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구원관은 믿는자 천국, 불신자 지옥.. 이런식으로 나누어 지죠?
엉터리로 가르치는거죠. 개신교회에서는 신도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 어벙한 신도들은 그저 목사가 세뇌시키는 데로 '믿숟니다!'이러기만 하고 알려고 들지도 않죠.(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이런식으로 정형화 되어가는 것 같네요;;) 결국 심각한 상황이 초래됩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데로 믿기만 하면 천국 가는줄 알고 열심히 십일조 바치고 교회나가 기도했지만 정작 죽어보니 천국은 못가고 고통속에 떨어진다 이거죠. 엉터리 구원관을 가진 종교기 때문입니다.
일단 구원관을 말하기 전에 왜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일까요? 왜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인간은 태어나서 먹고 자고 싸고 죽고 썩습니다. 끝! 이러면 뭔가 허망하죠. 언제부터인지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써의 한계를 부정하고 인간에게는 영원불멸하는 영혼이란 것이 있다는 사상을 가지게 되었죠. 여러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말하자면 엉뚱한 방향으로 길어질 듯 하니 일단 각설하고...
상선벌악(착하게 산 사람은 상을, 악하게 산 사람은 벌을)은 님이 아시는 대부분 종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며 특히 천주교의 구원관에 뚜렷이 명시된 사상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천국과 지옥의 개념이 도출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님이 믿는 개신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의 개념은 아닙니다. 개신교에서 믿는 것처럼 사람이 죽는 순간, 하느님이 자신을 믿는자는 천당으로 끄집어 올리고, 자신을 믿지 않는자는 지옥으로 내팽개처버리는 그런 초딩스러운 개념이 아니겠죠^^;
천국이란 님이 개신교에서 배운 그런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상에서 먹고 자고 싸다가 예수믿고 천국가서 또다시 먹고 자고 싼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우습지 않은가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스운지 안 우스운지. 그게 뭔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은 단지 먹고 자고 싸는겁니까? 개신교회 열심히 나가 봤자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개, 돼지랑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이죠.
천국이란 인간이 하느님을 뵙고 그와 같은 상태로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문하겠죠?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느님과 일치할 수가 있습니까? 하느님은 완전한 존재라고 하는데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인간에게 자아가 존재하는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사고를 하면서 끊임 없이 죄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정말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내면 깊은곳에 아주 조그마한 미움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될 까요? 시기, 질투, 욕망, 분노 따위의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천국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서 완벽하게 되려고 해봤자 조그마한 흡집이라도 있는 이들은 결국 모두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걸까요? 그럴바에야 꼴리는 데로 살지 뭐하러 노력을 하겠습니까?
평생 티끌만한 죄도 짓지 않고 사는게 가능할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미움,시기,질투,욕구,분노 등의 감정을 한번도 안느끼고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격렬한 분노의 감정을 가졌다면 이것은 하느님의 관점으로는 살인죄나 마찬가집니다. 만약 누군가를 향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를 상해하거나 살인을 하면 우리는 세상법으로 처벌을 받게되죠. 하지만 마음속으로만 분노를 품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깨끗한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향해 격렬한 분노를 품고 그를 저주했다면 그것은 살인을 한 사람과 다름없이 천국의 상태(하느님과 일치하는 상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조그마한 불완전함(죄)을 지니고 있는 자, 혹은 그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해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세상에서 다 댓가를 치루지 못했다면 그 영혼은 지옥에 떨어져야 할까요?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불완전한 상태로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죠.
루터는 매우 불안정한 성격을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수도생활을 선택합니다. 그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천국에 이르기를 원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항상 좌절감에 휩싸여 있었죠. 루터가 좌절했던 이유는 구원이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번민끝에 정신이 나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그냥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안믿으면 지옥간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이죠. 그 반작용으로 인간의 공로, 행위까지 다 무의미 하다라고 말하게 된것이죠. 그래서 님이 다니는 개신교회에서는 착한일을 하든지 나쁜일을 하든지 예수믿으면 천국가고 안믿으면 지옥간다고 가르치는 거랍니다. 대속의 의미는 그런게 아닙니다요 ㅉㅉ
아무튼 불완전한 인간이 천국에 이르려면, 즉 완전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가톨릭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 신앙의 대상인 삼위일체론을 보면 성자와 성부가 동일하다고 가르칩니다. 불완전한 육신과 감정을 가진 인간 예수가 완전한 하느님이라는 말이되죠. 불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성자는 완전하게 성부와 일치했고 이를 믿는 이들 또한 성부와 일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완전히 내어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죠. 개신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열심히 교회나가고 십일조 받치며 자신이 천국가고 복받고 싶다고 비는 것은 성자처럼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죠. 오히려 그런식의 종교행위는 성자가 가르치신 것과 위배되는 것이고 천국과 반대로 가는 길입니다.
