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한 시대를 풍미한 미남배우들

|2017.04.16 19:21
조회 1,490 |추천 1

 

 

 

루돌프 발렌티노 Rudolph Valentino

 

출생 :  1895년 5월 6일

출신 :  이탈리아 (Castellaneta)

사망 :  1926년 8월 23일

신장 :  1.78 m  

 

 The Sheik, The Great Lover 라는 닉네임으로도 알수 있듯이 그는 영화 역사상 최초의 섹스심볼이었다.1895년 5월 6일 이탈리아 카스텔라네타에서 'Rodolfo Alfonzo Raffaello Pierre Filibert Guglielmi di Valentina d'Antonguolla'라는 긴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이탈리아와 파리를 오가며 일탈과 방황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후 1913년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 접시닦이, 정원사, 웨이터, 택시운전사 등... 생활을 위해 그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단 한순간도 댄서에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1914년부터 헐리우드에서 무명의 댄서, 엑스트라 역을 전전하던 그는 1918년 단편 코미디 영화 'A Society Sensation'에서 처음으로 Rudolpho De Valentina라는 이름을 크레딧에 올리게 된다.   (1919년 'A Rogue's Romance' 부터 이름을 지금의 Rudolpho Valentino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여전히 무명배우에 불과하던 그는 1921년 <묵시록의 4기사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에 발탁되면서 명실공히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시크 (The Sheik)>가 개봉되자  이른바 시크 마니아들이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기도 하고, 잡범으로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몇 번, 싸구려 무도회장에서 춤이나 추던 가난한 이탈리아 청년이 헐리우드를 주름잡는 대스타가 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그는 이듬해 'Moran of the Lady Letty', '혈과 사 (Blood and Sand)' 등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미남배우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1923년 나타샤 람보바(Natacha Rambova)와 두번째 결혼을 하면서 밝기만 할 것 같던 그의 앞날에 서서히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전직 무용수이자 영화감독인 그녀는 남편의 스타일과 이미지를 멋대로 변화시키려 했으며 출연료 문제로 소속사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6년 결국 그녀와 이혼하면서 모든 게 다시 제 궤도에 오르는 듯 했으나 신비스럽고 우아한 매력을 자랑하던 본래의 이미지는 이미 큰 타격을 입은 후였다. 그는 심심찮게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며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참다 못한 그는 기자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8월 루돌프 발렌티노는 갑작스레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몇년간 여러가지 좋지 않은 일들이 겹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심했던 탓일까. 그는 끝내 자신의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1926년 8월 23일 서른 한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장례식장에 10만명이 넘는 조문객들이 몰려들었으며, 수많은 여성들이 그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 특히 '검은 옷을 입은 여인(Lady In Black)'과 관련된 신비한 이야기까지 더해지면서 그를 오래도록 전설 속의 스타로 기억되게 했다.

 

 

 

 

 

 

로렌스 올리비에 Laurence Olivier

 

출생 :  1907년 5월 22일

출신 :  영국

사망 :  1989년 7월 11일

신장 :  1.78 m

 

 로렌스 올리비에는 극작가 찰스 베넷(Charles C. Bennett)이 그를 일컬어 셰익스피어를 가장 완벽하게 이해한 배우라고 칭찬한 바 있으며 존 길거드(John Gielgud), 페기 에쉬크로포트(Peggy Ashcroft), 랄프 리차드슨(Ralph Richardson)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배우로 칭송받고 있다. 1907년 5월 22일 영국 Dorking 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연극과 문학에 소질을 보여왔다고 한다.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성가대 학교에 입학한 그는 열살때부터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연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옥스포드의 세인트 에드워즈(St. Edward's) 학교, Central School of Dramatic Art, 버밍엄 레퍼터리 (Birmingham Repertory)소속 활동 등... 그렇게 10년 가까이 아마추어 배우로서 차근차근 자신의 기량을 쌓아나갔다.

