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일 동안 만난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귀엽고 웃는 게 보는 사람이 기분 좋게 해주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쭉 지내다가 어느 순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지만 용기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괜히 좋아한다고 했다가 멀어질까 봐 숨겼습니다.
제가 그렇게 잘 생긴 것도 아니고
성격이 좋은 편도 아니고
히키코모리에 친한 친구도 한두 명 뿐이고
매력적인 사람도 아니고
가진걸 딱히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알고 지내다가 9월 말쯤에 나도 모르게 말을 했습니다.
좋아한다고
그 친구도 전 몰랐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말해 줘서
와....
서로 좋아해서 만날 수도 있구나
이런 일이 나한테도 이루어질 수 있구나 꿈같았습니다.
20대 중후반을 여자 친구 덕분에 많이 사람 같아졌습니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맨날 혼자 다니고
목소리도 못 내고
바닥만 보며 걷고
일이 끝나면 피씨방이나 다니면서
시간 때우던 병신 찐따가 이 친구 덕분에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마웠습니다.
하루하루 잠들기 전에 생각나고
만나는 날에는 뭘 먹이면 기분이 좋을까
쇼핑몰도 뒤적거리면서
아~ 이 옷 입히면 정말 천사처럼 보이지 않을까
기념일이나 그냥 생각나는 날 꽃말도 검색해보고
미리 주문해서 보기로 한 장소에서 만나
"음... 그냥 사봤어" 하고
건네주면서
"근데... 괜히 산거 같아~"
"네가 있으니까 꽃이 제 역할도 못하네~ "
이런 아재 같은 말도 하며 눈치 볼 때
날 보며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쁜얼굴 꾸깃하면서 세상 환하게 웃어주고
밥먹을 때 오물거리면서 복스럽게 먹고
보는 날엔 저멀리 뛰어오면서 안기며 올려다보다 보며 씨익 웃어주고
손잡고 걸으면 손에 땀나서 잠시만~ 이러면서 손 쓱쓱 닦고 다시 잡아주고
헤어질 땐 갈비뼈 부스러질 정도로 꽉 안아주면서 어이구야~ 하는 추임새까지
존재 자체가 나에겐 너무 벅찰 정도로 행복하게 해주는 여자친구였습니다.
그런 여자친구가 이제 그만하자고 합니다.
상처받으면서도 나한테 쪼잔하게 보일까 봐
나한테 말을 못 하고 쌓아둔 것도 많고
나한테 말해도 그게 온전히 풀리지 않았고
그냥 나 하나 좋다고 감정을 무시하니 결국 무시 하는 게 안되어서
너무 힘들고 아팠다고...
더 이상 아프기 싫다고....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좋은 모습만 기억해 주겠다고
후회해도 늦었지만
900일이나 만나면서 진짜 제대로 뭐하나 해준 게 없는 거 같은데
20대 후반이 될 동안 사는 꼴도 참 뭐 같고 볼품없습니다.
여자친구가 저렇게 말해 주기 전까지
심지어 눈치도 없어도 너무 없었습니다.
꼴에 마지막엔 쿨한 척 고마웠다고
잘 지내라고 모르는 척 지내자고
마지막 톡을 보냈지만
지금도 너무 보고 싶습니다.
뻔한 말이라도 지금 당장 붙잡고 싶습니다.
헤어지기엔 너무 네가 나에게 큰 존재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 자신이 너무 볼품없는 게 보여서 정말 싫어집니다.
여자친구를 끝까지 잡고 싶어도 당장 내가 가진 게 없고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도 될 사람이니까 붙잡기도 겁이 납니다.
900일 동안 나 같은 놈 사랑해 줘서 고맙습니다.
항상 최고라고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항상 못생겼는데 잘생겼다고 해줘서 고맙습니다.
항상 환하게 웃어주며 사랑을 줘서 고맙습니다.
내 여자친구여 줘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네가 만나는 사람이 없고
혼자라면
기회를 준다면
다시 한번 고백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