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네 이름 생각하면 바로 얼굴이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데
같은 대학에 다니게 됐다고 좋아한 게 무색하게 우리 안 본 지 참 오래 됐다.
우리 고등학교 1학년 처음 만났을 때 기억 나?
나는 반마다 꼭 몇 명씩 있는, 수업시간마다 엎드려서 자는 예체능 하는 애였고, 너는 성적 평균은 별로 안 좋아도 수학만큼은 곧잘 하는 애였지. 나는 원래 새로운 친구 사귀는 걸 잘 못하기도 하고, 또 관심도 크게 없어서 반에서도 친한 친구 한두 명만 빼면 거의 대화도 잘 안 하는 애였는데 1학기 중간고사 끝난 직후였던가? 그때 딱 너랑 짝이 됐었잖아. 그러고 얼마 안 걸렸던 것 같아. 너 좋아하기까지.
너는 딱 그 또래 남자애들이 으레 그렇듯이 장난기 많고, 축구 좋아하고, 학교 끝나면 피씨방 가고 그런 애였는데 다른 애들이랑 다르게 사려 깊고 다정했었다. 어떤 배려가 항상 너한테서 묻어났었어. 나는 너한테서 자꾸 거리를 두고 그랬는데 네가 계속 먼저 다가와줬었어. 물론 너는 친구로서 그랬겠지만. 그때 너 덕분에 우리 되게 빨리 친해졌었지. 다른 애들 보다 더 가까워져서 거의 반에서 붙어다니는 사이가 됐었는데, 우리가 너무 친해서 그랬는지 그 나잇대 애들이 애들 괜히 엮고 스캔들 만드는 장난도 우리한테는 안 쳤었잖아. 나는 그게 괜히 아쉽기도 했다. 나는 예체능이라 공부는 안 하고 실기만 했었는데 너한테 멘토멘티 하자고, 수학 가르쳐달라고 설치고 그랬던 거 기억나? 너 되게 얼떨떨해 하면서 승낙 했었는데 그거 그냥 짝 바꾼 이후에 수학 시간에만이라도 너랑 앉아서 공부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어. 그래서 틈만 나면 모르는 문제 억지로라도 찾아서 너한테 가져가고 그랬어. 넌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열심히만 가르쳐줬지만.
나는 네 몸에 밴 배려가 되게 좋았어. 내가 네 자리로 가서 수학 문제를 물어보면 네 자리에 나를 앉히고 너는 서서 알려주던 거나, 수업 시간에 잡담하다가 복도로 쫓겨났을 때 치마 입은 다리가 춥겠다고 다 둘러지지도 않는 마이를 벗어주던 거, 내가 배 좋아한다는 건 절대 안 까먹어서 선생님이 반에 아이스크림이라도 쏘는 날에는 제일 먼저 나가서 탱크보이 골라 가져다 주던 거, 생리통 때문에 아파서 하루종일 엎드려 앓으면 왜 아픈지도 모르고 점심 시간에 월담해서 편의점 죽 사다 주던 거, 애들이랑 같이 같이 밥이라도 먹으러 가면 나 느리게 먹는 거 알아서 나한테 먼저 밀어주고 눈치 보지 말라고 남자애들한테 욕 먹어 가면서 나만큼 느리게 먹어주고ㅋㅋ 그런 것들이 계속 쌓이니까 자꾸 좋은 구석들만 보이더라. 원래 반 굴러가는 데에는 지지리도 관심 없었는데 너 나간다길래 축구 반대항전 보러 가고 너 주려고 전날부터 포카리 큰 거 사다가 냉동실에 얼려둬서 엄마한테 냉동실 자리 없다고 한 소리 듣기도 하고 그랬어. 학기말 되니까 학교에서 자꾸 영화를 보여주고, 너랑 나는 맨 뒤 책상에 좁게 붙어앉아서 같이 보고, 서로 취향도 알게 되고. 나는 그때 잘하면 너랑 사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 엄청 오만했었어.
그런 식으로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됐어. 2학년 때도 운명처럼 우린 같은 반이었지. 난 더이상 수학 문제를 빌미로 같이 있을 시간을 만들 필요가 없었어. 굳이 그러지 않아도 우린 자연스럽게 같이 있는 사이였으니. 내가 학교에서 내내 잠만 자도 넌 그냥 내 옆 자리에 계속 있어 줬어. 내가 체육 수행평가로 농구 하다가 넘어져서 복숭아뼈에 금이 갔을 땐 거짓말로 외출증 받아서 병원에도 같이 가줬지. 원래 내가 소심한 성격은 아닌데 그 관계가 좋아서 계속 고백을 미루다가 슬슬 고백할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였어. 너랑, 나랑 다른 친구들이랑 같이 대화를 하다가 네 다른 친구 중 한 명이 네가 고백 받은 얘길 꺼내더라. 당황스럽고 놀랐기도 했지만 섭섭한 생각이 먼저 들었어. 너한테 고백한 친구는 내가 보기에도 되게 하얗고, 귀여운 친구였는데 석식 시간에 불러내서 사귀자고 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네가 안 받아줬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왜 안 받아줬냐고 물어봤어. 네 대답은 그랬어. 사귈 여유가 없다고. 학생 때엔 연애를 하고 싶지 않고, 나중에 졸업하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하고 싶다고. 고백하려던 생각은 그때 접었다. 마음을 전하고 싶다면서 섣불리 고백했다가 좋은 친구 사이로 남지도 못하게 될까 봐.