 1929년 '이층에서의 살인 (Murder on the second foor)'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한 그는 이듬해 극작가 노엘 카워드(Noel Coward)의 '사생활 (Private Lives)에 출연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1935년 영국 뉴 시어터(New Theatre)에서 공연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존 길거드와 함께 로미오와 머큐시오역을 번갈아 1인2역을 연기한 것은 아직도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1930년, 일년 전 연극무대에서 만난 영국인 질 에스몬드(Jill Esmond)와 전격적으로 결혼했고, 같은해 영국에서 제작된 단편 코미디영화 'Too Many Crooks'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후 영화쪽으로 관심을 갖게 된 그는 1931년 <옐로우 티켓 (The Yellow Ticket)>으로 드디어 헐리우드에 입성하게 된다. (그렇게 몇년간 영화와 연극무대를 오가며 열정적인 활동을 폈지만 그 무렵의 평은 양쪽 다 그다지 좋진 않았다고...)

 

  

 

 그리고 1937년 윌리암 하워드 감독의 <영광의 결전 (Fire Over England)>에 출연하게 되는데 거기서 운명의 여인 비비안 리(Vivien Leigh)를 만나게 된다. 함께 조연으로 출연한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게 되었고 같은 해 '햄릿'으로 함께 연극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기혼자였기 때문에 몇년간 비밀스런 연애를 해야 했다고...) 1939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에 출연한 후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자 바로 다음해 질 에스몬드와 이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연인 비비안 리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그후 몇 년 뒤 2차대전이 일어나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거취문제로 얼마간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40년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 (Rebecca)>가 성공적으로 촬영을 마치며 자연스레 미국에 안주하게 된 두사람은 1941년 알렉산더 코다 감독의 <해밀튼 부인 (That Hamilton Woman)>에 함께 두 주연배우로 캐스팅되기도 했다.  1948년 올리비에는 자신이 감독한 <햄릿 (Hamlet)>으로 작품상, 주연상을 거머쥐면서 헐리우드 영화판에 자신만의 셰익스피어를 완성해 보였다. 

 1960년 비비안 리와 이혼한 그는 다음해 조안 플로라이트(Joan Plowright)와 결혼했다. (몇년 후 비비안 리가 조울증과 결핵으로 죽자 오랫동안 자책했다고 한다) 이후 <스파르타쿠스(Spartacus,1960)>, <엔터테이너 (The Entertainer,1960)>, <공군 대전략 (Battle Of Britain,1969)>, <마라톤 맨 Marathon Man,1976)>... 등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역의 비중과 상관없이)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그는 1947년 6월 12일 기사 작위(Knight Bachelor/King's Birthday Honours)를 수여받았고, 1970년 6월 13일 남작(Baron/Queen's Birthday Honours)칭호까지 얻게 된다.

 

 

 

 

 

 

로버트 테일러 Robert Taylor

 

출생 :  1911년 8월 5일

출신 :  미국 (네브라스카)

사망 :  1969년 6월 8일

신장 :  1.82 m

  

 "The Man with the Perfect Profile(Face)"

 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얼굴이라 불렸던 그는 'Spangler Arlington Brugh'라는 이름으로 네브라스카의 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 육상과 첼로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Doane College에서 첼로를 배우던 중 존경하는 교수를 따라 캘리포니아로 이주, 포모나 대학(Pomona)으로 편입한 후 전공을 의학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연극반에 들게 되었고 그를 계기로 졸업 후 닐리 딕슨 연기학교(Neely Dixon Dramatic School)에 등록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기수업을 받게 된다. 1932년 MGM의 신인배우 오디션에 당선되었고 곧바로 주연급 배우로 캐스팅된 그는 1934년 영화 <애꾸눈 여인(Handy Andy)>으로 간단히 데뷔식을 치른다. 1936년 <형의 아내 (His Brother's Wife)>,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와 공연한 <춘희 (Camille)> 등에 출연하면서 빼어난 외모로 세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단숨에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또 1939년 앞서 <형의 아내>에서 함께 출연했던 바바라 스텐윅(Barbara Stanwyck)과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40년 비비안 리와 공연한 마빈 르로이 감독의 <애수 (Waterloo Bridge)>, <빌리 더 키드 (Billy the Kid (1941)>, <자니 이거 (Johnny Eager,1942)>, <쿼바디스 (Qvo Vadis, 1951)>, <형제는 용감했다 (All the Brothers Were Valiant ,1953)>, <고스트타운의 결투 The Law And Jake Wade>, <야성의 킬리만자로 Killers Of Kilimanjaro, 1959)>... 등을 포함 70여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렇다할 슬럼프 없이 꾸준히 활동을 해오던 그는 1969년 6월 8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해 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레고리 펙 Gregory Peck

