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년에는 수국(隨國)의 황실에 패륜적(悖倫的)인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아들인 양광에 의해 살해되고 폐태자(廢太子) 양용 역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문제에게는 다섯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첫번째 아들은 방릉왕(房陵王) 양용(楊勇), 두번째 아들은 진왕(晉王) 양광(楊廣), 세번째 아들은 진왕(秦王) 양준(楊俊), 네번째 아들은 촉왕(蜀王) 양수(楊秀), 다섯번째 아들은 한왕(漢王) 양량(楊諒)이었고 그 외에 네 명의 딸이 더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귀족들로부터 선망과 지지를 얻고 있었던 인물은 바로 양광이었다. 양광은 진국(陳國) 정벌전(征伐戰)을 총지휘했고, 북방 돌궐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매번 큰 공을 세우면서 많은 인재들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맏형 양용이 차지한 태자의 자리를 엿보았다. 양용이 여색을 밝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아 점차 문제의 환심을 잃게 되자 양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해 힘을 과시했다.
문제가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양광은 거짓수작을 꾸며대면서 문제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문제가 진왕부로 올 때마다 그는 호화롭게 몸단장한 애첩을 숨겨놓고 무명옷을 입은 늙은 여인들만 자신의 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고 일부러 비파(琵琶) 줄을 끊어놓은 다음 비파에 묻은 먼지도 털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곤 했다. 문제는 그런 광경을 보고 양광이 여색을 즐기지 않으며 청렴한 성품을 지녔다고 칭찬하고는 흡족해했다.
황태자 양용은 어머니인 문헌황후(文獻皇后) 독고씨(獨孤氏)가 짝지어 준 태자비(太子妃) 원씨(元氏)를 사랑하지 않아 그녀와 마주앉아 식사하는 것도 꺼리고 단 한마디도 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만난 운소훈(韻蘇薰)이라는 기녀(妓女)를 사랑하여 밤마다 그녀를 자신의 침소로 불러 애정행각을 벌였으며 태자비와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태자비는 궁궐에 들어온 지 두 달만에 병사(病死)했는데 문헌황후는 양용이 태자비를 독살한 것이라고 여기며 태자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양광은 어머니가 맏형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문헌황후에게 더욱 곰살궂게 굴었다. 황제나 황후가 보내오는 사람이면 그 직위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연회를 베풀고 처와 같이 동석하곤 했다. 그는 또 권세가 있는 대신들에게도 선심 베풀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신들과 황실의 사람들은 저마다 진왕이야말로 인의 도덕이 있다고들 말했다. 이에 문헌황후는 양광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한번은 양광이 장안을 떠나 양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문헌황후와 작별할 때 그는 능청스럽게도 이별하기 아쉬운 듯 눈물을 흘리면서 태자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 이제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이에 황후는 몹시 격분했다.
“내가 살아 있는데도 그런 수작을 하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문헌황후는 양광에게 자기의 부름 없이는 함부로 장안으로 올라오지 말고 동궁으로 아예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양광은 문헌황후의 마음을 알고 은근히 기뻐했다.
양광이 양주로 돌아오자 우문술(宇文述)이 그에게 한가지 계책을 말했다.
“태자를 폐하는 것은 아주 큰일이니 마땅히 신중해야 합니다. 지금 임금님과 대신들이 모두 다 양소(楊素)를 몹시 신임하고 있으므로 양소의 지지를 받는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소는 그의 아우인 양약(楊若)을 더없이 사랑하므로 저와 양약은 잘 알고 있는 사이니 제가 장안으로 가서 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양광은 몹시 기뻐하며 우문술에게 금은보화를 주고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우문술은 장안에 당도하자마자 양약을 초청해 주연을 베풀었다. 양약이 골동품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미리 여러 가지 보물들을 객실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었다. 양약은 골동품들에 호기심이 끌려 이것저것 만져보면서 연신 감탄을 늘어놓았다. 술상을 물린 뒤 우문술은 보물을 걸고 바둑을 두며 일부러 몇 번 져주었다. 보물을 절반 이상 따게 된 양약은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때 우문술이 입을 열었다.