순식간에 2학년이 지나고 어느새 3학년이 됐는데, 이번엔 다른 반이더라. 아예 다른 층이었어. 너도, 나도 서로에게를 제외하곤 연락이 잦은 편이 아니었는데 3학년이 되니까 서로에게도 뜸해지더라. 나는 학교도 조퇴하고 학원에 가서 실기를 준비하기 바빴고 너도 대입 준비에 바빴겠지. 1학기 내내 얼굴도 못 보고 연락도 잘 못 했지만 난 늘 네 생각을 했어. 그렇게 친했는데도 용기가 없어서 네 반을 찾아가지도 못했어. 그런데 1학기 끝날 쯤인가, 친구를 통해서 갑자기 친해진 친구가 너랑 같은 반이라는 거야. 그래서 너희 반에 갔어. 그 친구 보러 간단 건 핑계였고 사실 몇 달 만에 널 보러. 점심시간에 가서 친구 책상 근처에 앉아서 떠드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보니까 네가 있어. 그런데 다른 여자애랑 너무 재밌게 놀고 있어. 너는 날 보고 그냥 어, 하고 말았어. 나는 우습지만 그때 질투가 좀 났나 봐. 그 이후로는 너희 반에 안 갔어. 그렇게 연락도 못 하고 얼굴도 안 보는 상태로 계속 시간이 지나서 결국 수능까지 다 봤어.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중간에 돼서야 예체능을 포기하는 바람에 정시 준비를 하느라 정말 눈코뜰새 없이 바빴고, 넌 수시로 대학에 붙었단 소문이 돌더라. 난 생각보다 수능을 잘 봤어.
너를 다시 본 건 수능 끝난 뒤에, 한창 담임 선생님들도 애들을 안 잡던 때라, 등교해서 출석만 하고 가방 챙겨 나가려는데 늦게 등교하던 너랑 딱 마주쳤지. 그때 계단에서 아주 오랜만에 대화를 해서 너무 좋았는데 그날 저녁 오랜만에 너한테 연락이 온 거야.
계속 연락을 하다가 내가 대학에 붙었는데 너랑 같은 학교였어. 비록 단과대 건물이 달라서 잘 못 만날 듯 했지만 그래도 같은 학교라는 게 좋았어. 진짜로 1학년 때까진 공강 시간마다 만나서 놀았던 것 같아. 내가 학과 행사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시면 넌 어김없이 내가 배 좋아한다는 걸 기억해서였는지 갈배를 사다줬어. 그리고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전쯤, 너한테 여자친구가 생겼어. 너희 과 학생회 하는 언니라고 했는데 엄청 예뻤어. 나는 너한테 여자친구가 생긴 이상 사심을 가지고 네 근처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조금씩 멀어졌는데 넌 그게 되게 서운했나 봐. 종강 직전에 크게 싸웠다. 겨울방학 내내 바쁘게 알바를 하고 틈틈이 네 생각을 하다가 개강이 왔는데 네가 군휴학을 했다더라.
그리고 끝이었어. 우리 관계는. 네 여자친구 페이스북에서 널 봤어. 전역을 기다려 준 여자친구한테 어김없는 다정함으로 신발을 선물해줬는지 너랑 여자친구가 신발상자를 들고 되게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이번 학기에 복학을 했다고 들었어. 이제 다음주면 이번 학기가 끝나는데 너한테는 연락이 없었어. 나도 연락 안 했고.
나 오늘 고백 받았다? 동아리에서 만난 친군데 너만큼이나 나한테 잘해줘. 너만큼 내가 좋아하는 거 잘 기억해줘. 지금 당장 받아주지 않아도 계속 나 기다려 줄 수 있대. 나 이제 새로운 사람 좋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사랑 받으면서, 나는 사랑 줄 줄만 알던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짝사랑이 너무 길었다. 너 되게 오래 좋아했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교 3학년까지. 나는 이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 볼까 해. 금방은 안 되겠지만 천천히 널 놓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여 볼 거야. 그때쯤 되면 사심 없이 너한테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 하고 연락할 수 있겠지. 내 10대의 끝자락과 20대의 첫 장에서 네가 가장 예쁜 기억이었어. 그래서 너무 고마워.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연락할 수 있을 때까지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