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이야기이지만, 되돌아 보니, 이 결정은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소개로 어떤 남자를 만났다. 당시 나는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결혼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대학원 입학도 앞두고 있어서 한동안 내가 버는 돈으로는 내 학비와 생활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을 상태였다.
그 남자는 30살이 되도록 연애를 해본 적 없는 모쏠이었는데, 내 어떤 면이 맘에 들었는지, 만난지 한달만에 내게 프로포즈를 하고, 부모님과 두명의 누나들과 누나들의 가족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 남자는 내가 결혼을 해도 대학원도, 내 직장도 계속 다닐 수 있다고 걱정 말라고 했고, 집은 남자의 부모님이 전세집을 마련해주실 거고, 본인이 모은 돈으로 혼수도 할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심지어, 대학원 학비도 내줄 수 있으니, 결혼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낳고, 대학원만 다니라고 할 정도였다. - 그래도 우리 엄마는 그러는 거 아니라며, 내 결혼을 위해 모아 두신 몇천만원을 쥐어주시며 혼수에 쓰라고 하셨다.
왜 내키지 않았을까... 아마, 그 남자가 고3일때,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그 남자의 고3생활을 뒷바라지한 작은 누나, 마치 그 남자를 자신의 남편처럼, 애인처럼, 아들처럼 다루는 그 작은 누나가 나를 대하는 태도와 비언어적 의사표시때문이었던 것 같다. 결혼은 했지만 불행한 작은 누나와 조카들에게 그 남자는 오랜기간 남편 역할을 해왔다고 했다. 작은누나와 아이들이 필요한 것들은 모두 그 남자의 차지였고, 작은 누나가 의지하던 예언가는 '그 남자의 아내가 잘 들어와야 작은 누나가 편하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 남자는, 그 남자의 생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누나에게 분노가 있었지만, 동시에 불행한 작은누나와 조카들에게 자신이 유일한 의지할 곳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12월에, 그 남자와 나는 상견례를 하기로 하였고, 그 남자와 부모님 세명, 나와 내 부모님 세명 총 여섯명이 만나서 식사할 수 있는 좋은 한정식 집을 예약했다.
상견례날 아침에도 12월의 함박눈이 쏟아졌는데, 그의 차에서 그와 부모님이 내렸고, 저쪽에서 택시 한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작은 누나와 작은 누나의 유치원생 딸과 아들이었다. 작은 누나는 그 남자와 나에게 사전에 어떤 논의도 없이 무작정 택시를 타고 상견례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나는 당황했고, 그 남자에게 어떻게 하냐고 물었고, 그 남자는 작은 누나에게 예약한 한정식집은 여섯명밖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근처 스파게티 집에서 일단 식사를 하라고 밀쳐냈다.
나는 작은 누나와 어린 아이들이 맘에 걸렸지만, 일단 내 우선순위는 그 남자의 부모님과 내 부모님의 만남이었기에, 한겨울 함박눈에 오돌오돌 떨며 서 있는 그의 작은 누나와 그 아이들을 뒤로 하고 부모님들을 챙겨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상견례는 그러하듯, 서로 예의를 갖추고, 서로에 대한 덕담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 남자는 내게 화를 내며 전화를 했다. 왜 작은 누나와 아이들을 챙기지 않았냐고. 그리고 상견례 전날, 그의 누나는 그의 어머니가 죽는 꿈을 꾸었다고.
며칠 후, 그의 작은 누나는 그 남자에게 나는 그 남자의 짝이 아니라는 예언가의 말을 전하며 헤어지기를 종용했고, 나는 그 누나의 말에 동의하며 헤어지기로 하였다. 그 예언가의 말은 결국, 나를 위한 예언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이 일로 많이 힘들었지만, 내가 잘 살아내면 그만인 것이고, 이혼녀보다, 남자와 사귀다가 헤어진 여자가 더 낫기에, 이 헤어짐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음에 상처는 남았고, 거절감에 미리 손절치는 나쁜 습관이 생겼지만, 되돌아 보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준 손길들이 더욱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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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자작 아니에요. 몇가지 사실을 생략하기는 했지만, 자작은 아닙니다.
생략한 사실 중에 하나는, 제가 170 조금 안되는 큰 키이고, 제 남동생도 190 가까이 됩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160이 조금 넘는 작은 키였어요. 그 남자가 저보다 작았죠. 두명의 누나는 150도 안되는.... 되돌아보면, 그 남자의 가족이 모두 난장이에 가까운 작은 키였어요. 그 남자는 키는 작았지만 똑똑하고, 만나면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박학다식하고, 배울점이 많은 남자였어요. 좋은 직장과 커리어도 있었고.... 다만, 가족, 특별히 불행한 작은 누나에게 휘둘려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보지 못했고, 저와 결혼도 추진하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을 한거였구요.
절대 자작은 아닙니다.
자작이라는 댓글이 많은 것을 보니 놀랍네요. 자작이라고 해주신 분들도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자작이라고 할만큼 황당한 일을 제가 당했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네요. 그래서...더 잘 살아보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