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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름한 30살(19)

리드미온 |2004.01.30 14:18
조회 17,371 |추천 0

세상에 커플이라고는 '김미나'와 '서민준'만 있는 것처럼 신문이나 잡지는 앞다투어 그들의 로맨스에 관해 보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마치 영화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와 휴그랜트의 만남처럼 여배우와 평범한 남자의 만남으로 포장되어 여자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민준에게 찾아온 행운은 마치 '김미나'가 평강공주라도 되어 바보온달이 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김미나'의 사랑이 '서민준'이란 남자의 인생을 바꾸게 한 '마술'로 묘사되었다.

 

몇 해전 어느 여배우가 대기업 아들과 결혼해서 이혼한 직후라 그런지 여자 연예인이 평범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올해의 사랑' 대상에라도 선정될 듯한 미담처럼 보여서 '김미나'의 이미지도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고 있었다.

어떻게 평범한 남자와 사랑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김미나는 늘 똑같이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둥, 첫눈에 반하는 거라는 둥....사랑에 빠진 전형적인 여자의 감동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그런 '김미나'를 볼 때마다 정말 울컥하는 마음에 텔레비전을 때려 부수고 싶었다.

서민준의 사랑하는 여자는.........'여기'........있는데.......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기사는 로맨스에서 끝나지 않았다. 벌써 CF계에서 이 두 사람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자연예인이 결혼을 발표한 후에 이렇게 주가가 오르는 것은 처음이라며 '평범한 남자'를 선택했다는 것이 여자는 물론 남자들에게 더 어필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평범한 남자가 '모델'처럼 멋있는 남자라는 것이 더욱 '김미나'를 돋보이게 했다. 그렇다면 이미 민준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특별'했던 것일텐데...

'평범하다'라는 것도 이미 특별하다는 또 다른 표현인지도...

 

하긴 세상이 바뀌긴 바뀌었다. 여자만 '신데렐라 컴플렉스' 가지라는 법은 없다.

남자들도 세상살기 힘들고 또 한꺼번에 자신의 운명이 반전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남자들의 말못하는 감정을 파고들어간 것이 '김미나'의 결혼발표였던 것이다.

이로서 '김미나'는 얼굴도 예쁘고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남자들의 완벽한 '이상형'이 되었던 것이다.

요즘 남자들이 집안 일도 잘하고 돈도 벌어오는 여자를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내 눈에는 둘의 다정한 사진으로 도배된 기사끄트머리에 가끔 등장하는 '서민준'이 모델제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원래 미남인데다가 어디 가면 사람들에게 종종 '모델'같다라는 말을 듣는 민준에게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는 법이지만....유일하게 그 부분만이 '김미나'와 연관된 '서민준'이 아닌 '서민준'에 관한 기사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김미나'의 애인으로서만 '서민준'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호화찬란한 기사중에 그 한 줄이 '서민준'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유심히 보게 되었다.

나는 점점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 세상의 단 한사람으로서 고립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이러다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혼자 산에 올라가 외치고 한을 풀었던 것처럼 '서민준을 사랑해!'라고 혼자 땅이라도 파고 소리쳐야할 신세가 될 것만 같았다.

 

민준은 이런 내 불안한 마음을 알고 있듯이 하루에 한번은 꼭 내게 전화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 전화가 도통 언제 걸려오는지 알 수 없어서 24시간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내 하루는 23시간 59분의 기다림과 1분의 통화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중에 1분이라도 행복한 시간이 있으니까....그 1분이 23시간 59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거라고.....

나는 나머지 23시간 59분은 일에 집중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다. 더구나 새로 맡은 '리츠칼튼'프로젝트도 '독수리5형제'같은 우리 팀의 팀워크로 성공시키고 싶었다.

이미 며칠 째 밤늦은 야근으로 '리츠칼튼'의 홍보를 어떤 컨셉으로 할 것인지 회의를 하고 있었다.

 

"리츠칼튼 호텔의 어떤 느낌을 강조할까요?"

 

나는 김대리, 하연, 은수를 한번 둘러보고 말을 꺼냈다.

질문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거다. 아주 쉽게....

 

"호텔이니까...편안함...안락함.....?"

 

하연의 대답이다. 너무 평범하다.

