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보니 배가 너무 고팠다. 피를 무릅쓰고 길가에 있는 어느
햄버거샵 앞에서 15불의 비상금 외에 남은 2불 남짓한 돈으로 무엇인가
사 먹을까 말까 망설였다. 때 커피 한잔에 5센트, 그리고 햄버거 값이 20센트
정도 했을 때다. 마침 그때 떤 사람이 반쯤 먹던 햄버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사람이 멀리 간 후 얼른 그 쓰레기통에서 그 먹다
남은 햄버거를 주워서 얼른 먹었다. 그러니까 나는 미국의 거지가 된 것이다.
먹고 나서 생각해보니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가련하여 길가에 앉아 혼자
엉엉 울었다. 저녁이 가까워져 나는 숙소까지 또 걸어서왔다.
옆방 한국 아줌마에게 어디 가면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지를 물으니 자기는
모른다며 또 다른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 곳에는 한국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그 할아버지는 당시 97세였고 미국에서 70년을 살았다는데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다. 할아버지의 말인 즉 자기는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평생 일을 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할아버지는 아직 정정하여 2층을 혼자 걸어서 오르고 내리고 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서울 공대를 나왔노라면 좀 알아 주던 때였기에
미국에서도 그런 줄 알고 바보같이 양복을 입고 화공학 엔지니어나
섬유공학 엔지니어를 원한다고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지나가던 소가
웃을 판 이다. 그러니깐 직업소개소에서 소개해 준 곳에서는 가는 곳마다
딱지를 당한 것은 당연한 것 이었다.
버스값 10센트가 아까워 걷고 또 걷고 공장지대에서 일거리를 찾으러
다닐 때는 공중 수도의 물을 배에 잔뜩 채우고 배 고픈 것을 참기도 많이했다.
이 짓을 며칠 하다 보니 “내 자신이 누군가 ?” 하는 생각 때문에 차라리
죽어버릴까 생각도 여러 번 해 보았다. 돈은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정말로 살 길이 막막 했다. “나의 이 신세를 어머니나
형제들이 알면 얼마나 걱정을 하실까 ?” 하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궁리 끝에 생각을 바꾸었다. 엔지니어 자리가 아닌, 노동자 자리를
찾기로 했다. 서울에서 학생 때 입던 헌 바지와 T셔츠를 입고 잠바를
걸치고 노동자 일을 찾으러 다녔다.
신분이 다르기에 다른 직업소개소에 가서 신청서에 서울 공대는 빼 버리고
고등학교를 나온 후 화학 실험실에서 기능공으로 일 했다고 썼다. 첫번째
걸린 직장이 1113 힐 스트리트에 있는 문방구 도매상 이었다.
주인은 다른 사람들 에게 나를 가리키며 "한국 남자 아이(Korean Boy)"
라고 소개하며 마치 무시 하는 듯 너털 웃음으로 비웃었다. 시간당 급료가
1.25불 이었는데, 그것도 나에게는 감사하다고 생각 했다. 그 문방구
도매상의 주인이 하는 말이 책 다섯 권을 한 묶음(Package)으로 하루에
5백개의 포장을 하면 내일도 나오고 5백개를 못 싸면 내일 부터 나오지
말라는 것 이었다. 나는 고픈 배를 참아 가며 죽어라 하고 열심히 포장을
했다. 옆에서 포장을 하던 백인 남자가 커피 한잔을 주며 서투른 한국 말로
“먹어” 라고 하기에 깜짝 놀라 어떻게 한국 말을 아느냐고 하니깐
“영등포, 부산, 인천” 하면서 한국 전쟁 때 한국에서 싸웠노라고 했다.
무척 친밀감이 갔다. 그 남자의 말이 이 가게 주인은 인정사정 없는 사람이니
열심히 일 하라고 충고를 해 주기 까지 했다. 달성목표인 5백개의 포장은
물론 어느 날은 7백개 또는 8백개의 포장을 하기도 했다.
숙소까지 또 걸어 온 나는 또 같은 식으로 요기를 한 후 다음 날을 위해
곧 잤다. 이런 식으로 사력을 다해 가며 일주일이 지났다. 주인이 수고했다며
닷새분 50달러에서 세금을 뺀 42불을 주며 또 일이 생기면 연락 할테니
다음 월요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것 이었다.
겨우 거지 신세를 면 하고 살 터전이 생겼다 했더니 일주일만에 다시
거지가 된 것 이다. 미국의 사업가는 좀 매정한 것 같았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또 햄버거 가게 근처에서 서성거리게 됐다.
혹시 길에서 구걸하는 미국인 거지를 볼 때 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저 백인 거지는 의욕도 없고 장래의 꿈도 없지만
나는 일을 하려고 하는 강한 의욕이 있고 미국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꿈이 있는 것이 다르겠지! 용기를 내자, 그리고 미국에서 꼭 성공해 보자’
라고 혼자 나와의 약속을 했다.