 

출생 :  1916년 4월 5일

출신 :  미국 (캘리포니아)

사망 :  2003년 6월 12일

신장 :  1.91 m

 

 '영원한 헐리우드의 전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한 미국인', 'Father Peck'...등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만 봐도 그가 어떤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안티가 없는 몇 안되는 진정한 스타였다. 1916년 4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 라 졸라(La Jolla)에서 'Eldred Gregory Peck'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나이에 부모가 이혼하자 5살 때부터 할머니의 손에 맡겨져 자랐다. (키우던 개와 함께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 극장엘 가곤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기곤 했다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버클리대 의예과를 지원했으나 입학 후 곧 뜻을 바꿔 연기를 전공하게 된다.

 1939년 졸업과 함께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긴 그는 'Neighborhood Playhouse'에 등록했다. 1942년 "The Morning Star"로 브로드웨이 정식 무대에 올랐으며 그해 Greta Konen과 결혼했다. 연극배우로 어느 정도 인기를 얻게 되고, 얼마 후 헐리우드에 진출하게 되면서 1944년 영화 <영광의 나날 (Days of Glory)>로 스크린에 데뷔하게 된다. 두번째 작품<천국의 열쇠(The Keys of the Kingdom)>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면서 줏가를 올리게 되었고, 이듬해 히치콕 감독의 <망각의 여로 (Spellbound)>에서 잉그리드 버그만과 공연했으며, 1946년 <가장 특별한 선물 (The Yearling)>, <백주의 결투 (Duel In The Sun)>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 내기도 했다.

 

  

 

 이후 <신사협정 (Gentleman's Agreement, 1947)>, <정오의 출격 (Twelve O'Clock High,1949)>, <킬리만자로의 눈 (Ernest Hemingway's The Snows Of Kilimanjaro, 1952)>,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1953)>, <진홍의 평원 The Purple Plain, 1954)>, <백경 (Moby Dick, 1956)>, <빅 컨츄리 (The Big Country, 1958)>, <나바론 요새 (The Guns Of Navarone, 1961)>,<서부 개척사 (How The West Was Won, 1961)>, <케이프 피어 (Cape Fear, 1962)> 등... 수많은 문제작과 흥행작들을 찍었으며, 그동안 오스카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수차례, 20여년간 기복없는 전성기를 누렸다. 그리고 1963년 <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로 드디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하게 되면서 헐리우드가 배출해 낸 최고의 배우,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몽고메리 클리프트 Montgomery Clift

 

출생 :  1920년 10월 17일

사망 :  1966년 7월 23일

출신 :  미국 (Omaha)

신장 :  1.78 m

 