아까 언급했듯이 하느님은 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도 완전하게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을 뵐 수 없습니다. 항상 내면을 성찰하고 아주 조그만 허물이라도 쉽게 넘겨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쉽게 넘겨버린 그 내면의 허물이 천국에 이르지 못하게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것이죠. 넓고 맑은 바다에 조그마한 먼지라도 하나 떨어졌다면 완전히 깨끗한 상태가 아닌 겁니다. 하느님과 일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천국에 못가면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까? 그런 말도 안되는 종교죠. 원래 기독교 교리(개신교가 변개시키기 전의 초대교회 믿음)를 보면 인간은 사후에도 여정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 여정을 연옥이라고 합니다. 먼지가 하나 떨어진 영혼은 쉽게 정화되어 하느님과 일치하는 상태 즉, 천국에 이르게 되겠죠. 더러운 오물로 얼룩이 진 영혼은 고통으로 정화가 됩니다. 얼룩이 더러우면 더러울 수록 고통도 심해지고 길고 길긴 여정이 되겠죠.
즉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죄를 다스리지 못한 다면 그의 사후에는 끔찍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화가 되어 천국의 상태로 나간다는 점은 지옥/ 천국 이분법으로 나누어놓은 개신교 논리와는 다른 것이죠.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사후에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진로를 정하는 것은 이승에서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죠. 사후 연옥 상태에 처 해진 영혼은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정해진 처벌(댓가)를 치뤄야만 하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고나면 모두 이런 불쌍한 영혼들이 됩니다. 그 영혼들은 살아있는 자의 기도로써 이승과 연결이 되죠.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산 자들이 죽은자에게 기도의 지향을 둠으로써 그의 고통을 덜어 준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서양 기독교 음악장르 중 레퀴엠(requiem)이라 미사곡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은 이들의 안식을 기리는 뜻을 담은 것이죠. 원래 기독교의 개념은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인 사상이 아니며 이승과 저승이 별 세계처럼 딱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 정춘수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개종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천당 아니면 지옥으로 나누어진 불안하게 짝이없는 개신교 교리를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聖교회의 품에 들어오고 나니 연옥교리가 주는 그 위로와 안도는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라는 겁니다. 예수믿으면 천국 가고 안믿으면 지옥간다고 하는데 뭔가 찝찝했죠. 거짓된 교리안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미심적어 하며 십수년을 번민하다가 진실을 알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되고 올바른 구원에 한층 다가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사후세계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은 이들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종교의 종말론 이나 내세관은 그 종교를 믿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게 되는 중요한 핵심사항이 될 뿐 아니라 장례식때 보는 종교 예식과 이를 행하는 종교인들의 태도에서 그 종교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길어지지만 어떤 신자분의 글을 인용 할께요.
흔히 우리는 천주교인들의 장례식을 보고 감명 받아 입교하는 대 세자 가족이나 그 밖의 분들을 많이 만나곤 합니다.
어떤 독실한 개신교 집안의 할머니 한 분이 목사님을 찾아 아무래도 천주교로 개종해야 되겠다는 말을 하자 깜짝 놀란 목사님이 까닭을 여쭈니, “여기서야 고작 ‘이제 죽어 천당에 갔으니 얼마나 좋습니까?’하며 찬송가나 부르고 울지도 못하게 하지만, 천주교는 보니 가족, 친지며 온 성당 교우들이 저리도 많이 계속 모여들어 쉬지 않고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지성으로 슬퍼하며 빌어주는데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난 이제 그만 성당으로 갈라요.” 그래서 목사님이 “우리도 똑같이 그리 해 드릴게요.”하며 사정사정 붙잡더라는 얘기가 우스개삼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위안의 원천인 연옥교리는 트리덴티노 공의회에서 명백히 선언되어 내려 옴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소위 종교개혁자들은 배척하였으니 정말 모를 일입니다. 구약성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신약에도 암시되어 있으며, 초대교회 교부들도 한결같이 가르쳤고, 초세기 동서교회의 고래(古來) 경전에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은 물론, 우리 이성에도 합치되고 인간 감성과 영혼에 크나 큰 위로와 안도, 광명을 주는 교리인 것입니다.
