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대해 배우면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 중의 하나가 사람의 인식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언어를 만들었지만, 사회 생활을 통해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언어 또한 사람이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지요 (Piaget, 1959; Vygotsky, 1962). 이는 다시 말해 똑같은 언어라도 어떻게 배우고 접하느냐에 따라 대상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버섯 수프를 통해 '버섯'이라는 단어를 배웠다면 그 사람의 세계에서 버섯은 긍정적인 사물로 작용하지만, 독버섯의 위험성이나 곰팡이 사촌으로서의 버섯을 먼저 접했다면 버섯이 부정적인 요인으로 자리잡게 되는 거지요.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바로 델리카트슨, 줄여서 델리가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델리카트슨은 독일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인데, 그 역사는 17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럽 밖의 여러 나라에서 진귀한 먹거리들을 수입해서 파는 가게들을 지칭하는 말로, 그 어원은 '기쁨을 주는, 훌륭한 (음식)'이라는 의미의 독일어인 Delikatesse에서 비롯되었지요. 언어학상으로 족보를 따져보면 Delicious와 사촌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으로 독일 이민자들이 넘어오면서 델리카트슨을 줄여서 '델리'라고 부르며 신선한 고기나 치즈, 빵 등을 이용해서 만든 음식을 파는 가게를 의미하게 되었지요. 어찌 보면 정육점과 편의점을 섞어놓은 듯한 가게로, 손님이 주문하면 커다란 덩어리의 햄이나 치즈를 그 자리에서 슬라이서로 잘라 샌드위치를 만들어 파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이 단어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델리카트슨 사람들 (Delicatessen, 1991)'이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는 겁니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The city of lost children, 1995)'를 보고 나서 그 암울하고 컬트적인 세계가 마음에 들어서 마르크 카로와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다른 영화를 찾아보다가 델리카트슨을 보게 되었는데, 시작부터 사람 잡아먹는 장면이 나오며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더군요. 어쩌면 돼지 모양의 가게 간판이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는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눈치를 채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상 자체가 잔인하거나 무섭지는 않은데,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그 묘한 느낌의 컬트적 분위기가 어우러지면서 델리카트슨=망해가는 세상에서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틀어박힌 거지요. 그래서인지 미국 와서도 한참 동안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먹음직스러운 각종 고기와 치즈 등을 바라보면서도 '델리'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붙은 가게 문을 선뜻 열고 들어가지를 못하겠더라구요. 델리의 하위 호환 버전인 서브웨이 샌드위치만 주구장창 먹었더랬지요.
그러다가 델리카트슨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고 '맛있는 음식'과의 연관성을 덮어씌우는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얼마 전부터 시작한 대량 생산 실습(High Volume Production)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CIA 부설 카페테리아 중의 하나로, 학생들 뿐 아니라 외부 방문객 역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하루 판매량이 900인분을 돌파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델리 코너에서 첫 시작을 하면서 하루만에 지금까지 평생동안 만들었던 것보다 더 많은 샌드위치를 만들게 됩니다.
고기와 치즈, 각종 소스를 준비하고 두 세 종류의 '오늘의 샌드위치' 메뉴를 준비하는 것 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은데, 손님 중 절반 이상은 커스텀 샌드위치를 주문하기 때문에 눈 돌아갈 정도로 바쁘더군요.
마치 요리 게임에서 여러 주문이 밀려들어오면 정신없이 여러 재료를 조합해서 시간 내에 요리를 완성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우선 빵부터 선택합니다. 하얀 식빵, 통밀빵, 사워도우빵, 잡곡빵, 또띠아 랩이 기본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때에 따라서는 포카치아나 카이저롤 등이 추가로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
소스 역시 마요네즈, 허니 머스타드, 디종 머스타드는 기본이고 여기에 더해서 스파이시 마요, 허브 마요, 홀그레인, 바질페스토, 과콰몰리, 볼로네즈 등 다양한 스프레드가 매일 바뀌어 가며 제공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사워도우나 통밀빵을 선호합니다. 길이가 길쭉해서 재료를 이것저것 마음껏 올릴 수 있거든요. 여기에 한쪽 면에는 허니 머스타드를, 다른 한 쪽에는 마요네즈를 듬뿍 발라줍니다. 소스는 맛을 더하는 역할도 하지만 재료의 수분으로 인해 빵이 눅눅해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방수 효과도 있습니다.
오늘의 고기는 로스트 비프, 칠면조, 슬라이스 햄의 세 종류입니다. 고기는 겨자 소스와 잘 어울리니 허니 머스타드를 바른 빵 위에 얹어줍니다.