 흔히 'Monty'라 불리는 그는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특유의 외모로 한때 전세계 여성팬들을 사로잡은 바 있는 대표적인 꽃미남 스타다. (같은 고향 출신의 후배 말론 브란도가 그의 외모를 질투했을 정도라고...) 1920년 10월 17일 네브라스카 오마하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을 줄곧 불우한 환경속에서 성장해야 했다. 일찍부터 배우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13살때부터 연극무대에 데뷔해 이듬해 브로드웨이 무대로 진출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후 십여년 동안 각종 무대에 올라 찬찬히 연기경력을 쌓아온 그는 1948년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수색자(The Search)>에서 당당히 타이틀롤을 맡게 되었고, 그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외모보다는 연기력으로 승부하는 배우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하워드 혹스 감독의 <레드 리버(Red River)>에 출연했으며, 이듬해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상속녀 (The Heiress)>에 출연해 파괴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제대로 연기해냈다는 평을 듣는다.(함께 출연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1951)>, <나는 고백한다(I Confess,1953)>,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 1953)>에 잇달아 출연한 그는 <젊은이의 양지>와, <지상에서 영원으로>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제니퍼 존스와 열연한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종착역(Indiscretion Of An American Wife, 1953)>, 히치콕 감독의 <나는 고백한다 (I Confess, 1953)> 등에도 이름을 올렸다. 1956년 <젊은이의 양지> 이후 다시 만난 리즈 테일러와 <애정이 꽃피는 나무(Raintree County)>를 촬영하게 되었는데, 5월 12일 리즈의 파티에 다녀오던 중 전화박스를 들이받는 교통사고가 나 얼굴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몇차례의 수술을 끝내고 <애정이 꽃피는 나무> 촬영을 무사히 마쳤으나 그때의 사고는 내성적인 그에게 큰 정신적 상처로 남게 된다.

 

R.E.M - Monty Got A Raw Deal 中

Monty this seems strange to me, the movies had that movie thing

But nonsense has a welcome ring and heroes don't come easy....

 사고 후유증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다시 활동을 재개한 그는 에드워드 드미트리 감독의 명작 <젊은 사자들(The Young Lions, 1958)>과, 조셉 L. 맨키위츠 감독의 <지난 여름 갑자기(Suddenly Last Summer, 1959)>, 존 휴스턴 감독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 1961)>에 출연하여 변함없는 연기력을 선보임으로써 한동안 그를 걱정했던 팬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1961년 네번째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된 <뉘른베르크의 재판 (Judgment At Nuremberg)>마저 끝내 수상하지 못하자 몬티는 다시금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존 휴스턴 감독의 <프로이트 (Freud, 1962)>를 찍은 후 꽤 오랜 공백기간을 보낸 후 1966년 <배반자 (The Defector, 1966)>의 촬영을 가까스로 끝냈으나(사고 이후 갖가지 기행적 행동을 해 제작사와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고 한다)  1966년 7월 23일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관상동맥증에 의한 심장마비. 그의 나이 겨우 마흔 여섯이었다. 그의 스승인 로버트 루이스(Robert Lewis)는 그의 진짜 사인은 심장마비가 아닌 오랜기간에 걸친 자살이라는 발언을 해 안그래도 슬픔에 잠겨 있는 팬들을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R.E.M의 'Monty Got a Raw Deal', Jets to Brazil의 'Conrad ', The Clash의 'The Right Profile' 등이 모두 그를 기리는 노래이며 이후 몽고메리 클리프트라는 이름의 밴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알랭 들롱 Alain Delon

 

출생 :  1935년 11월 8일

출신 :  프랑스, 파리

신장 :  1.82 m

 

