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다 그 때 너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ㅇㅇ
|2021.02.07 11:36
조회 564 |추천 2
오랜만에 너랑 만날 약속 잡으면서 솔직히 설렜어.
그 몇 시간 톡한걸로 하루종일 행복할 정도로. 어제만 기다리다 보니까 일주일도 금방 가더라. 너무 티나지는 않을까해서 그럴싸한 구실까지 만들려다보니 애꿎은 동생 불러다가 다른 약속도 하나 만들었지. 너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지 모르지만 나 원래 이렇게 푼수같으면서도 잔꾀만 많아. 사실 그 전에 이미 어느정도 눈치채긴 했었어. 카톡 배경사진만 봐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감 잡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지. 그러다 직접 확인하는 순간 뻘쭘하기도 하고 괜히 나왔나 하는 생각에 망연자실했어.
바보같은거 나도 알아. 지난 몇 년 동안 얼굴 볼 기회는 여러 번 있었고 분명 너한테 더 다가갈 수 있는 순간도 많았던 것 같아.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늘 그렇듯이 나 혼자 하는 망상이라고 생각했거든. 지금까지도 난 그게 맞았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그 때 길게 생각 안 하고 질러버렸다면 지금처럼 몇 년에 한 번씩이나마 볼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르는게 겁났어. 적어도 너랑 학교 앞에서 만났을 때까진 나도 큰 미련같은 건 없었던 것 같아. 그렇게 혼자만의 망상이라고 생각하고 외면했는데 그 감정이 좀 더 복잡해진 계기도 있었어.
몇 년 뒤에 한 번 다른 친구까지 셋이서 만났을 때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그 때 이런 저런 얘기하다보니까 너랑 내가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 많구나 하는걸 처음 느꼈어. 그 친구도 농담 비슷하게 그런 얘기를 했는데 아주 잠깐동안 묘한 느낌이 들었고. 너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그 잠깐동안이나마 느꼈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내색은 안 했어. 최소한 내가 기억하기에 네 표정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거든. 걔가 "둘이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럼 둘이 만나면 되겠네?"라고 얘기했을 때 네 눈치부터 살폈어. 너는 아무 느낌도 없는데 혼자 뭔가 의미를 두려는 내 모습이 바보같기도 하고 자존심 상할 것 같기도 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네가 먼저 꺼냈던 말은 아마 우리가 너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서 그런거 전혀 없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 때 기준으로 아마 15년 쯤 전이었을까.
실은 그 옛날에도 너 좋아했던 적이 있었어. 아직 너무 어려서 제대로 표현해 볼 생각도 못하고 어영부영 넘어가버렸지만. 과학 시간에 둘씩 짝을 정해서 무슨 숙제를 해야됐는데 절묘하게도 너랑 짝이 되서 속으로 완전 신났었던 기억이 나. 그 때도 아마 너는 전혀 몰랐을거야. 그리고 내가 먼저 귀국할 때 너가 줬던 곰인형 아직 집에 잘 갖고 있어. 잊고 지내다가도 한 번씩 그거 볼 때면 마지막 날 인사하면서 선물 포장한 인형 건네주던 네 모습이 생각나더라.
아무튼 그 때 그 순간만큼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라는게 너무 원망스러웠지. 그래도 너가 그렇게 느낀 이상 내가 앞으로 갖게 될 마음이 우리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 날 돌아오면서 잠깐이나마 느꼈던 감정을 모두 외면해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어.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사이로 가끔씩이나마 연락할 수 있는 것에라도 감사하려고 다짐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나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서 길지 않긴 하지만 연애도 하게 됐고. 너한테 축하받으면서도 기분이 이상했어. 그 때 내가 느낀 감정이 뭐였는지는 다시 생각해봐도 도저히 설명하기가 어렵네. 연애하던 중에 너를 만났을 때는 차라리 마음이 더 차분해졌어. 정말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로만 널 대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도 웃긴건 가족, 친구들 앞에서는 고민같은건 쏙 빼놓고 좋은 얘기만 늘어놓기 바빴는데 네 앞에서는 그게 잘 안 되더라. 네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기에는 첫 연애로 엄청 들뜨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그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하필이면 또 생각, 성격 차이로 많이 힘들었어서 그 전에 셋이 만나서 얘기했던 순간이 떠오르지 않을수가 없기도 했고.
그리고 어제 다시 널 만났을 때는 많은게 달라져 있었어.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서 난장판이 된 마음을 추스리던 중이었고 너는 지금 만나는 사람과 곧 100일을 앞두고 있었지.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내 모습이랑 대비되기도 하고 정말 친구 이상의 인연은 아닌가보구나 하는 생각에 뭔가 씁쓸하기도 하더라. 그래도 내색안하고 축하한다고 얘기했어. 그게 당연하니까. 드문드문이긴 해도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친구사이니까. 그렇게 많은 얘기를 들은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 최소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는 더 많은게 가능한 사람 같아보였거든.
돌아오면서 어쩌면 이제 널 다시 만나기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지금 밤 새워가면서 쓰는 이 글도 아마 네가 보게 될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이렇게 아무런 의미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 모두 내 자신을 위해서인게 큰 것 같다. 이 글쪼가리 하나에 미련이랑 감정 다 쥐어짜내서 다시 마음잡고 살아보려고.
이번에 널 만나고서 내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하고 모자란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어. 10년, 20년 전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지금의 철없는 모습으로는 많은 걸 놓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고.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연히라도 널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때는 좀 더 떳떳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다. 최소한 여기에 구구절절 써 놓은 내용의 반의 반이라도 네 앞에서 직접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은 되기 위해서 한 번 필사적으로 살아볼거야. 행복하고 꼭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