연옥 교리는 유다인(유대인)들도 충실히 신봉하여 구약성서에 명확히 언급되고 있으니, “그리고 유다(유대)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로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2마카 12:43-45) 유다 마카베오가 적과의 교전 후 전사자를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라 명령한 이 구절의 내용은 너무나 명백하여, 따로 어떤 해설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16세기 반역의 무리(프로테스탄트: 일부의 소위 종교개혁가)들은 이를 두고, 몇 구절 바꾸는 것으로는 도저히 그 명백한 뜻을 흐릴 수 없음을 깨닫자 외람되게도 마카베오서 모두를 성서에서 빼 버렸습니다. 음험한 자가 반대편 증인을 암살하고, 예수님의 기적으로 부활한 라자로를 살해하여 예수님 권능의 증거를 말살하려 한 유다인의 심술이나 악랄함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카베오서를 감히 외경이라 주장합니다. 자선의 덕행을 무시한 '오직 믿음만으로'를 위해 야고버서를 신약에서 삭제하고(다행히 지금은 회복되었지만…….) 연옥 등을 부정키 위해 마카베오서 등을 구약에서 빼버렸다 하더라도 그 사실성(史實性) 만큼은 부정치 못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문서로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이상, 유다 민족이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희생, 봉헌한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오시어 우선 유다 율법 중 쓸모없는 것은 빼버리고, 조작된 전습(傳習 : 전해오는 관습)은 폐기해 정화시키셨습니다. 안식일만을 위해 남을 돕지도 못하게 하던 바리사이파들의 위선과 모순을 낱낱이 지적하고 준엄하게 꾸짖으셨기도 했습니다. (마태 23장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다인의 전통과 관행인 사후 중간 장소를 믿는 마음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 행위에 대해서는 비난하거나 야단치신 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꾸짖으시기는커녕, 오히려 '연옥'의 존재에 관해 아주 똑똑한 언급을 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예수님을 자신을 부르던 말)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2:32)
성령을 거스른 죄는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말 속에는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도 있다는 의미가 분명히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닙니다. 천국은 티끌만한 죄라도 있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고, 지옥은 그야말로 영원한 형벌만이 존재하는 곳이므로 사죄(죄의 용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용서받을 수 있는 죄인이 가는 그 곳은 어디일까요?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세에서 용서받는 곳’은 어디란 말인가요? 바로 연옥인 것입니다. 연옥은 일종의 중간 장소로서 죄의 정련(淨煉 : 정화시키는 단련)을 받는 곳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상의 이치와 똑같은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며 공로가 큰 사람이나 착한 이들은 훈장을 타거나 법의 보호아래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소소한 일반 잡범이나 중죄인들은 단기에서 무기까지 제재를 당하며 교도소에서 일정한 벌을 받습니다. 죄에 대한 상응한 대가를 치른 후에는 다시 자유를 회복하게 됩니다.
개신교에서 가장 떠받드는 사도 바오로(사도 바울)도 연옥을 말한 적이 있는데,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들어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 줄 것입니다.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1고린 3:13-15) 영혼은 결국 구원받을 것이나, 결백해질 때까지 연옥불 속에서 충분히 단련을 받는 낭패만큼은 어쩌지 못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개신교인들처럼 성령과 직방으로 통하여 내 심령을 울리고 둔한 머리를 깨우쳐 내 마음이 이르는 대로 뜻을 깨닫고, 계시 받아 해설하는 개인의 의견이 결코 아닙니다. 앞서 마카베오서처럼 정, 위경의 판정은 오직 가톨릭교회의 정통성에 입각한, 오래고 변함없는 권위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고, 결정되어 왔으며, 성서 구절 하나하나도 개인의 호, 불호나 사감이 배제된 채 초대 교부로부터 확인되고 검증된 해석만이 인정되고 존재할 뿐인 것입니다. 이 유서 깊은 연옥 교리를 누가 감히 배척한다 말입니까?