 

"은수씨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일부러 은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요즘따라 은수는 확실히 보통 때와 달랐다. 자주 얼굴에서 어두운 표정이 스쳐갔다. 만약 김대리와의 실연때문이라면 내가 위로해주고 싶었다. 제대로 말도 표현하고 얼마나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있을까...

 

"제 생각엔.....김미나가 리츠칼튼 호텔에서 애인이랑 인터뷰했잖아요...그걸 사람들의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요. 그래서 '커플의 사랑이 자라는 곳'의 이미지가 어떨까 싶어요..."

 

내가 듣기 싫은 사람의 이름이 또 나와 버렸다. '김미나'

 

"그건 한계가 있다고 봐요. 커플이라는 것은 너무 한정적인 컨셉 아닐까요?"

 

김대리의 반박이 바로 이어졌다. 웬지 아슬아슬해 보인다. 은수의 얼굴은 바로 굳어졌다.

역시 눈치 없는 김대리의 성격이 은수를 열받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대안을 말씀해보세요. 남의 의견 비방만 하지 말고요."

 

은수는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김대리님 의견에 동의해요. 커플보단 좀 더 대중적인 컨셉이 필요할 것 같아요."

 

하연이 한마디 거든다.

아무 것도 모르는 하연이니까 그럴 수 있다 싶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회의가 아이디어 도출의 장소가 아니라 아이디어 깔아뭉개기 자리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김대리는 어떤 컨셉을 말하는 거야?"

 

내가 끼어들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제 생각엔 커플보다는 커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거죠.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요즘 김미나가 각광받는 이유가....뭐겠어요? 사랑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델이 되니까 그런 거죠."

 

도대체 요즘 화제에서 어떻게 김미나는 빠지지 않는 걸까....

김미나가 사랑을 하고 싶다...라는 사람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

사랑에도 과연 '모델'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

어떤 사랑을 하고 싶다는....?

아니다. 사랑은 그냥 맞닥뜨리는 거다. 모델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추는 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언제쯤 사랑은 매스컴으로부터 자유로워질까...

모두들 자신이 생각하는 아닌 누군가 만들어 놓은 사랑에 맞추어 사랑하는 이 시대가 정말 증오스럽다...

 

"그럼 커플이 되고 싶은 사람을 위한 공략이 뭔데?"

 

정말 김대리가 근사한 대안을 가지고 있는 걸까?

 

"리츠칼튼에선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이런 거 어때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그거야 몇 만 년 써먹는 만만한 컨셉아냐?"

 

이번엔 내가 반박하고 나섰다.

 

"남자들이 데이트할 때 말이죠. 남자들이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 같지만, 그건 초기나 그런 거고요. 익숙해지면 여자가 원하는 곳에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술집도 여자들을 위한 안주에 신경을 쓰는 거고요. 리츠칼튼도 마찬가집니다. 여자를 오게 만드는 공략을 해야 한다는 거죠."

 

김대리의 얘기는 내 질문에서 또 핵심을 빗나간 대답인 것 같다. 갑자기 여자 공략법? 이라니...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에서 너무 비약한 것 같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와 여자....공략법하고 무슨 상관관계냐고?"

 

나는 다그쳐 물었다.

은수나 하연도 다들 궁금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이런 거 말에요. 리츠칼튼에는 백마탄 왕자가 기다리고 있다...이런 거요."

 

김대리의 설명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콧구멍을 파다가 다른 사람과 시선이 마주친 것처럼 무안하고 당혹스럽다.

 

"김대리님! 여자에 대해 너무 편협한 거 아니에요? 여자들이 다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보고 계신 거 아니냐고요."

 

은수가 참다못해 김대리를 몰아부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감정이 분명했다.

나라도 이성을 차려야겠다.

 

"김대리 말도 일리가 있네. 신데렐라 컴플렉스는 좋은 건 아니지만, 지금 우리는 여성운동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여자들의 보편적인 정서라는 면에서는 틀린 말은 아니야."

 

나는 중재를 한다는 것이 김대리 편을 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 우리가 뭐하러 새로운 아이디어 회의를 해요? 다른 사람들이 해왔던 거나 반복할 거라면?"

 

은수는 좀처럼 굽히지 않는다.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니다. 저렇게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일은 처음 보는 모습 같았다. 실연이 적개심으로 변해 투쟁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걸까?