다음날 부터는 방향을 바꾸어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할까 하여
버몬트 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올라 가며 식당 또는 백화점에 들어가
아무 일이나 좋으니 일을 시켜 달라고 구걸 하듯이 말 했으나 윌셔길이
나올 때 까지 전부가 딱지였다. 지금은 LA 코리아타운 중심가인 그곳이
그당시에는 한국 사람이나 한국 가게가 전혀 없었다. 버몬트와 윌셔길에서
좌우를 살펴 보니 좌측에는 크고 높은 빌딩이 많았으며 우측으로는 낮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우측으로 윌셔 길을 따라 한참 가니 윌셔 블럭스(Wilshire Blocks)
라는 큰 백화점이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영화 배우들이나
부자들이 애용하는 백화점 이었다. 거지 꼴을 한 나는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은 물론 손님들도 전부 정장을 한 모습 이었다. 백화점
지배인을 만나 아무 일이나 좋으니 하겠다고 하니까 나를 청소 담당
매니저에게 소개 해 주었다.
그 매니저는 나에게 아침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4시간 동안 백화점의
바닥을 청소하다가 손님이 물건을 사면 그 손님의 물건을 자동차까지
들어다 주고 반드시 “감사 합니다. 또 오세요 (Thank you, come again)”
라는 인사를 하라고 가르쳐 주며 청소부가 입는 작업복을 나에게 입혀
주고 명찰을 달아 주었다.
시간당 임금이 1.25달러 이었고 4시간을 일하면 하루 5달러 이지만
그 일을 얻어 열심히 청소부 일을 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청소부들은
전부 흑인들 이었다. 어느 날 이층에 청소를 하러 올라 갔더니 멋있게
차린 동양 여자가 점원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청소를 하며
그 여자 가슴에 단 이름표를 보니 “제이 킴(J. Kim)” 이라고 써 있어
한국 여자 임을 알고는 너무 창피하여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날 또 이층에서 그 여자 앞을 청소할 때는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바닥 청소를 가급적 빨리하며 지나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여자는 나를 “웨이터” 하며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그 여자 에게 다가섰다.
그 여자는 내 가슴에 붙은 내 이름을 보더니 “어머나! 한국 사람이군요”
하는데 나는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꼈으나 먹고 살아야 하니
별 도리가 없었다. “네” 하고 한국 말로 답했다. 그 여자는 나에게 이
손님이 산 물건을 차까지 들어다 주라는 것 이었다. 명령대로 했다.
그 후에는 그 여자 앞을 청소할 때 얼굴을 돌릴 필요도 없어졌다.
거지들과 살며 하루에 5달러를 벌게 되니 가끔 내 돈을 내고 놈스
(NORMS)라는 식당에 가서 먹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꿈은 아니기에 오후 2시 이후에는 또 직업 소개소에 찾아 갔다.
한국에서 고등 학교만 나온 것 으로 하니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 소개소에서 아침 7시부터 8시간 하는 일이 있는데 하겠느냐 하기에
그 백화점에 가서 사정 얘기를 하고 그만 두겠노라 하니깐 흑인 웨이터
매니저가 너는 착실하니 야간에 백화점 문을 닫은 후 7시부터 10시까지
변소 청소와 백화점 바닥을 왁스를 칠하며 광을 내는 일을 계속 하라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다음날 직업 소개서에서 속개한 직장에 찾아 갔다. 메인 스트리트와
3가 근처에 있는 구슬 공장 이었다. 30명이 넘는 여자들만이 서서
구슬을 바늘로 꿰며 싸구려 목걸이 등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여자들
사이에 남자 혼자 끼어서 구슬 꿰는 일을 하자니 얼굴이 화끈거려
차라리 굶는 쪽이 좋을 것 같아 이틀 후에 그만 두었다.
그 소개소 에서 또 소개해 주는 다른 공장에 가 보니 아침 7시까지
나오라는데 자동차가 없는 나는 새벽 4시 45분 경에 9번 버스를 타야만
버논시에 6시경에 도착 하고 거기에서 30분을 아무도 없는 춥고 컴컴한
거리를 걸어야만 그 공장에 6시 30분까지 도착 할 수가 있었다. 그 공장의
일이란 크고 작은 약품 드럼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운반 하는 일 이었다.
다른 노동자들은 웃으며 이런 일을 하는데 왜 나는 이런 일이 그리도
힘이 드는지? 3시에 오후반과 교대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거지 숙소에
오면 5시가 훨씬 넘었다. 아무거나 챙겨 먹고는 또 그 백화점에 청소를
하러 가야만 했다. 이 일을 며칠 하다 보니 아침에 일어 나려면 허리와
어깨가 부서 지듯이 아팠다. 지금 생각 하면 내가 무척 어리석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럭저럭 지갑 속에는 35불 정도의 돈이 모였으나 그 것이 아까워
배가 고프면 5전 짜리 도넛 한 개를 사 먹고 물로 배를 채웠다.
미주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거지의 꿈 - 이중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