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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한 윤치호 장로

윤치호(尹致昊, 1865~1945) 장로는 충남 아산에서 윤웅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되던 해에 아산에서 한학자로 유명한 장 선생을 모시고 한학을 연마하였다. 아홉 살에 서울로 상경하였고 1881년 봄부터 2년간 학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어윤중(魚允中)의 문하생이 되어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과거 시험을 보고 관리가 되는 것을 인생 최고의 출세라고 생각하였지만 윤웅열은 그러한 길을 걷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갈 수 있도록 아들을 인도했다. 이러한 연유로 윤치호는 1881년 9월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58명의 제2차 일본 신사유람단원 중 한 명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윤치호는 난생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도쿄로 향하였다. 이때 윤치호는 필담(筆談)으로 일본 관리에게 여쭈어 보았다. “언제부터 기차가 다녔습니까?” 일본 관리는 하얀 종이에 ‘1872년’이라고 썼고 이를 본 윤치호는 깜짝 놀랐다. 당시 윤치호는 17세의 어린 나이었지만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 된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한 윤치호는 더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약 2년간 일본에 남아서 일본 최고의 개화사상가인 나카무라(中村正直)가 설립한 학교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중등과정을 이수하였다.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유학에 유길준이 참여를 하였으며, 여기에 윤치호는 김옥균의 권유에 따라 1883년 1월부터 요코하마에 있는 네덜란드 영사의 협력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윤치호는 귀국한 후 조선에 초대 미국 공사 푸트가 부임하자 그의 통역관이 되었고 그의 활동 무대는 서서히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윤치호는 1884년 12월 4일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는데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지만 김옥균과 친분관계가 있어 개화파로 분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트 영사의 추천으로 상해에 있는 남감리교 미션학교인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여 중등과정을 이수하게 되었으며 중서서원에서 실시하는 세례도 받았다.

미국 남감리회 소속 교인이 된 윤치호는 선교부의 추천으로 188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의 유학은 바로 감리교 다락방 본부가 있는 네슈빌에 위치한 밴더빌트대학에 입학하면서 조선인으로서 첫 유학생이 되는 영광도 차지하였다. 이때 미국 네슈빌에서 열린 미국 세계선교신학생대회에 안식년이었던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강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미국 남장로교 소속 신학생들은 이 대회에 참가하고 조선선교사로 나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일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조선 호남지방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호남 선교의 공로자로 언더우드 선교사와 윤치호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 유학생활을 마친 윤치호는 10년만인 1895년에 귀국하였으며, 실력을 인정받아 학무협판(문교부 차관) 등의 관직을 지내는 한편 1897년에는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주도해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독립협회는 해산되었지만 윤치호는 애국가를 작사하는 등 활동을 계속 한다.

1904년 영국 극동함대 한 척이 제물포에 입항하였다. 함대 사령관이 양국의 애국가를 연주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고종황제는 당황하였다. 이때 고종황제는 머리가 영특한 윤치호 외부협판을 불러 즉시 국가(國歌)를 제정해서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 윤치호는 기도하는 가운데 애국가를 4절까지 작사하였다. 그가 작사한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랜 사인(Auld Lang Syne)의 곡을 붙여서 영국 함대가 우리의 첫 애국가를 연주하게 됐다. 그가 작사한 애국가 가사(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는 1907년 감리교회에서 제작한 찬미가 제14장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엽 그가 친일했다는 이유로 애국가 가사는 ‘작사미상’으로 처리되었다.

그의 애국운동은 계속되었다. 이 일이 일어난지 얼마 안 되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국권이 상실된 마당에 그냥 앉아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 윤치호는 ‘자강운동’을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갔다. 바로 이 무렵 미국 남감리교와 선교부의 지원을 받고 개성에 한영서원(송도고등보통학교)을 설립하고 원장직을 맡았다.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윤치호를 주모자로 지목하고 최고형인 6년형을 언도했다. 결국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무죄로 출감하였다.

비록 석방되었으나 항상 고등계 형사의 감시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않고 기독교 내 각종 국제 대회에 강사로 나서 명사로 알려졌다. 또 1930년 조선 남북감리교회 통합과정에서 전권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조선기독교감리회 탄생에 큰일을 해내기도 하였다.

1881년부터 1943년까지 60년 동안 쓴 그의 일기는 그의 모교인 애모리대학에 기증되었다. 애국가 가사를 작사하였지만 미상으로 남게 된 이유는 강압에 의해 할 수 없이 일제에 부역한 일 때문이었다.

(한국장로신문)

[출처] 애국가 작사한 윤치호 장로|작성자 성경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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