“이 진주보물은 진왕께서 양공(楊公)에게 보내는 선물입니다.”
양약은 의아하게 여기며 물었다.
“무슨 뜻인지요?”
우문술은 웃으며 말했다.
“이만한 선물이 뭘 그리 대단하다고 그럽니까? 진왕께서는 양공과 월국공(越國公:楊素)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게 할 생각을 하고 계시는데요.”
이 말에 양약은 더욱 놀라며 물었다.
“내가 지금 부귀영화를 누린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의 형 양소는 부러울 게 없이 잘 살고 있소. 그런데 진왕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단 말이오?”
우문술이 대답했다.
“두 분 형제가 지금은 비록 부러울 것 없이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월국공은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어 숱한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태자께서 하는 일을 늘 반대하셨으니 태자께서는 월국공을 좋아하지 않지요. 만약 지금의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신 다음에 태자께서 즉위하면 월국공을 그대로 보고 있겠습니까?”
우문술의 말을 듣고 양약은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슨 좋은 수가 없겠소?”
우문술이 양약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지금 황제 페하 내외께서는 태자를 폐하고 진왕을 신태자(新太子)로 세우려 하시지만 고경(高熲)과 하약필(賀若弼)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쉽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십니다. 양공이 적절한 때에 거들어주시면 큰 공을 세우는 겁니다. 진왕께서 부귀영화를 약속하고 계신다니까요.”
양약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양약은 양소를 만나 우문술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며 이해득실을 따져주었다. 양소도 쉽게 동의했다.
며칠이 지난 뒤 양소가 문헌황후에게 아뢰었다.
“진왕께서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합니다. 평소에 검박하게 지내는 모습도 폐하를 우러러 뵙는 듯합니다.”
황후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옳은 말이지. 진왕은 효성이 지극하나 나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가슴이 아프다네.”
양소는 붙은 불에 부채질 하듯 태자를 헐뜯었다. 황후는 양소의 말이 자신의 마음과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하면서 태자 양용을 폐하고 양광을 태자로 세우도록 조정의 신료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 일을 당부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양용은 몹시 두려움을 느꼈다. 이때 문제가 양소를 태자궁에 보내 치국(治國)에 대해 강의하게 했다. 양소는 태자의 마음을 건드리고자 동궁에 이른 뒤에 일부러 지체하면서 궁전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양소가 들어오지 않자 양용은 노발대발했다.
양소는 돌아가 문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자께서는 폐하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당도하자마자 화를 냈는데 아무래도 뜻밖의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는 여러모로 방비를 강화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문제는 양소의 말을 곧이듣고 사람을 풀어 양용을 감시하도록 했다.
양광은 태자의 측근인 희위(希慰)를 매수했다. 희위는 태자를 고발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태자께서는 늘 점쟁이들을 찾아 점을 치곤 하는데, 점괘에 나오기를 개황(開皇) 18년에 황제께서 눈을 감게 되니 때가 오래지 않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글을 보자 문제(文帝)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양용이 이렇게도 지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문제는 드디어 양용을 체포하라는 어명을 내리고 나서 양소에게 책임지고 심문하게 했다.
600년에 문제는 양용을 폐위시켜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난 다음 양광을 태자로 책봉했다.
양광이 태자의 자리를 차지한 지 4년이 지나 문제가 중병으로 눕게 되었다. 때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양광은 문제가 죽은 후에 뒷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내용의 친필편지를 양소에게 보냈다. 그런데 양소의 회답편지가 그만 문제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문제는 편지를 본 다음 크게 노하여 양광을 불러 문책하려 했다.
