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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B 의 술잔] 2. 그녀는 늘 바쁘다

so & fun |2004.01.30 18:03
조회 336 |추천 0

“네가 김우영이니?”

 

꼬장꼬장하기 그지없는 이 교수의 수업을 땡땡이 치고 나무그늘 아래에서 벤치에 누워 있을 때였다. 전 날의 숙취가 채 가시지 않아 전공마저도 제끼고 청한 잠을 방해하는 앙칼진 음성. 애써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단발머리의 낯선 여자 하나가 도끼눈을 치켜뜬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네가 신방과의 ‘그’ 김우영 이냐고.”

 

오로지 나의 신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여자의 태도는 마치 조금 전의 꿈에 나타난 자객과도 같았다. 검은 복면에 장도를 찬 그 자객은 ‘네가 무당파의 차기 방주인 김우영이냐?’ 고 물었던 듯하다.

 

“하움, 잠시만.”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앉으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학생증을 찾아 여전히 눈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여자에게 내밀었다.

 

“내가 니가 말하는 ‘그’ 김우영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넌 누구냐?”

 

열한 개의 단어를 느릿하게 이어대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눈앞의 여자의 신원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저 ‘그’라는 단어가 갖는 뉘앙스는 상당히 부정적이군. 설마 강의 토낀 게 들통 나서 교수가 잡으러 보낸 건가? 하지만 조교치고는 어린 거 같은데…. 그럼 그 강의를 듣는 타과생?

 

하지만 그러한 유추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짜악-.

 

백주대낮에 외관상 멀쩡한 여자가 외관상 멀쩡한 남자의 아구를 날리는 일은 절대 일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드라마나 영화, 혹은 소설과 같은 허구에서나 극적 재미를 높이기 위해 작가들이 쓰는 하나의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내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날아온, 아아, 이런, 씨펄, 자다가, 날벼락 같은, 따귀 한 대여-.

 

“나쁜 자식!”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껌 내지는 침을 뱉을 때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간단히 말해서 퉤-,하는 식이었다는 거다.

 

 “야!”

 

순식간에 두통이고 잠이고 사라졌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흥분된 외침이 여자의 뒤통수를 잡았고 그녀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홱하니 돌아섰다. 나를 향해 째려보는 눈초리는 익히 사람도 죽일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다. 요즘 들어 빠져들기 시작한 무협지에 빈번히 등장한 ‘갑자 9 정도의 내공을 갖춘 형형한 눈빛’ 정도였다고 하면 적절한 묘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눈빛에 기가 죽을 수는 없는 일. 나는 단전의 기력을 모아 일갈의 사자후를 토해냈다.

 

“너 누구야? 얌전히 낮잠 자고 있는 사람 깨워서 아무 이유도 없이 손도장을 찍어?”

 

“아무 이유 없이?”

 

오히려 여자는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네 양심을 손을 얹고 네가 지은 죄를 곰곰이 생각해봐.”

 

“뭐라고?”

 

“물론 너 같은 애들은 양심이란 게 뭔지도 모를 확률이 더 크지만.”

 

여자는 다시금 독이 묻은 암기를 날리고 유유히 등을 돌렸다.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은 주화입마의 상태에서 벗어나 원기를 되찾은 것은 딱 10초 후였다.

 

“야! 너 거기 못 서?”

 

나는 냉큼 신형을 날려 그녀의 팔목을 거머쥐었다.

 

“이거 놔.”

 

난 데 없이 따귀를 맞은 마당에 고이 놔줄 인간 김우영이 아니다. 내친 김에 우악스럽게 팔목을 거머쥔 손에 힘을 주자 여자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놔, 이 손 못 놔!”

 

부러진 인형의 목처럼 좌우로 건덩거리는 손목은 진짜 한 주먹거리도 안 됐다. 이런 손모가지에서 어떻게 그런 괴력의 파워가 나올 수 있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뺨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완력을 사용해 정체불명의 생쥐에게서 진상을 파악할 권리 정도는 있겠지.

 

“인간 김우영. 물론 이십 평생 살아오면서 지은 죄가 없는 건 아니지만….”

 

“…….”

 

“적어도 너한테 맞을 짓을 한 기억은 없는데?”

 

그 말에 잡힌 팔목을 빼내려고 버둥거리던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서?”

 

“뭐?”

 

“그래서 어쩔 거냐구!”

 

이거 아무래도 오늘은 재수 옴 붙은 날이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자다가 날벼락을 맞지 않나, 궁지에 몰리자 되려 고양이를 물려하는 쥐를 보지 않나. 

 

“억울하게 맞은 거니까 내 뺨도 한 대 칠래?”

 

“…….”

 

“그래, 어디 한번 쳐보시지. 쳐, 치란 말야.”

 

아예 얼굴까지 들이미는 게 완전히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식이다.

 

“야, 너 정말….”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다 보면 말문까지도 막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임기응변에 능한 나라도 인간인 이상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는 도리가 없다. 결국 나는 한걸음 후퇴를 하며 그녀의 팔목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성질을 억누른 채 접대용 미소를 날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렴 신방과의 ‘그’ 김우영이 아녀자의 사소한 행패에 폭력으로 대항하겠습니까. 다만 제가 낭자의 심기를 어떻게 불편하게 하였기에 그 섬섬옥수로 소인의 면상을 갈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연유나 듣기를 청할 뿐이죠.”

 

원래 이중부정은 강한 긍정을 뜻하는 법. 만일 내가 여자였다면 이런 식으로 느물거리는 상판대기를 다시 한번 후려쳤겠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고, 역시나 경험에 근거한 그 지식만큼은 어긋나지 않았다.

 

“이유가 그렇게 궁금해?”

 

여자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간신히 자유롭게 된 팔목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나가다가 미친개한테 물리기도 쉽지 않은 마당에 낭자가 미친년이 아니고서야 어찌 생면부지 남자의 따귀를…”

 

“그럼 간단하네.”

 

여자는 가차없이 내 말의 꼬랑지를 잘랐다. 그리고 내가 그 ‘간단함’의 진의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다른 쪽 뺨에 불이 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왼쪽 뺨을 감싸 쥐었고 그와 동시에 두세 발자국 물러서 안전거리를 확보한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띈 채 말했다. 

 

“그냥 미친년한테 물렸다고 생각해. 그럼 된 거지?”

 

 

***

 

 

“뭘 그렇게 혼자 실실 웃고 있어?”

 

기다란 가로등 불 아래 그 날의 나처럼 양쪽 볼이 붉게 물든 한 여자가 서있다.

 

“니 행색에, 그 표정에… 야, 그만 웃어. 누가 보면 미친놈으로 보기 십상이다.”

 

내 나이 스물한 살 때 내 따귀를 올려친 여자다.

 

“어디 갈래? 나 이미 술 한 잔 걸쳐서 많이 마시지는 못할 텐데…. 그래도 괜찮지?”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야, 김우영. 너 계속 그렇게 웃기만 할래? 나 할 일이 태산인 사람이야. 너처럼 가진 건 시간밖에 없는 백수하고 히히덕거릴 여유 없다니까?”

 

나는 이미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기에는 너무 게을러서 묻는 게 귀찮아졌고
아마도 그녀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너무 바빠서 잊어버렸던 것일 게다.

 

< 계속 >

 

written by f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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