 오랜 세월동안 미남의 대명사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알랑 들롱. 그가 출연한 영화보다 그의 얼굴과 이름이 먼저 유명해진 특이한 배우이며, 스타시스템을 거부하는 프랑스에서 탤런트적인 기질을 가진 몇 안되는 '연예인'이기도 하다.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Sceaux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기 부모가 이혼한 후 불우한 환경속에서 생활했으며 그때문에 학업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17세에 해군에 입대해 베트남, 인도차이나 등지에서 복무했으며 제대 후 또 얼마간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그 무렵 그는 웨이터, 운반원, 외판원 등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별볼일 없던 청년의 운명을 바꿔놓는 일이 생긴다. 알랭 들롱은 우연히(?) 영화제가 한창 진행중이던 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영화 제작자들의 눈에 뛰게 된 것이다.(그의 재능을 알아본 데이빗 셀즈닉이 직접 출연제의를 했으며 헐리우드로 데려가기 위해 영어를 가르치려 했다는 소문도...) 어쨌든 그것을 계기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 그는 1957년 프랑스의 범죄스릴러 영화 'Quand la femme s'en mele'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그리고 이듬해 'Sois belle et tais-toi',  <크리스틴 (Christine)>을 연달아 찍었는데 <크리스틴>에선 당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던 로미 슈나이더의 상대역으로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그 만남이 두 사람, 특히 로미 슈나이더의 운명을 바꿔놓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잘생긴 외모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그는 1960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부동하게 다지게 된다. 그후,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 (Rocco E I Suoi Fratelli, 1960)>,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태양은 외로워 (L'Eclisse,1962)>, 앙리 베르누이 감독의 <지하실의 멜로디 (Melodie En Sous-Sol,1963)>, 비스콘티 감독의 <레오파드 (Il Gattopardo,1963)>, 르네 클레망 감독의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Paris brule-t-il?)>, <시실리안 (Le Clan Des Siciliens,1969)> 등... 최고의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냈다.

 '70년대 들어와선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암흑가의 세 사람 (Le Cercle Rouge,1970)>, <리스본 특급 (Un Flic,1971)>, 테렌스 영 감독의 <레드 선 (Soleil Rouge,1973)>, 마이클 위너 <스콜피오 Scorpio>, <호세 지오바니 감독의 <르 지땅 9Le Gitan,1974)>등과 같이  주로 비슷한 캐릭터의 범죄액션물에 자주 출연했으며, 조셉 로지 감독의 <고독한 추적 (Monsieur Klein,1976)>에서는 복잡한 연기를 절도 있게 소화해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80년대에 들어선 <스완의 사랑 (Un Amour De Swann)>,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랗다 (Ne Reveillez Pas Un Flic Qui Dort)> 등 몇편의 영화에서 호평을 듣기도 했지만 대부분 흥행을 위주로 한 영화들이거나 전에 비해 작품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또 이후 지금까지 몇가지 질 나쁜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고뇌하는 아름다운 청년의 이미지로 기억하는 팬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로버트 레드포드 Robert Redford


출생 :  1937년  8월 18일

출신 : 미국 (산타모니카)

신장 : 1.78 m

 

 로버트 레드포드는 1937년 8월 18일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Charles Robert Redford J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954년 L.A의 Van Nuys 고등학교를 졸업(나탈리 우드가 학교 동문이라고...)했는데 그곳에서 야구 장학생으로 콜로라도 대학 미대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후 학교를 그만두고(만취해 장학금을 포기해야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연관이 있지 않나 하는 추측을...) 뉴욕으로 가 American Academy of Dramatic Arts에 입학, 무대미술 쪽으로 전공을 바꾼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지 않아 그만두고 이번엔 연극배우를 지망하게 된다. 이후 몇년간 브로드웨이 무대를 전전하던 그는 1960년 TV 시리즈 <매버릭 (Maverick)>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60년대 초중반까지 TV에서 주로 활동했다.

