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하디 흔한 능력이라고 불리는 방언을 하지 못한다면 초보중의 초보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미 그렇게 여기고 있는 흔한 능력이다.
방언을 못한다면 영의 세계에 대하여 얘기를 하여도
아무 감흥이 없을 것이다.
영의 세계에 발조차 담그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의 세계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은
발조차 담그지 못한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과 같다.
마치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얘기를 해도
벽을 마주하고 혼자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담가보지 못한 셰게.... 방언.... 그리고 그것은 곧 영의 세계....
이미 이 세상은 사용해 볼 현 구시대적인 방법을 다 사용해 봤다.
그런데도 왜 가톨릭은 하느님을 믿는 종교로써
하느님을 믿는 종교는 2분의 1이나 되면서도
꼴지의 종교처럼 혹은
종교도 선택권이 있다고 여기는
그저 사라저가는 아무것도 아닌 무색무취의 이름없는
선택권의 선택지에서 선택받기를 구걸하는
절대자의 종교가 아닌 선택할 수 있는 종교처럼
그리고
50분의 1의 종교마냥 바라만 보고있고 정체를 하는 것인가.
(참고로 전세게의 50분의1의 종교는 불교이다.)
마지막 남은 비장의 카드는 이미 오래전부터 성경에 쓰여 있었다.
성경에 쓰여 있는 줄 몰라서 사용하지 않은 카드.... 방언이다.
항상 구하기를 힘쓰라고 하신 방언을
거의 예수님의 시대에서부터 2000년대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천주교의 시작부터 방언을 사용했더라면 어떠하였을까.
생각만 해도 종교의 독점과 번영이 보인다.
성경에 쓰여 있으면서도 몰랐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경말씀대로 하는 것이 힘이 있을까.
아니면 사람의 생각대로 계획을 짜서 노력하는 것이 힘이 있을까.
우리는 성경에서 항상 구하기를 힘쓰라고 하신
방언의 힘을 충분히 알고도 소홀히 여기고 있다.
그것도 매우....
방언의
그 능력에 비해 매우 소홀히 여기고 있다.
왜 과거의 소용없던 철지난 방식을 고집하는지
그리고 머리를 왜 그렇게 복잡하게 쓰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
그 어떠한 인간의 방법도 소용없다는 걸
이미 깊이 깨닫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왜 방언을 항상 구하라고 하신 것을 았았으면서
지금도 아무런 변화도 미동조차 않은채
아무런 힘도 쓰지 않는지도 이유를 알고 싶다.
구마의식처럼 방언은 그에 버금가는 신비체이다.
방언말고 다른 현구시대적인 방법이 크게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방언만큼 좋고 신비로운 무기가 없으면서
신비체 그 자체인 방언을 그대로 묻히고 있다.
구마의식은 신비롭게 여기면서....
마지막으로 오웅진 신부님도
이미 오래전부터 방언을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