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하기 위한 자격
ㅇㅇ
|2019.12.13 16:44
조회 407 |추천 0
연애하기 위한 자격이 필요한 걸까.
숱한 전남친들이 똥차인 걸 몸소 겪어보고 나서야,
더 이상 애인을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다 진저리 났거든.
너무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서로 가시 돋힌 말을 주고받는 것도,
너무 멀어진 거리 때문에 쓸쓸함으로 허덕이는 것도.
사랑 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독신이다 비혼이다 부르짖으며 자기 길 잘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 인생은 왜 이러는 건지.
지금 돌이켜 봐도 내 인생은 온통 사랑으로 얼룩진, 사랑밖에 없는 인생이어서.
사랑에 허덕이고, 사랑 속에서 행복하고, 사랑으로 눈물 짓는 여자.
새삼 내가 어리석은 사람 같았어.
그런데 또 멍청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이번엔 나보다 어린 애였어.
다정하고 유쾌한 장난을 건넬 줄 아는 사람,
내 주위의 자존감만 쓸데없이 높은 남자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낮추거나 애교스레 웃을 줄 아는 사람.
순식간에 빠져들었어.
자꾸 눈길이 가는 거 있잖아.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때 괜히 귀를 기울이게 되고,
내가 먼저 말을 걸고 싶어도 마땅히 말할 게 없어서 주위만 맴돌고,
정작 철벽만 치면서 지내다 보니까 좋아한다고 어필하는 방법도 다 까먹고
감정 숨기는 방법도 잘 모르겠더라. 내가 생각해봐도 내 모습이 비참했어.
나 진짜 고민 있어도 티 안내는 사람이거든.
나한테 상담하는 애들도 많고, 일부러 다른 애들 이야기 들어주느라
술자리에서 시간 허비하기도 해. 그래서 이걸 이야기할만한 애가 마땅히 떠오르질 않더라.
뭐 이걸 어디 토로할 곳도 없고 페이스북은 너무 공개적이고 인스타는 행복 나열 공간이고.
차일피일 속만 엄청 상해 가면서 걔를 바라보기만 했어.
내가 잘 하지도 않는 게임 이야기로 애처럼 활짝 웃는 거 보고
나도 그 게임을 해야 되나 고민하고,
장난 하나 걸어올 땐 그게 다른 사람들한테도 하는 말인 거 알면서 괜히 설레고.
일할 땐 걔만큼 또 열정적이고 꿋꿋한 애가 없어서 든든하고.
그런 애라서 다른 여자가 대시를 많이 하더라.
내가 봐도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애부터 시작해서
걔만 모르고 주위 사람들 다 아는 은근한 대시를 하는 애도 있었어.
그 때마다 지켜보면서 걔가 넘어가진 않을까 진짜 노심초사했거든.
그렇다고 내가 들이대기엔, 걔랑 나이 차이가 있어서 무슨 추태인가 싶고.
어리고 예쁜 애들은 나날이 늘어가는데 난 나날이 나이를 먹고 있으니까.
우연히 상담을 받았어.
내가 자주 보던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지나가듯이 본 광고였는데
난 그거라도 붙잡고 싶을 만큼 절실했거든.
속앓이는 죽어라 하는데 이 감정을 어떻게 토로하지도,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냥 걔를 보기만 해야 한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심하게 굴고 있는 내가 너무 답답해서,
에라 모르겠다 허심탄회하게 내 이야길 막 썼더니 그 쪽에서 연락이 오더라.
자상하게 내 이야길 들어주더라고.
낯선 사람한테 이야기하는 게 꺼림칙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계속 이야기하다 보니 속앓이가 터져서 그 날 한참을 울었다.
내가 그만큼 얘를 좋아했구나란 자각도 들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내 방어적인 면모도,
그걸 만들어 준 내 전남친들에 대한 원망도 다 비참하고 속상해서.
조언을 받아서 작게나마 용기를 냈어.
갑자기 뭘 바꾸거나 그러는 건 너무 어려우니까 못하고.
다른 사람 눈도 있는데 내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게 티가 나진 않을까 조마조마했어.
그래도 걔한테 말 걸고, 그 게임 혹시 가르쳐줄 수 있냐고 물어봤거든.
걔가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더라. 레벨은 몇인지, 언제쯤 접속하는지,
사소한 대화가 오가고 나서 괜히 설레가지고 일이 손에 안 잡혔어.
그쯤 되니까 걔한테 들이대던 여자가 나한테 슬쩍 물어보더라고.