 1962년 <워 헌트 (War Hunt)>, 1966년 <저주받은 재산 (This Property Is Condemned)>,  <인사이드 데이시 클로버 (Inside Daisy Clover)>,  <체이스 (The Chase)> 등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서서히 활동무대를 옮겨 온 그는 1969년 조지 로이 힐 감독의 버디무비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에 선댄스 키드 역으로 출연하면서 함께 출연한 폴 뉴먼과 함께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조지 로이 힐,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 세명의 콤비는 1973년 <스팅>에서 다시 뭉쳐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1969년 <내일을 향해 달려라 (Tell Them Willie Boy Is Here)>와 <다운힐 레이서 (Downhill Racer)>로 영국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연기력을 인정 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운명을 바꾼 계기는 앞서 <저주받은 재산>으로 맺어진 시드니 폴락 감독과의 인연이다. 두 사람은 1972년 <제레미아 __ (Jeremiah Johnson)>, 1973년 <추억 (The Way We Were)>,  1975년 <콘돌 (Three Days Of The Condor)>, 1985년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 1990년 <하바나 (Havana)>를 함께 작업하면서 오래도록 식지 않는 우정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1980년 첫 감독 데뷔작 <보통 사람들 (Ordinary People)>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쥐면서 멜로 드라마에나 어울리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남자라는 (얼마간 시드니 폴락의 탓도 있는) 이미지를 단숨에 탈피한다. 이후 그가 감독한 <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 1992)>, <퀴즈쇼 (Quiz Show, 1994)>등도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추었다는 평을 이끌어내며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 한몫을 한다. 그는 자신의 출세작인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극중 이름인 선댄스 키드의 이름을 따 선댄스 인스티튜트(Sundance Institute)를 창설해 인재양성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으며 역시 그가 설립한 선댄스 영화제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젊은 감독들의 요긴한 창구가 되고 있다. 

 

 

 

 

 

 

 

 

워렌 비티 Warren Beatty

 

출생 :  1937년 3월 30일

출신 :  미국 (리치몬드)

신장 :  1.88 m

 

 1934년 누나 셜리 맥클레인(Shirley MacLaine)이 태어나고 3년 후 1937년 3월 20일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서 헨리 워렌 비티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워렌 비티가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괄괄한 성격의 셜리가 자주 동생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서서히 남성미를 드러내기 시작한 그는 고교시절 이미 여학생들의 우상이었으며 풋볼팀의 스타이기도 했다. 그후 알링턴(Arlington) 하이스쿨을 졸업하고 노스웨스턴대학(Northwestern University)에 입학하게 되나 당시 연기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얼마지 않아 중퇴한다. 그후 스텔라 애들러(Stella Adler)연극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하며 차츰 티비와 연극무대를 접하게 된다. 누나인 셜리가 일찍부터 뉴욕에서 모델 일과 브로드웨이쇼에 출연하며 연예계에 진출해 있던 터라 그의 데뷔도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그의 첫 주연작은 티비 시트콤 'The Many Loves of Dobie Gillis (1959)'이며 이후 몇편의 연극무대에 올라 토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24살인 1961년 엘리아 카잔 감독의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lass)>에서 주연을 맡으며 스크린에 데뷔하게 되는데, 그는 이 한편의 영화로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 후 출연한 몇편의 영화들의 흥행성적이 저조하자 그는 직접 제작자로 나서기로 결심하였고, 그렇게 해서 나온 영화가 바로 아서 펜 감독의 1967년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이다. 이후로 그는 시나리오에도 재능을 보이며 <바람둥이 미용사 (Shampoo)>, <천국의 사도 (Heaven cant wait)>, <레즈 (Reds)>등의 각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천국의 사도>는 그의 첫 감독 데뷔작이며, 역시 감독, 주연을 겸한 <레즈>는 그해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워렌 비티는 감독, 배우, 각본, 제작뿐만 아니라 그동안 정치쪽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그는 미국의 골수 민주당파로 잘 알려져 있는데, 1968년엔 고 로버트 케네디 대선 후보의 찬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짐 맥거번, 지미 카터, 게리 하트등의 후보들을 지원해 왔으며 짐 맥거번(매사추세츠 하원의원) 선거 때는 백만달러의 후원금을 냈고, 선거운동을 위해 '대부'와 '스팅'의 주연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짐 맥거번은 당시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에 맞서던 의식있는 정치인 중 한명이다) 한편 1998년 역시 자신이 감독한 <불워스 (Bulworth)>를 내놓은 워렌비티는 이 영화를 통해 민주당의 지지부진한 정책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리차드 기어 Richard Gere

 

