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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멜랑 |2018.05.03 11:56
조회 590 |추천 0



 처음 만났던 날, 날 보고 해사하게 웃던 그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싸구려 국밥집, 직접 만든 것이 아닌 사왔을 것이 분명한 겉절이를 맛있게 먹던 나를 보고 그게 맛있냐고 물으며 짓궂게 이지러지던 그 눈매를 기억한다.
 키가 참 컸고, 손도 참 고왔다. 사내 녀석이 무슨 손이 그렇게 예쁘냐며 옆에서 던진 농에 너는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부럽냐고 받아쳤었다.
 너의 첫 인상은 어른을 품은 어린아이 같았다.
 어린아이를 품은 채 겉모습만 어른이 된 나와 판이하게 달라보였다.
 그게 너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동호회 사람들의 모임에 너는 참 부지런히도 나왔다.
 나는 어느날 부터인가 너를 보러 나왔다.
 고작 몇 시간,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진지한 얘기를 할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먼 발치에서 널 보는 것 만으로도 청량했다.
 하루는 네가 내게 그랬다.
 나를 보러 모임에 나오는 사람이 있다고.



 네가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그 사람과 잘 해보라며 내 등을 살살 떠밀어도 나는 괜찮았다.
 그 사람은 내게 참 잘 해줬으니까.
 뭐든지 어설프고 어색한 내 표정을 보고 그는 짓궂게 놀리기 보다 어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일러주던 사람이니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따뜻한 친절보다, 날 놀리며 함께 깔깔 웃을 수 있는 네게 자꾸 눈이 갔다.
 그 사람의 따뜻한 손을 잡고도 크고 서늘한 네 손을 돌아봤다.
 그 사람의 다정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눈 웃음으로 이지러지던 네 눈을 돌아봤다.
 그 사람이 내게 사랑한다고 했던 날, 나는 마음 속으로 네게 사랑한다 고백했다.



 그 마음이 흡사 나와 같아 나는 그 사랑을 차마 거절 할 수 없었다.
 내가 못됐다. 내가 나빴었다.
 어느새 네 옆에는 나보다 더 예쁘고, 착하고, 다정한 그녀가 함께이더라.
 나를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친구라고 말 하는 그녀와 네가 함께이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았다.
 그렇게라도 널 볼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넷이 함께인 시간에 늘어가고, 우리가 공유하는 것들이 늘어감에 따라, 나는 네가 욕심 났다.
 사람이라는 것이 이리도 이기적일 수 있는지, 나는 그녀가 너에 대해 투덜거리는 것을 들으며 헤어지면 좋겠다고 못된 마음을 먹었더랬다.
 그래도 둘이 좋아서 사귀잖아. 컴컴한 속을 꾸역꾸역 감추며 그녀에게 말 할 때마다 그녀는 화사하게도 웃으며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대못이 박힘에도 나는 번번히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그것을 되물었다.



 어느날엔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인사불성이 된 나를 데려다주던 네게, 나는 술기운을 빙자해 마음에 담아뒀던 얘기를 털어놨다.
 좋아한다고. 좋아한다고. 너무 좋아서 이제 더 이상 곁에 못 있겠다고. 마음이 아프다고.
 묵묵하게 그 얘기를 듣던 너 역시 술에 취했었겠지.

 - 나 사실 누나 좋아했어요. 나는 누나가 그 형 좋아하는 줄 알고, 그 형도 누나 좋아한다길래...

 술이 깼다.
 온통 어지럽던 시야가 반듯해졌다.
 다른 의미로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네 손을 뿌리치고 어둑한 새벽길을 내달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온통 먹먹한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 와중에도 비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스스로가 지긋지긋 했다.
 새벽 빛이 참 시린 날이었던 것 같았다.



 거기서 끝났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 였을까.
 가슴은 아프지만 얼마나 아름답게 포장된 추억으로 남았을까.
 우리는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나는 그것이 지금까지도 사무치도록 후회가 된다.