고기를 샌드위치에 올릴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얇게 썰린 채 차곡차곡 쌓여있는 고기를 그대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구불구불하게 접어가며 겹쳐 올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보기에 볼륨감이 있어서 먹음직스럽거든요.
다른 한 쪽에는 치즈를 종류별로 올립니다. 프로볼로네, 스위스, 체다, 페퍼잭 치즈를 차곡차곡 쌓아줍니다. 원래는 샌드위치 하나 당 치즈 두 장이 기본 레시피지만, 만드는 사람의 직권을 남용해서 재료를 왕창 올려버립니다.
샌드위치 전용 오븐 토스터에 1분간 넣었다 빼면 치즈는 녹아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차갑던 고기는 지글거리며 맛있는 냄새를 풍깁니다.
여기에 양파와 바나나 페퍼 피클을 살짝 뿌려서 매운 맛을 주는 동시에 고기의 뜨거운 열기로부터 다른 채소들을 보호하는 완충 효과를 줍니다. 그 위에 최대한 신선하게 먹는 것이 좋은 양상추와 토마토를 올리고, 다시 그 위에 피클을 올리면 토핑이 끝났습니다.
이대로 겹쳐서 그냥 먹어도 되지만, 한 단계만 더 거치면 맛을 훨씬 더 좋게 만들 수 있지요.
샌드위치의 컬쳐쇼크, 파니니 프레스입니다. 예전부터 영화 등에서 파니니 프레스로 샌드위치를 눌러서 굽는 것은 많이 봤지만 실제 그 효과가 어떤지는 전혀 상상도 못했더랬지요.
단순히 빵의 겉면을 굽고 약간 울퉁불퉁한 표면을 만드는 게 전부 아닌가 싶은데, 그 사소한 노력이 큰 차이를 만듭니다.
일단 빵에 그릴마크를 새겨넣으며 시각적으로 더 맛있게 보이게 할 뿐 아니라, 그 울퉁불퉁한 표면이 독특한 식감을 가져다주고,
무엇보다도 그냥 오븐 토스트만 했을 때에는 열기와 습기로 인해 금방 눅눅해지는 빵이 프레스로 한 번 눌러주면 꽤나 오랫동안 바삭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요철 부분을 통해 김이 빠져나가기 때문일까요.
다만 프레스만 사용하면 안쪽의 고기나 치즈를 완전히 뜨겁게 익히는 것은 힘듭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눌러두면 빵이 타버리거든요.
일단 오븐 토스트로 치즈와 고기를 조리하고, 채소를 끼운 다음 프레스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커스텀 주문서에 '토스트와 프레스 둘 다 이용해서 익힐 것'이라는 주문이 들어와서 처음으로 알게 된 팁이지요.
다만 양파나 피클 등의 완충재 없이 프레스로 눌러버리면 양상추나 토마토까지 흐물흐물하게 익어버리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맨 마지막에 채소를 넣자니 일단 프레스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샌드위치는 고기와 치즈가 찰떡같이 달라붙어 버리는 바람에 분리가 불가능하더라구요.
넣을 수 있는 재료는 거의 다 때려넣어 만든 올인원 샌드위치 완성입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다른 맛이 느껴지기 때문에 이 샌드위치 하나만 먹으면 서너 개 먹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손님들이 주문할 수 있는 메뉴는 아니고, 요리사 특권을 남용해서 사심 듬뿍 넣어 만든 특제 샌드위치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다양한 맛을 느끼기에는 좋은데, 재료 배합이 최고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도 있습니다.
맛있는 샌드위치는 단순히 재료를 이것저것 많이 섞어 넣는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료들 사이의 상호 보완을 통해 맛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시킬 때만 완성되거든요.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주문하는 다양한 샌드위치를 보면 사람마다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보입니다.
마요네즈 옆의 네모칸에 체크를 하고도 부족해서 "Extra Extra!"를 써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료 옆에 번호를 매겨가며 샌드위치 쌓는 순서까지 따로 명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BLT에서 토마토와 양상추 빼고, 베이컨은 추가하는 BBB나, 빵 없이 고기와 치즈만 구워달라는 황당한 주문도 있었지만요. (빵이 없으면 치즈가 그릴에 들러붙기 때문에 만들 수 없다고 거절했지요)
하지만 어떤 주문서를 봐도 뭔가 한 두가지는 부족한 부분이 보입니다. 고기와 소스의 조화, 채소와 뜨거운 재료의 거리, 치즈와 빵과 고기의 궁합 등을 모두 만족시키는 조합을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고심 끝에 수 백 개의 샌드위치 주문표를 보면서 경이로운 방법으로 최고의 샌드위치를 만드는 조합법을 증명해 냈으나, 여백이 충분하지 않아 여기에 옮기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