출생 :  1949년 8월 31일

출신 :  미국 (필라델피아)

신장 :  1.80 m

 

1949년 8월 29일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보험 외판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때는 주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 악기연주와 작곡을 했으며 North Syracuse Central 고등학교를 졸업 후 메사추세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나 1969년 배우에의 뜻을 품고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오래도록 염원하던 록뮤지컬 '그리스 Grease'의 주역을 따내기 위해 영국 런던까지 가는 열정을 보였던 그는 한동안 연극무대에서 활동했으며 간혹 TV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1975 <경찰 보고서 Report to the Commissioner>라는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스크린 신고식을 치루었고, 이듬해 <베이비 블루 마린 Baby Blue Marine>으로 서서히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1977년 리처드 브룩스 감독의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Looking For The Mr. Good Bar >에서 비중이 작은 건달역으로 출연하는데 제목과 부합되는 묘한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어필된다. 그리고 이듬해 테렌스 멜릭 감독의 <천국의 나날들 Days of Heaven>에서 주인공 '빌'역에 발탁되면서 연기력까지 인정받게 된다.(그는 이 영화로 1979년 'David di Donatello'영화제에서 외국인연기자상을 수상했다) 

 

  

 

이후, 1979년 존 슐레진저 감독의 <전장의 우정 Yanks>, 1980년 폴 슈레이더 감독의 <아메리칸 지골로 American Gigolo>에 출연하였고 1982년에 테일러 헥포드 감독의 <사관과 신사 An Officer And A Gentleman>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로 그는 당대 최고의 로맨틱가이로 세계 여성팬들을 사로 잡게 된다. 그리고 1983년 고다르 감독의 네멋대로 해라를 리메이크한 <브레드레스 Breathless>에 출연하게 되는데 그의 섹시한 매력이 조금 부족한 작품성마저 상쇄시키는 듯했다. 이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카튼클럽 (Cotton Club,1984)>, 리처드 피어스 감독의 <노머시 (No Mercy,1986)>, 시드니 루멧 감독의 <파워 Power>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섹스심볼의 대명사라는 이미지에서 서서히 탈피해갔다. 게리 마샬 감독의 <귀여운 여인 Pretty Woman (1990)>, 마이크 피어스 감독의 <유혹은 밤 그림자처럼 Internal Affairs (1990)>, 필 조아누 감독의 <최종분석 Final Analysis (1992)>, 마크 라이델 감독의 <마지막 연인 Intersection (1994)>, 그레고리 호블릿 감독의 <프라이멀 피어 Primal Fear (1996)>,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닥터 T Dr. T And The Women (2000)>, 아드리안 라인 감독의 < 언페이스풀 Unfaithful (2002)>, 롭 마샬 감독의 <시카고 Chicago (2002)>, 토드 헤인즈 감독의 <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 리처드 세퍼드 감독의 <더 헌팅 파티 The Hunting Party  (2007)> 등... 30년 넘도록 자신이 맡은 역할들을 욕심없이(?) 소화해내는 보기드문 배우다.

 

 

 

 

 

 

 

덴젤 워싱턴 Denzel Washington

 

출생 :  1954년 12월 28일

출신 :  미국 (뉴욕)

신장 :  1.84 m

 

 덴젤 워싱턴은 1954년 뉴욕 마운트 버논에서 태어났다. 원래 의사를 꿈꾸었던 그는 고교 졸업 후 포드햄 대학에 들어가 정치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드라마와 농구에도 관심이 많았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탤런트쇼를 접하게 되면서 연기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기 위해 일년간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던 그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티비영화 <소중한 승리 (Wilma, 1977)>에 출연하면서 정식 연기자 생활에 들어선다. 영화에 데뷔한 것은 4년 후로 <카본 카피 (Carbon Copy)>란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출연한 티비용 의학드라마 <세인트 엘스웨어 (St. Elsewhere, 1982~1988)>를 통해 그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하였고, 이 무렵 찍은 두어편의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인종문제를 다룬 노만 주이슨의 1984년 작 <솔저 스토리 (A Soldier's Story)>와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정책에 대항하는 비폭력 흑인 지도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의 <자유의 절규 (Cry Freedom, 1987)> 등이 그것이다. <자유의 절규>로 유수의 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되었던 그는 1989년 작 <영광의 깃발 (Glory)>을 통해 마침내 아카데미와 골든골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시드니 포이티어 이후 대표적인 연기파 흑인배우로 발돋움하게 된다.

