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라 그런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나
초등학생 때 난 뚱뚱했고 부모님은 매일 나 다이어트 시킨다고 저녁밥 안주던 시절이 있었어부모님이 외국에서 사업을 하셨는데어느 날, 손님을 모시러 그 나라 수도로 가야할 일이 생겼어근데 엄마는 엄마대로 너무 바빴고 아빠가 직접 모시러 갔어야 했는데아빠가 1급 장애가 있으시거든그래서 영어도 하고 한국어도 하는 큰딸이 아빠랑 손님 모시러 가라고 한거지
가는데만 10시간 걸렸다난 이런거 처음 해보는데 날씨도 험하고 아빠도 챙겨야 하고소매치기나 사기꾼 걱정도 해야하고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인 초등학생이 치안 안좋은 그 나라에서 어떻게 그렇게 다녔는지요즘 세상엔 애한테 어떻게 그런걸 시키냐고 미쳤다고 했을거야...
다행히 별 일은 없었고 무사히 손님 만났어근데 혼자 오신게 아니고 나보다 몇 살 언니인 조카랑 오셨더라고그렇게 또 여차저차 집에 도착했는데 한밤중이야엄마가 삼겹살 구우며 푸짐하게 한 상 차려놓고 계시더라고안그래도 너무 피곤하고 배고팠는데 침 꼴깍 넘어갔지
근데 부모님이 밤이니까 난 먹지 말고 가서 자래손님이 나 고생 많이 했다고 같이 먹자고 하시는데나 다이어트 해야 한다고 안된대아주 순간적으로 너무하다는 생각이 스쳤는데앞에 손님들 계시니까 내색 안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씩씩하게 인사드리고 방에 갔지
어두운 방에 들어서니 정말 서럽고 힘 빠지더라슬프고 울적해서 불도 안켜고 그냥 멍하니 침대에 한참 앉아있는데그 언니가 조용히 내 방에 들어오더니이거 먹으라고 다짜고짜 내 입에 뭘 갖다대는거야
나 살면서 그렇게 큰 상추쌈 처음 봤다쉿! 배고프지? 나 이거 몰래 갖고왔어 ㅋㅋ언니가 킥킥 웃으면서 속삭이더라너무 커서 세번이나 베어물어야 할 크기였다눈물 핑 도는데 꾹 참고 고맙다고 허겁지겁 먹었지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쌈이었다
난 아직도 그 일이 내 인생 가장 생생한 기억들 중 하나야위험하고 힘들거 알고 있었어도 부모님이 가라고 했으니 간거고잘 해냈으니 뭐라도 보상이 있을 줄 알았는데 푸대접 당한거지(실제로 그 일로 나 용돈 더 줬다거나 뭐 사줬다거나 그런 것도 없었다)그 언니는 서럽고 비참할 때 나타난 천사 같았다고 해야하나나쁜 기억으로만 남았을 법한 일이었는데언니 덕분에 씁쓸하다가도 미소가 지어지게 돼서 고마워
언니 잘 지내? 뭐하고 살아?언니가 그 때 싸준 쌈 덕분에 내가 인류애를 잃지 않았어 ㅋㅋ난 아직도 그 생각만 나면 좀 더 내 주변을 돌아보고 세심하게 챙겨야겠다고 다짐하게 돼내가 그 때 지금처럼 밝은 성격이었으면고맙다고 호들갑 떨면서 온갖 미사여구 붙여가며 찬양했을텐데소심해가지고 고맙다고 헤헤 웃기만 한 것 같네맛있냐고 물어봐줘서 고마워진짜 개꿀맛이었거든
다 크고 성인 된 후에 부모님한테 이 얘기 했더니우리가 너 키우면서 너한테 많이 잘못했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당장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시더라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난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