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때 엄마와 절연했습니다.
MELODY
|2019.09.14 23:22
조회 2,186 |추천 10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모녀지간일 수가 없다.
전생의 지독한 원수나 악연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서로를 끔찍하게 여길 수가 없다.
54년 생으로 38살에 늦은 결혼과 출산을 한 엄마는
동갑내기의 무능력하고 허세덩어리의,가진건 반반한 얼굴밖에 없는 아빠랑 결혼해 갖은 고생을 다 했다고 한다.
만삭의 몸으로 포장마차를 하며 단속반한테 빌어가며,
또는 아양을 떨어가며 그렇게 생계를 꾸려보려 노력했다고.
.
가장의 책임감이란 쥐뿔도 없고, 그 나이 먹도록
자리를 못잡아 조폭똘마니 역할에 성인오락실을 관리 한답시고 어깨를 으스스대며 가정보다는 친구, 의리에 목숨걸던
그 남자랑 결혼해 인생을 망쳤다며 바로 어제까지도 눈에 핏발을 세우며 그 남자를 향해 온갖 거친 욕을 퍼부었다.
나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때 이혼을 한 엄마는 나를 끌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나마 아빠보다는 책임감과 생활력이 조금 더 있었나보다.
연고 하나 없는 외딴 섬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왜 하필 이곳인지 의문은 많았지만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전학을 온 학교에 부모님 직업을 적는 칸에는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적어내라 했다.
우리집에는 컴퓨터가 없었고 엄마는 핸드폰 하나
잘 다루지 못하는 기계치였다. 나는 그냥 그렇게 적었다.
엄마는 점점
저녁늦게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술과 담배냄새가 많이 났으며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원래 짜증이 많고 감정적인 성격이었지만
더 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첫 생리가 터진 날
엄마는 나에게 짜증을 내며 쌍욕을 했고
매우 불편해 보였다.
첫 맹장이 터진날
엄마는 2주동안의 의문의 출장이 끝나지 않아
병원에 오지 않았다.
내 모든 처음의 순간에 엄마는 없었다.
초중고, 입학식, 졸업식.
그리고 나름 중요했던 피아노 콩쿨,
굵직굵직한 시험.
엄마는 기억하지도 못했고 당연히 오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 엄마의 남자친구들이 늘어났다.
그리 오래가진 않아서 나도 딱히 살갑게 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한 아저씨와는 엄마도 나름 진지했었나보다.
그 아저씨와 함께 다른 지방으로 가서 살림을 차려
같이 살고싶다 했다.
나는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니
키워줄 만큼 키워줬고 작은 방 하나 얻어줄테니
혼자 잘 살라고 했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그렇지만 그 대단한 사랑도 결국 오래가지 못했고
그 후로도 무수히 많은 아저씨들에게 나는
인사를 하고, 애교를 부리고
용돈을 타내라며 강요받았다.
엄마는 신경질적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하든
그게 자기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나는 온갖 상스러운 말과 함께 구타를 피할 수 없었다.
그 기준은 일관되지 않았고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종잡을 수 없었다.
매일매일이 지옥같은 하루 속에서 6년을 보냈다.
고등학교는 어떻게든 엄마를 벗어나고 싶어
하루에 13시간씩 피아노를 쳐 부산에 있는 학교로 진학했다.
당연히 학비문제는 떼를 쓰고 발을 굴러가며
3년만 도와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갚겠다고
설득했다. 지금 와선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엄마는 허락했고 나는 너무 기뻤다.
그리고 그 학교를 1년밖에 다니지 못했다.
내 욕심이었다고 생각해 슬프거나 낙담하진 않았다.
애초에 엄마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았다.
무엇이든 끝까지 지원을 해준 적이 없었고
결국 학원비나 레슨비를 밀려 선생님들이 내게 눈치를 줘
내가 그만두면, 엄마는 나를 끈기없고 뭐하나 진득하게 못하는 년으로 만들어 저런 년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다.
18살, 더이상 엄마를 참을 수 없어
수중에 25만원을 들고 서울에 올라왔다.
19만원짜리 이대앞 고시원을 구하고
바로 그 날 알바사이트를 통해 알바를 구해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참 더럽고 독하게도 살았다. 어린 여자애 하나가
바둥거리며 살기에 세상은 절대,
결코, 따뜻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곳임을.
사람은 목적없이 착하지 않다.
그리고 그 목적은 대부분 내게 좋지 못한 일들이었다.
.
그래도 11년째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형편은 어려워도 내가 하고 싶은 일,
음악을 하며 돈을 벌고 있고 유명하진 않아도
하루하루 노력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추석당일인 어제.
2년만에 엄마를 만났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가여워하며
나를 한심하고 멍청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점점 나이가 들고 옆에 남자가 없으니
다정한 모녀사이가 부러웠는지
다른 집 애교많은 딸들과 비교하며 살갑지 못한 나를
끊임없이 비난하고 비교하다가 선을 넘었다.
엄마의 고향에 같이 내려가자는 제안을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곳은 5~7살 무렵 사촌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끔찍한 기억밖에 없는 곳이다.
그때 당시에도 나는 엄마와 어른들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엄마는 따지고 드나 싶더니 그 일을 조용히 묻어버렸다.
그 후로도 나는 명절이면 그곳에 끌려가 험한 꼴을 봤고
더 이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을 다시 가자 말하니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 사촌들을 보기 싫다고 조용히 말했다.
엄마는 눈을 흘기며 그래도 그 오빠들은
아파트도 사고 결혼도 해서 가정 잘꾸려
나보다 번듯하게 잘 산다고. 너는 계획이 있긴 하냐며
또 나를 비난했다.
그건 더이상 내가 참을 수 있는 선이 아니었다.
나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아이도 낳지 않을 계획이다.
그건 어릴때 당한 성추행과, 이후 여러번 겪은 성폭행, 추행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
오롯이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은 내 의지다.
혹시나 내가 낳은 딸에게 엄마처럼 대하면 어쩌지 싶은
두려움이다.
.
아마도 엄마는 엄마가 내 인생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죽을때까지 모를 것이다.
한때는 이 사실이 너무 억울하고 가슴 아팠지만
지금은 더이상 엄마가 내게 어떤 상처
주는 말과 행동도 할 수 없게 하려면
그냥 안보는 방법 말고는 없다고 느껴진다.
가능하다면 평생
안보고 살고 싶다.
누가 먼저 죽더라도 소식조차 몰랐으면 한다.
이건 분명 평범한 모녀사이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