그런데 문제의 애첩인 선화부인(宣華夫人) 진씨(陳氏)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당황한 기색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면서 문제의 침소 앞에서 엎드려 울면서 태자 양광이 자기를 성추행했다고 하소연했다. 문제는 침상을 탕탕 내리치며 분노를 터뜨렸다.
“이 짐승 같은 녀석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는 중책을 떠맡는다는 말이냐? 아, 황후가 대사를 그르쳤구나!”
문제는 곁에 서 있는 유술(劉述)과 원암(元巖)에게 폐태자 양용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양광과 양소는 급히 가짜 조서(詔書)를 작성하여 병사들을 거느리고 인수궁(仁秀宮)을 포위했다. 황제의 명을 받고 떠나려던 유술과 원암은 밧줄에 꽁꽁 묶여 감금되었다. 인수궁을 지키던 황제의 근위병들은 무장해제되고 동궁의 보위병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한참 뒤 문제의 침소에서 나온 사람은 양광의 측근인 장형(藏炯)이었다. 그는 한 곳에 몰려 꿈쩍거리지도 못하는 환관들에게 소리쳤다.
“폐하께서 운명하신 지 오래인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때까지 품신(稟申)하지 않았느냐?”
궁전 안팎 사람들은 아연실색했지만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문제는 이렇게 둘째 아들인 양광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이어 양광은 자결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담긴 칙서(勅書)를 꾸며 양용에게 보냈다. 양용이 대답하기도 전에 칙서를 가지고 간 우문지급(宇文智及)이 양용을 끌어내려 교살(絞殺)하였다.
그 해 7월에 양광이 드디어 수국(隨國)의 두번째 황제로 등극하였으니 그가 ‘제2의 시황제(始皇帝)’로 일컬어지는 양제(煬帝)였다.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와 형마저 서슴없이 죽인 양제였으니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잔혹했던지는 말하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 양제의 대운하 건설
수황(隨皇) 양제(煬帝) 양광(楊廣)은 수나라의 임금 자리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독선적인 성격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타냈다. 그는 자신이 황제로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졌다고 여겼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양제는 605년에 1백만명이 넘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동도(東都) 낙양(洛陽)을 세롭게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토목공사는 규모가 아주 방대했다. 매달 백성들에게 강남에서 희귀한 돌과 재료를 날라오게 했다. 목재는 강서로부터 운반해왔는데 나무기둥 한 대를 끄는 데만 해도 2천명의 인부가 있어야 했다. 나무기둥 전부를 낙양까지 가져오려면 수십만 명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부가 지쳐 쓰러지고 사고로 죽기까지 하였다. 농번기(農繁期)에도 부역(賦役)에 동원하고 각종 세금을 부과하여 고혈을 쥐어짜자 여기저기에서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다. 그러나 양제는 백성들의 숱한 희생에도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는 낙양 서쪽에 서원(西圓)이라고 하는 큰 화원을 수축하게 했다. 서원은 그 둘레가 자그마치 2백리였고, 그 안에 인공호수를 만들고 그 호수 한가운데에 높이가 백여자 되는 섬을 세 개나 만들었다. 섬에는 절묘한 형상을 한 정자와 누각을 세웠다.
호수 북쪽에는 굽이굽이 흘러 호수로 들어오는 용진거(龍進渠)라는 물도랑이 있었고, 그 용진거를 따라 별장이 열여섯 채나 지어졌다. 모두 황제의 첩들이 관리하는 이 별장은 저마다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서원은 짙은 봄기운이 자욱하도록 장식해놓았다. 가을에 궁전의 나뭇잎이 떨어지면 고운 비단으로 꽃잎을 만들어 나뭇가지에 달아놓았고, 겨울에 양제가 이곳에 오면 못의 얼음을 깎아내고 비단으로 연꽃과 연꽃잎을 만들어 물 위에 띄웠다. 또 원내에는 여러가지 기이한 조류와 짐승들을 길러서 황제가 그것들을 구경도 하고 사냥도 할 수 있게 했다. 밤이면 양제는 늘 수천 명의 궁녀들을 서원으로 데리고 가서 풍악을 울리고 술을 마시면서 달구경을 했다.
