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의 감독관 이었던 오토 세스는 나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자기는 곧 은퇴하여 오레곤으로 이사하여 모빌 홈 (Mobile Home)에서
살게 되니 자기의 모든 가구를 나에게 주겠다는 것 이었다. 나무로 만든
고급 가구들이었다. 나는 오토 세스에게 미국 사람 들도 많은데 왜
나에게 주느냐고 물었다. 그의 말인즉 나 같이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면
자기가 어렸을 때 독일에서 건너와 고생하던 생각이 나서 나에게 그냥
주고 싶다는 것 이었다.
내가 다니던 플린코트 주식회사에는 두 가지의 큰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생산되는 종이에 구멍이 군데군데 뚫려 나오는 것 이었다. 무척
오래 된 문제이며 그 회사의 열명이 넘는 엔지니어들은 으레 해결할 수
없는 불치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회사로서는 구멍이 있는 부분을 제거
하고 판매 해야 하므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 하고자 항상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일이 끝나고 초과
근무가 없는 날은 구경 하는 척 하며 원료 배합과정과 생산 과정을 꼼꼼히
조사했다. 이 회사 에서 재생지 (Recycle Paper)를 생산할 때, 그 원료 중
신문지나 잡지를 쌌던 플라스틱 커버 등이 원료 준비 중 분말이 되어
액체상태의 종이 원료와 혼합 되어 건조 중 수증기 드럼 (Steam Drum)에
닿을 때 그 플라스틱의 분말이 고온에 녹아 구멍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험실에서 현장과 꼭 같은 종이 원료에 플라스틱 분말을 섞어 섭씨360도의
동판에서 건조시켜 보니 현장에서 나오는 종이의 구멍과 똑같은 구멍이
생겼다. 사장인 윌슨 하비는 하바드 대학을 나온 변호사 였는데 회사 일
보다는 골프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 같았다. 그는 내가 찾아 낸 결과를
어찌나 좋아 했던지 열명의 엔지니어들을 포함한 간부들을 모두 모아놓고
나를 칭찬했다. 실험실에서 일하는 말단 사원으로서는 주제 넘는 일을 한 것
같아 좀 쑥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는 며칠 후 나 만을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그 곳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골프를 치는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는 나에게 한국에서의 경험을 자세히 물었다. 대화 도중 미국에서
처음 고생 했던 얘기를 하며 사실은 한국에서 공과대학을 나왔다고
말하면서 나는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 애를 썼다. 그는 인사담당
부사장인 데이비드 헌팅턴을 불러 연구소로 발령을 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시간제가 아닌 월급제로 바꾸어 주는 것 이었다. 연구소에 가 보니
전부가 넥타이를 맨 신사 차림의 연구원들 이었다. 좀 어색하지만 한국에서
입고 온 단벌 신사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 하니 사정을 모르는 현장
사람들은 “너 오늘 결혼식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 회사의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종이가 건조되는 마지막 과정에서 가끔
불이 나기 때문에 버논시의 소방차가 항상 대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장은 내가 연구소로 들어가자마자 이 화재 문제를 해결해 보라고 했다.
연구소장은 퍼듀 대학을 나온 프레드 해니 박사였는데 내가 주제넘게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이 좀 불편했으나 프레드 해니는 나의 심정을 미리 알고
“여기 연구원들은 나이가 먹었으니 젊은이인 네가 하면 될 것 이다” 하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알고 보니 별 것이 아니었다. 생산된 종이가 회전부(Reel)에서 풀리며
다음 과정인 아스팔트를 입히는 통(Asphalt Coating Tub)으로 들어 가기 전
종이와 회전부의 마찰에서 발생 하는 정전기가 발화성 아스팔트에 불을
붙이는 것 이었다. 이 사실을 사장과 담당 부서 책임자들이 보는 앞에서
전구의 한 쪽을 일분간에 1000피트(Feet)이상 달리는 종이 표면에 또
하나의 전극을 땅에 대고 스위치를 올리니 10와트 전구에 불이 켜졌다.
