎㅎㅎㅎㅎ
너무 황당해서 웃음도 나고, 속으로 운명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암튼 처음처럼 겁이 나거나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거기서 조금만 걸어 올라오시면 카페 하나 있다고 거기 있으시라고 얘기하고
샤워하고 만나러 나갔어요
사진이랑 똑같은 분이 앉아계시대요, 진짜 똑-같은. 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분도 같은 생각하셨는지 보자마자 웃으시더라구요
아메리카노 한잔 놓고서 얘기를 시작했는데, 만나서도 어색함 없이 말이 잘 통했어요.
완전 재밌거나 설레거나 그랬다기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시간이 훅 지나갔던 것 같아요
결국 강추했던 동네 족발집에서 맥주에 족발 같이 먹고 ㅎㅎㅎㅎ 오후 여섯시쯤 헤어졌는데
집 앞에서 안녕히 가세요 하고 돌아서면서
아 이 남자 왠지 오래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세 번째 만날 때 남친이 자기 얘길 꺼내더군요
내 직업 때문에 부담스러울 필요 없다, 니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금수저도 아니고 부모님이든 누구든 손 벌리지 않고 여기까지 혼자 해왔다
서울 사람이지만 비용과 미래 등 여러 가지 고려해서 지방에 개원했고, 대출 끼고 개업해서 계속 갚고 있는 중이고, 너보다 대단할 게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랑 앞으로 오래 오래 보고 싶고, 너한테 나중에 세상 사람들 하듯이 뭐 해와라 뭐 해와라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때 알았어요, 바르고 좋은 사람이구나, 나 괜찮은 사람을 만나고 있구나....
이 사람을 만나면서 저는 자존감을 되찾았고, 전보다 훨씬 더 의욕적으로 살고 있어요
하고 싶다 생각만 했던 스페인어 공부도 시작하고, 대학원 진학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물론 남친은 저를 응원해줍니다. 학자금 대출 받고 같이 갚으면 된다며 ㅠㅠㅠㅎㅎ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사람한테는 나쁜 사람 착한 사람 만날 양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소개팅이든 헌팅이든,
심지어 제 전남친처럼 아는 사이에서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사귀고 보니 또라이였던 경우처럼...
만나야 할 나쁜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것 같고
그만큼 좋은 사람 또한 어떤 경로로든 결국은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만남의 기회는 많이 만들고, 생긴 기회는 흘려버리지 말고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플로 결혼할 사람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ㅎㅎㅎ
오지랖이지만 그 때의 저처럼 스스로를 미워하고 계신 분들,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 분들에게도 꼭 달라질 수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나를 사랑해줄 따뜻하고 좋은 사람, 어딘가에 꼭 있다구요... ㅎ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