양광은 이에 그치지 않고 대운하(大運河) 계획을 발표했다. 남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남북간의 물자교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진행하는 공사라고 밝혔지만 동도의 역사(役事)로 인해 부역과 조세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있어 대운하 건설은 재난이나 마찬가지였다.
맨 처음 통제거(通齊渠)가 개통되었다. 통제거는 낙양 서원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회하의 산양(山陽)에 이르러 낙수·황하·회하와 합수된 다음 춘추시대 오국(吳國)에서 개통한 한구(限勾)와 만나 장강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구간의 공사는 그 해 가을에 완공되었다. 운하의 수면 너비는 40보(步)였고 운하 양안에 대통로까지 만들었다. 대통로 양쪽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낙양에서 강도(江都)까지의 2천여 리 길에 이 나무들이 무성했다. 운하의 언덕에는 두 개의 역사(歷舍)를 지날 때마다 황제가 휴식할 수 있도록 재궁(齋宮)을 한 채씩 지었는데 낙양과 강도 사이에 무려 40여 곳이나 세워졌다.
이어 또 남쪽과 북쪽 두 방향으로도 대운하를 뻗게 했다. 북쪽으로 뻗은 운하는 영제거(永齊渠)라고 했다. 심수(沁水)를 황하(黃河)로 끌어들인 영제거는 탁군(涿郡)까지 닿았다. 장강 남쪽에 뺀 운하는 강남하(江南河)라고 했다. 경구(京口)로부터 시작한 강남하는 장강의 물을 전당강변의 여항(余杭)까지 들어가게 했다. 그 길이가 4·5천리에 이르며 해하, 황하, 장강, 전당강을 이어놓은 이 대운하는 6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전부 완성되었다.
남북 지역의 물류유통과 교통을 편리하게 해준 대운하는 남북의 경제, 문화교류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운하의 양안에는 번화한 도시들이 많이 들어섰다.
이 거대한 공사에는 무려 1억 5천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때 전국의 호수가 8백 90만호였으니 호당 평균 20명의 노동력이 동원된 셈이 된다. 통제거를 구축하는 데만 해도 1백여만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는데 그 중에서 3분의 2가 공사장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양제는 운하가 완성되기도 전에 이미 배를 만들게 했다. 그는 605년 가을에 그 배로 숱한 수행인원을 데리고 강도(江都)에 가서 유람했다. 양제가 타는 배를 용주(龍舟)라고 했다. 길이가 2백자나 되며 4층으로 된 이 배에는 제일 위층에 정전(正殿)과 내전(內殿) 그리고 동서 조당(朝堂)이 있었고 중간의 두 층에는 환관이나 내시들이 드는 방이 있었다. 배를 끄는 사람을 전각(殿脚)이라고 했는데 용주를 움직이는 전각이 1천여명에 달했다. 그 뒤로 비빈과 대신들, 승려, 도사들을 태운 수천 척의 화려한 배들이 뒤를 따랐는데, 그 행렬의 길이가 2백여 리에 달하고, 운하 양안에는 기병대가 배를 호위하며 줄지어 따랐다. 호위병들이 펄럭이는 깃발은 또 다른 수로를 만들었고, 색색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양제는 낮에는 배 위에서 마음껏 노닐며 주위의 경관을 감상하고 밤이 되면 불을 대낮처럼 밝히고 연회를 베풀어 즐겼다. 흥을 돋우기 위한 북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져 나가면 주변 오백여리 안에 사는 백성들은 그 지방의 진귀한 음식을 가져다 바쳐야 했다. 백성들은 이로 인해 가산을 탕진했지만 음식은 양제의 일행이 배불리 먹고 난 뒤에도 남아서 떠날 때 구덩이를 파고 묻어야만 했다.