 각자 연인과의 스케줄을 조정하며 우리 둘은 만나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공원을 거닐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갔다.
 손을 잡고, 팔장을 끼고, 어깨동무를 하고, 포옹을 했고, 입을 맞췄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죄책감은 늘 수반됐다.
 그것은 너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서로의 연인과 통화를 하고 오면 그 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카페에 앉아 멍한 시선을 각자 다른 곳에 던지며 하릴 없이 얼음이 녹아 맛도 없는 커피로 목을 축였다.
 각자의 연인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서로의 연인을 질투하는 우리는 잘 못 되도 한참 잘못돼 있었다.



 엉망으로 얽히고 섥힌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 했다.
 우리는 각자의 연인과 헤어졌고, 그리고 우리 역시 헤어졌다.
 지독히 삐걱이고, 지독히 고통스럽고, 지독히 죄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다 내려놓고 나니까 마음은 아플지언정 홀가분했다.
 매일매일 술에 절어 우는 나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내려두자 한결 가벼웠다.
 두 번 다시 누굴 아프게 하는 사랑을 하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내 스스로 나쁜 년이라고 욕 할 사랑을 하지 않으리라고 모질게도 나를 매질했다.
 나는 나쁜 년이었다.



 그랬던 우리가, 어쩌다가 다시 만나게 된 걸까.
 삼개월만에 다시 만난 너는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잠을 잘 자지 못 한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내게 빌었다.
 다시 만나자고 애원했다.
 삼개월간 나는 너를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라.
 우는 너를 안고 이유도 모를 눈물을 그렇게 쏟아냈다.
 떳떳하게 만나자. 남들 한테 숨기면서 만나지 말자.
 사탕발림같은 말에 넘어가 나는 네 그 손을 다시 잡았다.
 네 손은 여전히 서늘했다.



 한 번 깨진 유리잔은 다시 붙여도 사용하지 못 한다고 했다.
 한 번 헤어진 연인은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지기 마련이었다.
 어느날엔가 네가 조심스레 얘기했다.
 술을 먹고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고. 미련이 남았나 보더라고.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그래, 그 미련 다 그녀에게 주라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널 떠났다.
 한 번쯤 붙잡아 달라고 마음 속으로 그렇게 애원했건만 너는 등 돌려 떠나는 날 애써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더라.
 집에 오는 길이 그렇게나 멀었다.
 너와 만났던 벚꽃도 피지 않은 추운 봄부터, 낙엽도 다 떨어져 나뭇가지가 앙상한 늦가을까지의 추억이 그렇게도 아프게 가슴을 후벼냈다.
 아픈건 내 몫 뿐만 아니라 내가 아프게 한 사람들 몫까지 함께라고 하며 나는 그것마저 곱씹어 삼켰다.
 그러고 한참동안 앓았다.
 열이 끓듯이 올라 입술이 다 트도록 앓아 누워 있었다.
 그 열이 내리고 나서야, 나는 널 잊을 준비를 시작했다.
 추억을 켜켜이 정리하고, 기억을 마음 깊은 곳에 밀어 넣어 자물쇠를 걸었다.
 그 사람을 찾았고, 그녀를 찾았다.
 욕을 먹고 매질을 당할 생각으로 빌었건만, 그들은 이미 지난 일이라며 괜찮다고 나를 용서했다.
 나따위를 용서해줬더랬다. 그리 좋은 사람들 마음에 나는 상처를 내고 소금을 뿌렸더랬다.
 내가 나를 용서 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마음을 앓고 사랑을 앓으며 겨울을 났더랬다.
 그 해 겨울이 그토록 추웠던 것이 그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어느새 거리에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날리니, 너와 처음 만났던 그 날이 생각났다.
 해사하게 웃던 그 웃음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던 큼직한 손이, 짓궂게 나를 놀리던 웃음 소리가.
 내 욕심이 아니었다면, 네 욕심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넷이 벚꽃 아래에서 기념 사진을 찍으며 처음 만났던 봄을 추억하고 있었을까?
 이제는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애틋한 기억을 나는 다시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자물쇠를 걸어두려 한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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