연옥 에 관한 교부들의 증언은 너무 많아 가장 저명한 몇 가지만 들겠습니다. 2세기 테르툴리아노는 “충실한 아내는 죽은 남편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그 기일에 기도드리기를 게을리 않는다. 만약 이를 실행치 않는 자는 가식의 삶을 사는 자로 남편을 배신하고 버리는 자이다.”하였고 (De Monogam.,n. X) 4세기경 유명한 교회사학자 에우세비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장례 광경을 묘사하기를 “황제의 시체는 높은 관대에 안치하였고, 제관들과 군중은 눈물과 비탄 속에서 그 영혼을 위해 기도와 제물을 봉헌하였다. 이는 황제 평생소원의 성취이니, 그는 일찍이 자기의 죽음 후 교우들이 모여 자기를 추억하며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바래, 콘스탄티노플에 대성전을 건립하였다.”라고 했습니다. (Euseb., B.iv,c.71) “나의 형제와 친구여, 향료는 하느님께 바치고 죄 중에 잉태된 나는 비애 속에 매장하라. 다만 잊지 말고 부디 기도해 주기를 부탁한다.” (4세기의 성 에프렘) 성 예로니모는 동무 팜마키우스 아내의 상을 맞아 “다른 남편들은 죽은 아내의 묘를 아름다운 꽃으로 꾸미지만, 우리 팜마키우스는 바울리나의 거룩한 묘에 희사의 향유로 장식한다.”고 조사하며 죽은 이를 위해 대신하는 자선의 덕능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사도들이 지극히 거룩한 제사(미사)중에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라 명한 것은 참으로 지당하다. 기도가 저들에게 실로 유익함을 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신 까닭이다.”하며 연옥 교리가 사도들에게서부터 바로 인준되어 왔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Faith of Catholics, Vol. II) 5세기의 위대한 성인, 효성 지극한 아우구스티노는 어머니이신 또 한 분의 위대한 성녀, 모니카의 “내 육체는 아무 곳에나 묻어라. 어디에 어떻게 묻히든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오직 하나 언제든지 주의 제단(제대)앞에 설 때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다오.” 한 유언을 따라 다음과 같은 눈물의 기도를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내 마음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머니의 죄를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옵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상처의 구속 능력으로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쉬게 허락하여 주소서. 또한 나의 형제들로 하여금(교우 및 같은 사제 = 신부, 주교) 이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주님의 제대 앞에서 주님의 종, 모니카를 꼭 기억하게 도와주소서.” (고백록 ix) 추리고 추려 연옥 영혼을 위하는 기도 관습에 대한 교부들의 일치된 견해와 실증을 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개신교에서 가장 추앙하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불후의 기록, 참회록(고백록 Confessiones)의 구절조차 바꾸거나 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직 성서만을 부르짖을 때, 이 구절은 넣고 저 구절은 뺀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내 교단, 내 교리, 내 취향, 내 처지와 어긋나고 불편하더라도 믿고 따라야 하며, 아무나 임의로 보태거나 뺄 수도, 편의대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의혹과 거북함을 깨달았다면 바로 진리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연옥의 심오한 도리는 최근의 발명도 아니요, 어느 천재의 공상도 아닙니다. 사도로부터 내려 오는 초대교회와 유다의 관습과 법령에 기초하고, 성서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인들의 확실한 믿을 교리로써 교부들과 학자들이 다투어 보증한 경건하고 살아있는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또한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 역시 허황하고 추상적인 원리로서가 아니라 천주교인들이 2,000년을 두고 다른 기도와 함께 날마다 반드시 실행해 오고 있는 아주 중요한 실천 덕목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저녁 기도와 경문(성무일도와 미사경본)을 바치고, 미사성제를 드릴 때 마다 꼭 죽은 이를 위해 하느님께 간구하고 청원함은 물론, 밥을 먹을 때에도 반드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천주교인들이 즐겨 바치는 묵주기도 역시 매 순간 연옥의 영혼들을 기억하며 하느님 대전에 끊임없는 기도의 연결고리를 바치고 있습니다. 자부하건데, 세상의 어떤 종교도 우리 천주교만큼 죽은 조상과 부모(또는 형제, 친척, 친구, 친지)에게 효도하고,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정성을 바치는 종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천주교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이런 교리를 지니고 죽음 너머에까지 한없는 위로와 희망을 받는 천주교인이 된 것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