완성된 수로를 직접 눈으로 살피고 지방의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서 직접 대운하를 따라 순행(巡幸)에 나선 양제는 호화로운 유람을 즐기며 통제거를 지나 한구의 초입인 산양 부근에 이르렀다. 그런데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선도선(先導船)이 갑자기 멈추어 서자 이에 자연히 뒤를 따르던 배들도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용주가 멈추어 서자 한참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양제가 의아하여 물었다.
“벌써 도착했을 리는 없을 텐데, 어찌하여 배를 세우느냐?”
대작을 하고 있던 대신들 역시 연유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양제의 옆에 서 있던 시위장이 밖으로 나가 선도선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수로의 깊이가 계획보다 얕아서 선체가 큰 용주는 지날 수 없다 하옵니다.”
그러자 술기운으로 붉었던 양제의 얼굴이 노기로 인해 검붉은 빛으로 변했다.
“아니, 짐이 지시한 일을 어찌 이리도 소흘히 할 수 있단 말이냐? 이는 곧 짐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이러고도 저놈들이 정녕 살아남기를 바란단 말이냐?”
양제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일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지극히 엄격했다.
이때 양소(楊素)가 황급히 나섰다.
“이는 필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찌 감히 저들이 폐하를 능멸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간의 공사 책임을 맡고 있는 양산태수(陽山太守)는 그의 조카인 양각(楊覺)이었다. 양제의 포악하고 충동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양소로서는 양각의 신상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양제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지금 전국에서는 짐의 명에 의해 역사에 길이 남을 대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만일 저놈들처럼 짐의 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어찌 다른 지역에서 짐의 권위가 존중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이번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다면 짐의 의지가 천하에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으리라.”
명령을 받고 출동했던 금위병들에 의해 양산태수를 비롯한 수십명의 아전들이 끌려 왔다.
양제 앞에 무릎 꿇려진 양각의 얼굴은 핏기라곤 찾을 수 없을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네놈이 감히 짐의 명을 우습게 여기고도 살기를 바랐단 말이냐?”
양제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양각은 두려움으로 인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소신이 감히 손톱만큼이라고 폐하를 능멸할 마음을 먹었겠습니까? 이는 수로 설계상의 실수로 인해 발생한 일입니다. 소신이 감독의 책임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기술적인 문제는 전적으로 공부(工部)에서 파견된 기술 감독관의 일입니다.”
이 당시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대운하의 공사를 위해서 공부 소속의 관리들과 차출된 장인들이 각 지방에 파견되어 있었다. 금위병들에게 끌려온 무리들 속에는 이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도 섞여 있었다.
“저들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는 이번 역사에 참여했던 자들 모두의 잘못이다. 그중에서도 한 지방을 맡고 있는 관장으로서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네놈의 뻔뻔함은 정말 참기 어렵구나.”
양제는 도열해 있는 금위병들에게 명령했다.
“여봐라. 저놈을 비롯해서 이번 공사와 관계가 있는 자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산 채로 수장(水葬)시키도록 하라. 내 이번 일을 만천하에 본보기로 삼겠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대신들은 경악으로 인해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이를 말리지 못했다.
이리하여 양제의 명령에 따라 양산태수를 비롯해서 중앙에서 파견된 감독관과 장인들, 그리고 수로를 만드는 부역에 동원됐던 백성들까지 수만에 이르는 목숨이 수로 밑바닥에 수장되었다. 이에 양산 지역에서는 통곡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각지의 백성들은 양제의 흉폭함과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이 사건 이후로, 양제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고 있던 백성들조차 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하지만 이것은 백성들에게 있어 시련의 시작에 불과했다. 양제의 광기는 이미 고삐를 풀고 내달리는 야생마 그 자체였다. 양제는 민심의 동향과는 상관없이 고구려와의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었다.
