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진 인상, 오뚝한 콧날, 부드러운 목소리,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정준호와 마주했다. 존재 대 존재의 만남으로서, 이 공간에 단 둘뿐이다. 빼어난 여성을 대면하는 것 못지 않게 그를 두고 긴장되는 일은 또 뭔가? 참으로 야릇하다. 에디터 보다 연배가 꽤 많은 그에게, 그냥 저냥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인간 정준호는 남들과 다른 어떤 것을 타고 난 걸까?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한 편이었단다. 하지만 친구를 좋아하다 보니 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고. 놀 때도 그렇고 밥을 먹을 때까지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조부가 “너는 커서 사업을 이끌어 보거나 포용력 좋은 대인이 돼 보거라” 하셨을 정도였으니 어려서부터 꽤나 인복이 많았나 보다. 지금도 그는 친화력이 좋다는 말을 숱하게 듣는다. 그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된 이정표를 만난 것은 단연, 연기자의 길로 접어든 것이라 하겠다
제대 후 스물 너 댓 무렵 대학을 중퇴하고 방황하던 그에게 연기자의 길은
스스로에 의한 선택이라기 보다는 우연처럼 시작된, 어찌 보면 그리 원대하지 않은 출발이었다
이정표를 만나다
그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된 이정표를 만난 것은 단연, 연기자의 길로 접어든 것이라 하겠다. 제대 후 스물 너 댓 무렵 대학을 중퇴하고 방황하던 그에게 연기자의 길은 스스로에 의한 선택이라기 보다는 우연처럼 시작된, 어찌 보면 그리 원대하지 않은 출발이었다. 연극 무대에 서면서 기초 연기를 다졌는데, 3년 동안 5편의 연극 무대에 올랐다. 이 짧지만 치열했던 연극판에서의 생활이 목적의식이 부재된 정준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진정한 연기자의 길로 접어들게끔 만든 것이다. 이런 그에게 1995년 mbc 공채탤런트로 입문해 <동기간>이라는 연속극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된 것은 행운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채의 경우 보통 2년 정도 연수를 거치는데, 이 기간 동안 신인에게 돌아가는 역할이라는 게 그만그만한 엑스트라에 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수 기간에 주말 드라마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공채 직원(?)으로서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대우가 아닐 수 없다.
“제가 딱히 연기를 잘한다기 보다 붙임성 좋고 친화력도 있고, 게다가 나이도 많고(웃음).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에 ‘저놈이 좀 믿음직스럽구나’ 하는 인상을 줬지 싶습니다. 서글서글하니, 그런 면에서 기회가 주어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공교롭게도 당시에 주연했던 드라마는 거의 인기가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공평해요. 가지고 있는 실력보다 너무 쉽고 빨리 찾아온 기회에 대한 공정한 대가 아닐까요? 물론, tv라는 메커니즘을 충분히 숙지한 채 주연을 맡았더라면 더 빨리 업그레이드된 연기자로 거듭났을 테지만요. 실패를 맛 본 저로서는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다음 드라마, 그 다음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의 기회가 연이어 주어졌다. 이 때문에 엄청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하지만 정작 그 반대였다. “동기들이나 주위 동료들 모두가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였어요. 학벌도 그렇고. 어디 하나 제가 그들보다 내 세울 게 없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경쟁자들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 남을 수 있을까?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될 수 밖에 없었죠”
당연히 선의의 경쟁이겠지만 정준호는 나름대로의 작전(?)을 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작전의 컨셉트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자’였다고. 촬영장에 가면 백 원짜리를 2, 3천원씩 바꿔 커피를 뽑아 직접 인사를 하러 다니는 것으로 그의 작전은 시작되었다. 이렇듯 작고 사소하지만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와 성실한 다짐들은 그를 또래 동료들보다 더 빠르고 찬란한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었다. 대중들에게 올바르고 따뜻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이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또 다른 이정표?
마당발로 소문난 정준호인 만큼 몸 담고 있거나 이끌고 있는 사조직(?)이 제법 많다. 일요일 아침은 연예인 축구단인 슈퍼스타 동료들과 운동을 한단다. 촬영이 없는 월요일에는 이문세 등 친분 있는 선후배, 지인들과 산에도 오르고. 연기자로서의 일 외의 비즈니스에도 분주하다(영화사, 기획사, 호텔까지 사실 그는 어지간히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바쁜 그지만 최근에는 봉사활동에서 소소한 기쁨을 얻는다. 여러 언론을 통해 알려졌듯 매 주 토요일마다 전국을 돌며 장애인과 독거노인들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하는 사랑의 밥차가 바로 그것.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한 정준호는 직접 차를 끌고 내려가 자원봉사자들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낸다.
“팬들에게 받은 사랑으로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인데, 어찌 보면 당연하게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돌려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사회 환원 같은 거창함은 부담스럽고요. 단지, 그렇게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이 저를 통해 순환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순환이 더 많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야 말로 정말 살 맛나는 세상일 테니까요”
요사이 들어 정치권의 러브 콜까지 받고 있는 그다. 이미지 정치가 화두인 시국인 만큼 정준호라는 인간의 올곧은 이미지가 제법 탐 나기도 할 만 하다. 하지만 정작 정준호 본인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고향에서 어르신들이 농담처럼 네가 국회의원이라도 하라고 말씀하시기는 하더군요(웃음). 그러나 사실, 정치는 꼭 정치라는 타이틀을 달아야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 사업, 봉사활동까지, 제가 하는 행동의 표현 자체도 일종의 정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열정을 대신할 그 무엇
영화 <거룩한 계보> 이후 정준호는 오는 8월 초 <사랑방 선수와 어머니>의 개봉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원작은 기본 골격만을 두고 현대 식으로 바꾼 리메이크 영화로, 한적한 섬마을에 멀쑥한 서울 청년이 오면서 빚어지는 러브스토리를 다룬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관전 포인트라면, 김원희 씨의 코믹적인 요소와의 앙상블(웃음), 고은아 씨의 톡톡 튀는 신세대 연기, 감초 같은 조연들의 연기 등이랍니다. 저를 둘러싼 두 여자 사이의 삼각 관계도 볼만 하고. 최근 한국 영화가 많이 침체돼 있는데, 저희 작품이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영화에 대한 자신감은 그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두사부일체>, <가문의 영광>, <투사부일체> 등 코미디 장르 영화에서는 독보적인 흥행수표인 정준호 아닌가? 물론, <공공의 적 2>, <흑수선> 등에서 보여준 돋보이는 악역 연기는 그의 재능이 코미디라는 장르에만 국한돼 있지 않음을 충분히 증명해 준다. 실제, 그는 새로운 장르에 목말라하고 있으며, 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단다. 그 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정준호만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게 머지 않은 미래의 목표라고. <데드 맨 워킹>의 숀 펜 같이 디테일한 내면 연기를 펼친다거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처럼 인간의 허무한 삶을 그린다거나… 어쨌든 변화무쌍한 정준호 연기 변신을 조만간 또 한번 기대해봐도 좋을 듯 하다.
12년 동안 주인공을 맡은 스무 편의 영화와 열 편의 드라마에 맹렬히 몰두했던 그의 열정은 어찌 보면 조금 소진돼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불혹을 앞둔 베테랑 연기자에게는 열정을 대신할 그 뭔가가 있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놓지 않았던 성실함과 겸손함, 그리고 카멜레온 같이 변신이 가능한 빼어난 연기의 폭. 이 정도라면 열정과 비견하고도 충분하지 않을까? 에디터 양성식 포토그래퍼 박희진 스타일리스트 최희승 헤어&메이크업 화니 악기협찬 야마하뮤직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