사장인 윌슨 하비는 나에게 정말 고맙다고 악수를 청했다. 1/2인치
파이프에 1/23인치의 구멍을 뚫고 수증기를 보내니까 그 수증기 때문에
정전기는 발생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내가 느끼게 된 것은 이 플린코트
회사의 많은 엔지니어들, 그리고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성이 없고 그저 시간만 채우는 것이 이들 생활 철학 인 것 같아 보였다.
어쩌면 이 회사 만이 아니라 미국 전체가 병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플린코트 연구소에 근무 하게 되니 장, 단점이 있었다. 시간제에서
월급제가 되고 보니 초과 금무를 해도 월급은 그대로였다. 장점으로는
신사 대우를 받을 수 있고 한국에서 와 거지로 살던 촌놈 신세에 넥타이를
매고 다녔고, 같은 동료들이 고등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와 화학자들이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월급제 사원들에게는 회사의 화려한 카페테리아에서
값비싼 점심을 무료로 주었다. 때로는 카페테리아에 들어 설 때 사장과
눈이 마주치면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며 자기 앞 자리에 와서 앉으라고
신호를 해 보였다.
나는 줄어 든 수입을 보충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 정부에서 발행 하는 초급 대학 교수 자격증(Community College Professor
Credential) 만 있으면 초급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80년
부터는 대학원 졸업장만 있으면 자격증을 그냥 내 주지만 그 당시는
주정부의 공개 시험을 치르고 합격 해야 하는 제도 였다. 더구나 나의
졸업장은 한국에서 받은 것 이기 때문에 불리 하다고 생각 했다. 다행히
응시 용지에 한국의 학력은 안 된다는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다. 그 시험 결과 수학, 공학 그리고 생태학의 교수 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학력이 한국의 것 이기 때문에 더구나 야간반만 가르치겠다고
하니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LA 시에 있는 열 개의 커뮤니티 대학을 전부
다니며 면접을 했으나 전부 거절 당 했다. LA 커뮤니티 칼리지 중 한국의
미8군 안에 있는 메트로 포리탄 대학이 있는데 원 하면 미8군으로 가라고
했으나 그 곳은 주간 일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 전에 면접 했던 LA 커뮤니티 대학에서
편지가 와 있었다. 뜯어 보니 주 2일 하루 세 시간 씩 저녁 6시부터 9시
까지 수학을 가르쳐 달라는 내용의 편지 였다. 급료는 시간당 11.50불
이라는 것이었다
낮 직장인 플린코트에서 초과 근무를 할 때의 수입 만은 못 하지만
경험삼아 하기로 결심 했다.학장인 마가렛 크로포드 박사는 매우 깐깐한
여자 였다. 이 여자는 첫날 부터 다른 몇 명과 함께 내가 강의하는 교실의
뒷 자리에 진을 치고 앉았다.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영,수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쳐 본 경험은 있었지만 나를 심사 하겠다고 진을 치고 앉아
있는 서양 사람들 앞에서, 더구나 영어로 강의를 하자니 나의 손과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그들은 한번 들어오면 15분 내지 20분을 앉아서 무엇인가
적고 있는데, 그 시간이 왜 그다지도 긴 시간인지 모른다. 겨울이었는데도
등에서 식은 땀이 나왔고 얼굴은 화끈 달아 올랐다.
얼마 후 학장에게 불려 갔다. “음! 때가 왔구나! 드디어 모가지구나!”
하고 생각했다. 분명히 쫓겨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만나고나니 의외에도 웃으면서 잘한다고 칭찬을 하는 것 이었다.
너무나 의외의 말에 나는 듣는 순간 너무나 감격 해서 눈시울을 적셨다.
그 여자 학장은 결근하는 교수가 있으면 나에게 전화를 할테니 대신
강의를 하라며 나를 도와 주었다. 그 여자는 1995년에 은퇴하여
LA의 8가와 아드모아 근처 큰 이층 집에서 혼자 살았다.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 하는 여자라, 가끔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가면 좋아하며 나를
반겨 주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작년에 별세 했다. 그 여자가 살아 있을
때 자기는 자식도 친척도 없다며 나에게 자기 집을 주겠노라 하는 것을
거절했다.
미주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거지의 꿈 - 이중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