● 돌궐 땅에서 양제와 논쟁을 벌인 을지문덕
『수서(隨書)』에는 수황(隨皇) 양제(煬帝) 양광(楊廣)이 돌궐(突厥) 땅을 순행(巡幸)하러 왔다가 계민가한(啓民可汗)을 만나러 왔던 고구려의 사신과 조우(遭遇)하여 “너희 나라로 돌아가거든 고구려의 국왕에게 이렇게 전해라. 당장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라고” 하고 위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사신은 마치 양제의 경고에 아무 반박도 못한 채 쫓기듯이 돌궐 땅을 떠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에서 이때에 양제와 우연히 만난 고구려의 사신이 다름 아닌 을지문덕이며『비망열기(備忘烈記)』를 인용해 을지문덕이 양제와 논쟁을 벌였다고 서술했다. 만약 단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을지문덕은 어떻게 돌궐 땅에서 양제와 만나게 되었던 것일까?
동돌궐(東突厥) 최고의 지도자인 계민가한(啓民可汗)은 실위(室韋)가 자신들을 배신하도록 조장했다는 이유로 607년에 좌현왕(左賢王) 처라(處羅)에게 3만 대군을 주어 고구려의 북변을 침공하도록 했다. 그러나 부여성주(扶餘城主) 겸 북부욕살(北部褥薩)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미 실위의 부족들로부터 돌궐에 대한 정보를 받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방어전(防禦戰)을 준비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자신이 고안해둔 검차(劒車)라는 병기(兵器)를 배치시킨 곳에 보병(步兵) 7천여명과 중장기병(重裝騎兵) 3천여명을 매복시킨 뒤 말객(末客) 효농(效濃)에게 이들의 인솔을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보병 3천여명과 기마궁수(騎馬弓手) 1천여명을 거느리고 적군에게 싸움을 걸어 침착하게 돌궐의 기병들을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돌궐군은 을지문덕의 군대에 기병의 수효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업신여기고 유인전(誘引戰)에 말려들어 추격해오다 검차를 앞세운 고구려군의 공세에 무려 1만명 남짓한 사상자가 나오는 큰 타격을 받아 섬멸되었다.
좌현왕의 군대가 너무도 쉽게 대패하자, 돌궐의 군주 계민가한은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구려와 싸우기보다는 우호 관계를 맺는 쪽을 택했다. 계민가한이 화평을 청해 오자,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을지문덕을 사신으로 보내 돌궐의 내정을 살피고 그들의 기를 꺾어놓게 했다. 태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을지문덕이 돌궐 칸의 장막에 당도하자, 계민가한이 몸소 나와 그를 맞이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 많았소. 내 장군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소.”
계민가한은 애써 고구려 사신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싸늘한 표정으로 힐난한다.
“돌궐의 군사들이 우리의 국경을 넘은 것은 명백한 도발 행위였소.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화평을 맺자는 것이오? 도대체 돌궐의 진심은 무엇이오?”
계민가한은 쩔쩔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일부 부족장들이 나의 뜻을 곡해해서 생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소. 그 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내가 이 자리에서 명백히 밝히겠는데, 우리는 결코 고구려와 싸울 뜻이 없소.”
계민가한이 이처럼 저자세로 나오자, 을지문덕도 낯을 펴고 어조를 부드럽게 했다.
“우리 고구려도 돌궐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돌궐이 다시는 우리의 땅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만 한다면 두 나라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 당장 약조하리다. 그러니 고구려로 돌아가거든 태왕 폐하께 말씀 좀 잘 해주시구려.”
을지문덕은 이 정도에서 계민가한의 마음을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다그치다가 자칫 계민가한이 모욕감을 느끼기라도 한다면 두 나라의 관계가 다시 적대시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었다. 수나라와의 전쟁이 언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돌궐을 끌어안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을지문덕은 적당히 계민가한의 기를 꺾어놓는 선에서 그와 타협을 보았다.