걔 성격 좋지 않냐고. 몇몇이 마음에 두고 있는 거 같던데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여자어로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게 눈에 너무 띄어서 그냥 웃어주고 말았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좀 분하다. 나도 마음 있다고 거기서 딱 잘라 어필해두는 건데.
실제로 게임을 같이 하진 않았어.
서로 너무 바쁘고, 일에 치이기도 해서 그럴 짬이 나진 않았거든.
그래도 그 대화를 계기로 좀 풀어졌는지 또래끼리 농담할 때
가끔 날 끼워주기도 하고 걔가 은근히 날 챙겨주더라.
나도 그게 좋아서 말을 받아줬더니 눈에 띄게 경직되는 애들이 몇 있었어.
새삼 걔 인기가 실감되고, 내가 진짜 어려운 사람을 골랐구나 싶고.
괜히 내가 걔한테 흙탕물 튀기는 건 아닌가 싶어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더라.
상담을 꾸준히 받았어. 갈팡질팡할 때마다, 길을 모르겠을 때마다.
그냥 하소연하고 싶기도 했고 나보다 더 내 속내를 잘 짚어주는 거 같아서.
속이 편해지니까 걔랑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는 일이 점차 많아졌어.
나한테 요즘 기분 좋아보인다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오기도 하고.
처음엔 일 이야기에 농담 좀 섞는 정도였는데
서로 그런 식으로 티키타카 주고받다 보니까 금세 가까워졌어.
그럴 때마다 심장 나대는 거 숨기려고 고생했긴 하지만.
진짜 나이 먹고 웬 추태인가 싶은데, 그래도 속없이 걔가 좋더라.
걔가 뿌리고 다니는 향수도 좋고 어디서나 잘 들리는 목소리도 좋고.
최근에 겨울왕국 2 개봉했잖아.
1은 전남친한테 잡혀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내가 시리즈물로 챙겨보는 타입은 아니야.
근데 주위에서 영화 이야기로 떠들썩해서 개봉한 건 알고 있었거든.
잠깐 걔랑 대화하다 보니까 그 이야기가 화제에 오른 거야.
걔가 자기도 영화 보러 가고 싶다고 그러더라고.
막 밀대로 바닥 밀고 있다가 뭔 소린가 싶어서
그럼 보러 가면 되지 않냐 했더니 같이 보러 갈 사람 없다고. 찬스다 싶었어.
조언해줬던 선생님도 그랬거든.
너무 다른 사람 시선 신경쓰지 말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게 좋다고.
그래서 확 질렀지. 그럼 나랑 보러 가자고.
지금은 걔랑 썸... 이라고 해도 될까.
그 비스무리한 단계까지는 온 거 같아. 크리스마스 되기 전에 한번 날 잡고 고백해볼까 해.
걔한테 대시하는 애도 많이 줄어들고 내가 걔 좋아하는 거 티내니까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애도 있더라. 사람 감정은 숨긴다고 숨겨지는게 아닌거 같아.
어떻게 드러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질 뿐이지.
난 여태껏 연애하기 위해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나이라든가, 직업이라든가, 다른 사람들 보기에 잘 어울리는가 아닌가 같은 거로.
그런데 그만큼 안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
그래서 전남친들이 나한텐 똥차고 다른 사람한테는 벤츠고...
잘 사는 모습 SNS 통해 슬쩍 보면서 더 비참해지고...
내가 문제인 거 같아서 더 사람을 안 만나게 되니까, 악순환이 반복됐었어.
근데 그게 아니더라. 난 그냥 좀 서투른 것뿐이었어.
하나의 연인이 둘로 갈라선다고 해서 다 내 잘못인 것도 아니고,
전남친이 잘 지낸다고 내가 나쁜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고...
사랑에 목매달 필요는 없지만 사랑하지 않으면서 살 필요도 없었어.
고백도 사실 나처럼 서투른 사람한테는 좀 어렵긴 한데
길잡이가 있어서 한결 나은 거 같아. 물론 맹신은 안 되겠지만.
상담선생님 하는 말이, 얼른 내가 자기를 안 찾게 됐으면 좋겠대.
그럼 잘 지내고 있는 거고 굳이 자기가 상담해주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뜻이니까.
그런 식으로 연락을 안 하게 된 사람도 몇 있다고 그러던데.
걔가 고백 받아주면 나도 그렇게 될까? 이번엔 안 다치고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어차피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희망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아.
그만큼 걔를 좋아하니까.
고백 때문에 생각이 많아져서 쓰기 시작한 글인데, 되게 두서없어졌네.
마무리 어떻게 해야 되나. 다들 따뜻한 크리스마스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걔랑 따뜻한 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