 

  

 

 1990년 그는 오랜 동안 교분을 이어가게 되는 감독 스파이크 리를 만나 <모베터 블루스 (Mo' Better Blues)>를 찍었으며, 이후에도 두 사람은 <말콤X (Malcolm X, 1992)>, <히 갓 게임 (He Got Game, 1998)>, <인사이드 맨 (Inside Man, 2006)> 등에서 함께했다. 1993년 <필라델피아 (Philadelphia)>, <펠리칸 브리프 (The Pelican Brief)>,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 등 한해 동안 세편의 영화에 잇달아 출연하면서 대중적 인기까지 얻게 된다. 이후 <크림슨 타이드 (Crimson Tide,1995)>, <커리지 언더 파이어 (Courage Under Fire,1996)>, <프리쳐스 와이프 (the preacher's wife,1996)>, <다크 엔젤 (Fallen, 1998)>, <허리케인 카터 (The Hurricane,1999)> 등... 90년대에 들어오면서 헐리우드에서 그가 차지하는 입지는 완전히 확고부동해졌으며 (흑인배우로서)더 이상 그를 능가하는 배우는 없었다. (90년대 후반부터 윌 스미스의 추격이 만만찮아졌...)

 2000년대 들어서도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리멤버 타이탄 (Remember the Titans,2000)>, <트레이닝 데이 (Training Day,2001)>, <존 큐 (John Q,2002)>, <앤트원 피셔 (Antwone Fisher,2002)> 등... 이제는 흑인배우라는 수식어조차 어색해졌으며 더불어 (이전의 백인 배우를 보좌하는 듯한)투톱에서  원톱시스템에 더 적합한 배우로 인식이 굳어졌다. (<트레이닝 데이>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맨 온 파이어 (Man on Fire, 2004)>,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The Manchurian Candidate, 2004)>, <데자뷰 (Deja Vu, 2006)>,  <아메리칸 갱스터 (American Gangster,2007)>까지... 작품성과 대중성을 아우르는 최고의 영화들이 그의 차지가 되었으며 그의 입지는 논란의 여지없이 독보적이다. 존재감만으로도 작품의 수준을 한단계 높게 보이게 만든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그는, 현역 최고의 배우다.

 

 

 

 

* 노니 장독 깬다고... 고전배우들 이미지 정리 중 한 포스팅 해봤다.

이십여 명의 후보를 압축해 고른 베스트 텐으로,

물론 주관적인 판단이 많이 개입된 리스트이다.

쟨 누군지도 잘 모르겠다고 하실 분도 있을테고,

누구누구는 왜 안 보이지라는 분도 계실 듯싶다.

아쉬운 분은 아래 후보들 중 한번 살펴보시길...

 

*2. 리스트에 제임스딘이 빠져서 섭섭한 분이 많으신가 봅니다.

댓글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임스딘, 리버피닉스 등은

이미 다른 주제로 포스팅을 해두었고,

또 루돌프 발렌티노라는 대표적인 인물이 있는데

꽃같은 시절에 요절한 배우들만

주러주렁 나열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거 같아서요.

보시다시피 자리도 열 개뿐이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봐도 제임스 딘이 미남처럼 보이진 않네요.

제발 목숨만...)

  

 

 

 

 

 

 

 

 

 

 

 

 

  

 

 

 

 

 

 

 

 

 

 

 


 

추천수1
반대수3

공감많은 뉴스 연예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