“좋습니다. 이번 협정이 앞으로 양국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돌궐과 고구려는 상호불가침을 포함한 우호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를 했다. 계민가한은 성대한 연회를 열어 고구려의 사신으로 온 을지문덕을 극진히 대접했다. 을지문덕은 돌궐의 내정을 살피는 임무를 띠고 있었기에 계민가한 및 그의 신하들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담소를 나누었다. 을지문덕이 계민가한의 장막을 찾은 지 나흘째 되는 날에 계민가한을 호위하는 무사인 판찰소탁(辦察昭拓)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들어 오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수국(隨國)의 황제(皇帝)가 당도했습니다.”
계민가한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란 말이냐?”
돌궐은 수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앙숙인 고구려 사신과 함께 있는 모습을 수황(隨皇)에게 들켜서 좋을 것이 없었다.
“대인께서는 아무래도 이곳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소. 수주(隨主)를 만나봐야 그대의 신상에 이로울 게 없지 않겠소?”
계민가한이 초조한 모습으로 말했지만 을지문덕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진작부터 수주 양광을 만나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저를 그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계민가한은 난처했지만 을지문덕의 뜻을 꺾을 수 없어 그대로 장막 안에서 기다리게 했다.
계민가한은 장막 밖으로 나가 양제(煬帝)를 데리고 들어왔다. 양제의 뒤로 수행한 대신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수국(隨國)에서 고위급 관직을 지내는 인물들이었다.
계민가한은 양제에게 손님에 대한 예를 취하여 상석을 권했다. 그 옆에 계민가한이 앉고 양국의 신하들이 좌우에 도열했다. 을지문덕은 돌궐의 대신들 틈에 섰다.
“짐은 돌궐의 군대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말을 듣고 위로도 할 겸 이렇게 찾아왔소.”
양제는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운을 떼었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국경에서 작은 분쟁이 있었을 뿐입니다.”
계민가한은 말하면서 을지문덕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았다. 을지문덕은 매서운 눈길로 양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나라 역시 고구려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았소. 동쪽에 고구려가 도사리고 있는 한 우리의 국경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서로 힘을 합쳐 고구려를 정벌해서 앞날의 근심을 더는 것이 어떻겠소?”
양제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만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돌궐을 먼저 칠 수 있다는 무언의 협박과 다름없었다. 계민가한은 두 마리 호랑이 사이에 놓인 사슴처럼 어느 쪽을 선택할지 몰라 안절부절하였다. 그때였다. 돌궐 대신들 사이에 서 있던 을지문덕이 앞으로 나서며 양제를 보고 소리쳤다.
“말로는 화평을 주장하면서 뒤에서 흉계를 꾸미고 있으니 어찌 이를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을지문덕에게 향했다. 계민가한은 눈이 휘둥그래지고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 금방 숨이 넘어갈 듯 했다. 그런데 양제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이 삼십대 초반의 당돌한 청년을 쳐다보았다.
이때 수국의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나서 을지문덕을 꾸짖었다.
“너는 누군데 건방지게 군주들의 대화에 끼어드느냐?”
을지문덕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고구려의 북부욕살인 을지문덕이라 하오.”
고구려의 관리란 말에 양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는 힐난의 눈길로 계민을 쳐다봤다. 계민가한은 무척이나 당황했는지 애써 눈길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양제는 다시 을지문덕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고구려의 사신이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태왕 폐하의 명을 받고 돌궐과 친선을 도모하고자 왔소.”
초원을 지배하는 돌궐의 지도자마저 수나라의 황제 앞에서 쩔쩔매는데, 이 고구려인은 당당한 기상을 드러내며 양제와 맞서고 있었다.
“사해 만국이 서로 화평을 도모하고 어려울 때 돕는 것은 아름다은 덕(德)이라 할 수 있다. 짐도 고구려와 돌궐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허나 고구려의 지난 행적으로 볼 때 어찌 이를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양제는 스스로 지혜가 넘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유려한 말솜씨로는 자신을 당할 자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고구려의 사신을 변설로서 굴복시켜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고구려의 지난 행적이라 함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양제는 목청을 가다듬고 포문을 열었다.