그렇다면 나도 어떻게'김미나'와 그를 부러워하는 세상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인가 전략을 짜고 싶다.

 

"자자....커플은 아니다...여자를 공략한다....여기까지 정리된 걸로 하고 다시 얘기를 해보자고..."

 

나는 어떻게든 이 날카로운 신경전을 활발한 아이디어 토론장으로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리츠칼튼은 품격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고 여자 고객들을 끌어당기게 하려면....그곳에 가면 백마탄 왕자를...만날 수 있다.....라는 게 최고라는 거에요."

 

김대리도 좀처럼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김대리님은 너무 편협하다니까요. 저라면 일하는 여성이 쉴 수 있는 곳으로 하겠어요!"

 

은수의 이어지는 반박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일하는 여자라도 백마탄 왕자를 꿈꿀 수 있다.

어쩐지 결정권자인 나는 김대리의 의견에 동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은수의 날카로움도 의식되었다.

이럴 땐 차라리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게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역시 사람이 알고는 몰인정해질 수 없다. 잔인해질 수도 없다. 오로지 오해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은수씨....저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런 제안하는 거 아닙니다. 나름대로 참고 자료도 갖고 있습니다. 리츠칼튼의 선호도는 확실히 여자 쪽이 앞섭니다. 남자들은 평범한 이름을 가진 중심가의 대형 호텔을 선호하는 반면...."

 

"정말 이젠 인신공격까지....그럼 전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하나요?"

 

은수는 이젠 김대리의 말을 잘라버리고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불안하다. 위태롭다. 아슬아슬하다. 폭발할 것 같다.

5.4.3.2.1.....

내가 마음 속의 카운트를 마치기도 전에 은수는 용수철 튕기듯 회의실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제일 이성적인 판사가 되어 10분간 휴정을 외치고 잠시 자리로 돌아왔다.

김대리의 표정도 그리 밝은 것 같지는 않았다.

 

"김대리...두 사람이 잠시 대화로 풀고 다시 얘기하자고..."

 

"네."

 

짧은 대답을 한 김대리는 은수를 찾는지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야 말로 폭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은수가 부러웠다. 개인적인 감정이라도 드러낼 상대가 함께 있지 않은가...

나는 나혼자 감정들을 삭히며 기다림의 감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죄수다....

 

나는 잠시 쉬는 사이 민준이 내가 보낸 사진 메일에 회신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어 메일함을 클릭했다. 

요즘 내가 생긴 버릇은 수시로 핸드폰 쳐다보는 것, 또 메일 체크하는 것이었다.

민준과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끈....

메일함을 클릭해서 보낸 사람의 이름에 '서민준'이 있는 것을 보며 하늘을 넘어 우주로 날아갈 만큼 기뻤다.

야호~야호~메일이다!! 메일!!!!

 

사진 잘 받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진을 보고나니 훨씬 힘이 나는 것 같다.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시작한 일이니 내가 끝을 내야겠지.

그리고 이 메일도 불안하네....

다른 아이디 하나 더 만들었으니까

그쪽으로 메일 보내줬음 좋겠다.

min2ji@nate.com 

아이디는 봐서 알겠지만 내 이름 첫자와 네 이름 첫자로 했어.

우리만의 비밀 통로야....

사랑한다....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추신: 난 네 생각 날 때면 타워브릿지를 보곤 해.

         지우도 우리 추억을 생각하며 지내주길....

 

짧은 메일이었지만 내 빈 마음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나도 한참 타워브릿지를 바라보며 민준과의 추억을 회상하다 스키장 가라고 건네줬던 '어메리컨 익스프레스 카드'가 생각났다.

그 때 이후로는 다시 쓸 일도 없고 언젠가 돌려줘야지 생각하며 지갑에 넣어둔 채로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민준이 남겨준 추억의 물건이 하나 더 있다는 기쁜 마음에 지갑을 열어 그 카드를 보았다.

약간 옅은 연두색에 외국 사람의 그림이 보였다.

그런데.....

카드에 적혀진 영문 이름은........

민준의 성인 S나 이름인 M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Y'로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하다 싶어 알파벳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Y.E.O.N........S.I.L........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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