“고구려는 본시 비류수(沸流水)가의 작은 나라였는데, 담덕(談德)에 이르러 주변의 부족들을 무력으로 정벌하고 강제로 병합하면서 지금의 영토에 이른 것이 아닌가? 근래에 와서도 고구려는 형제나 다름없는 남방의 백제와 신라를 수시로 괴롭히고 하루도 손에서 창과 칼을 놓은 날이 없다고 하니 어찌 평화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번 돌궐과 화친을 도모하는 이유 역시 이들을 안심시킨 후에 불시에 치려는 의도일 것이다.”
을지문덕은 양제의 독설(毒舌)을 듣고 도리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대의 말은 하나도 맞는 게 없소. 우리 나라의 시조(始祖)이신 추모성왕(皺牟聖王)께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조선(朝鮮)을 계승하는 고구려를 세우시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힘쓰셨소. 그 후 고구려의 역대 태왕들께서는 추모성왕의 뜻에 따라 백성들을 덕으로써 다스리고, 주변국들을 인의(仁義)로써 대하셨소. 그러다 보니 자연 이에 감복한 주변국들이 복속을 청해왔고, 고구려는 이를 매정하게 내칠 수 없어 받아들였던 것이오. 그리고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께서는 한 번도 대의(大義)에 어긋한 거병(擧兵)을 한 적이 없으시오. 단지 우리의 국경을 지키거나 소국의 간곡한 구원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군사를 내었을 뿐이오. 그때 그분의 기상과 고구려의 앞선 문화에 매료된 그 지역의 군민들이 고구려의 보호를 자청했기에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오. 광개토태왕께서는 늘 사해(四海) 만민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셨던 분이오.”
을지문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양제의 안색을 살폈다. 양제는 눈에 띄게 여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는 일격을 가했다.
“근래에 와서 고구려는 주변국들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소. 최근 백제나 신라와 충돌했던 것도 그들의 도발을 참다못해 일어난 것이오. 그 가운데서도 수국의 탐욕은 도를 넘어서고 있소. 진국(陳國)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쥐새끼처럼 몰래 군사를 움직여 우리의 땅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소? 우리의 천군(天軍)이 격노하여 물리치기는 했지만 앞으로 또 다른 도발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소? 이렇게 볼 때 돌궐이 조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 고구려가 아니라 바로 당신네 수국일 것이오.”
양제는 을지문덕의 정연한 논박이 할 말이 없었다. 이는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인 격이었다.
“내가 장담하건대, 만일 수국이 또 다시 고구려의 땅을 넘본다면 그때는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오.”
양제는 돌궐의 지도자와 많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을지문덕에게 논파당한 것이 창피했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을지문덕의 배포와 재주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대와 같은 인재가 어찌 고구려와 같은 변방에서 썩고 있는가? 나와 함께 장안으로 간다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게 해주겠다.”
양제는 자신의 휘하에 을지문덕과 같이 담대한 인물만 있다면 온 천하를 제패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그를 회유했다.
이에 을지문덕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고구려는 신성한 나라요, 천하의 중심이오. 내가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서 돌보아주셨기 때문이오. 수국의 친왕(親王)이 되느니 차라리 고구려의 개가 되겠소.”
양제는 부귀영화(富貴榮華)로도 을지문덕을 유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을지문덕에 대한 두려움이 싹트고 있었다.
“수국으로 돌아가면 전쟁에 대한 야욕을 버리고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 매진하시오. 백성들이 없고는 나라도 있을 수 없소. 그 점을 명심하면 수국은 오래도록 흥성할 것이오. 허나 만에 하나라도 잘못 마음을 먹고 고구려로 쳐들어온다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당할 것이오. 내 충고를 가슴에 깊이 새기기를 바라오.”
을지문덕은 이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등을 돌리고 계민가한의 장막을 빠져 나갔다. 어느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양제는 사라지는 을지문덕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