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받던 날의 설렘이 채 가시지도 않았다.
첫 데이트를 하던 밤,
쌀쌀한 가을 저녁 그의 회사 근처로 가서 퇴근한 그를 맞이하고
그의 차에 타서 함께 영화를 보러 가던 길
채식을 한다는 나를 신기해하면서도 함께 먹을 수 있는 괜찮은 음식점이 어디있을까 열심히 찾아봤다는 그에게 고마웠다
조용한 쇼핑몰을 거닐며 그가 얼마나 이곳에 자주 오는지, 여기에 괜찮은 커피를 파는 곳이 있다는 시덥잖은 얘기를 들었다. 그의 사적인 일상으로 한발짝 들어간 느낌이었다.
베놈2는 기대이하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를 보는 내내 온 신경은 그에게 향해있었고 그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집까지 데려다주는 그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주변에 친하게 지내는 여자친구들 얘기를 자주 들었기때문에 나도 그들중 하나가 되는 과정일까 생각했다.
오랜만의 데이트라 혼자 주책맞게 설레는 내가 웃겼다.
두번째 데이트는 나의 휴무날이였다.
내가 사는 동네근처에서 밥을 먹고 듄을 보기로 했던 저녁
그가 주소를 보내달라고 했다.
퇴근하고 씻고 오랜만에 화장도 살짝하고 지하로 내려가니 우리집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댄 그가 멀뚱히 서있었다.
내 공간으로 그가 들어온 순간이었다. 브라운자켓을 입은 그와 반갑지만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바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영화시간까지 1시간가량 남았을때 그가 봐둔 카페로 이동하였다.
나는 오전이 아니면 커피를 잘 마시지않는다.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큰 흥미를 느끼진 못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여서,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다.
혼자 설레지 말자면서도 지금 하고있는게 데이트가 아니면 무엇일까 생각했다.
본인이 자주 사던 쇼핑몰의 사장이 해외에 살았다며 제품을 사면 직접찍은 사진엽서를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관심있게 듣던중 그가 갑자기 자켓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준다.
해외의 시계탑을 찍은 엽서가 내 손에 들려지고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반가워한다. 내가 워홀을 갔던 곳이였다.
그리고 사진을 뒤집었을때 보인 얇은 손글씨.
너를 좋아해 나랑 사귀어줄래?
..?
????
내가 잘못읽은 걸까 이 글귀가 있는줄 모르고 보여준걸까 나한테 하는 말일까
그 짧은 순간에 온갖 물음표가 쏟아졌다.
그는 내 눈을 보지않고 불안하다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다.
설마,, 설마 고백하는 건가?
긴가민가한 상황에 나는 엽서 속 장소를 막 설명하고 나섰다.
그는 리액션이 고장난듯 내 얘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였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사진뒤의 글에 대해 물었다.
이거 나한테 하는 얘기야?
그렇다고 한다.
당황했다. 예상치못한 상황에 너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빨개진 두 볼에 부채질하며 당황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이런 나의 모습에 그도 같이 안절부절못했다. 거절해도 된다면서
괜히 착각하지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다가 받은 고백이였기 때문에 머리가 그냥 하얘졌던거 같다.
이렇게 로맨틱하고 섬세한 서프라이즈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카페도, 엽서도, 고백하는 글마저 나의 취향을 제대로 관통해버렸다.
좋은데 당황스럽고 놀랐던 그 감정은 살면서 다시 느낄 수 없을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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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마저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이 사람이 완벽한 내 반쪽이라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건 세상에 존재하지않는다는 걸 알고있기에 내가 할수있는 만큼 노력하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니까. 싫지만 적응하기위해 애썼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것이라고 믿었다.
그게 잘 안될 확률이 높아보여도 어릴때처럼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걱정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던 그가 참아왔던 불안을 폭발시켰다.
그만하자는 그의 말을 끝으로 약 열흘간의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참 길게, 내 모든 행동은 느리게 느껴졌다.
먹지않아도 잠을 자고 일을 하고 그를 그리워하며 눈물흘릴수있었다.
10년간 유지하던 몸무게는 일주일만에 6키로가 빠졌고,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않을 컨디션이였다.
이별 후 이렇게 힘든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애는 내가 먼저 마음이 식어 이별을 고하고 그 관계에서 제일 먼저 도망치곤 했었다.
상대방을 생각못하고 내가 좀 덜 힘들기위해 통보한적도 있었고 사는 지역을 떠나면서 관계를 끝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여느 연애와 다를 것없이 다툼과 사랑이 반복되는 평범한 연애를 하며 둘만의 특별한 관계를 쌓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이별은 나에게 아직 있지도 않은 옵션이였는데 상대의 입에서 그것이 뱉어지는 순간 나는 받아들이질 못했다.
친한언니와 밤새 험담을 하고 잘 헤어진거라며 되뇌어도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사랑을 한순간에 무너뜨릴수는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먹지를 못해서, 끝까지 안가보면 후회가 남을 것같아서
더 늦기전에 연락을 했다.
볼수있냐는 나의 물음에 아니, 난 괜찮아 라고 답하는 그가 너무 미워서 눈물이 멈추지않았다.
나는 이렇게나 힘든데..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정리할수있는지 원망스럽다는 투의 문자를 보냈다.
그가 장문의 답을 보내고 그도 힘들게 참고있다는 말에 한가닥 희망을 본 나는 매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쌍한척 그를 흔들려고 했으나 쉽지않았다.
그 다음에는 자존심 다 버리고 애원했다. 진짜 사랑이라면 기꺼이 다 포기하고 잡고 싶었다.
오랜 기다림끝에 만나서 얘기하자고 답이 왔다.
그의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근처 스타벅스..
예감이 좋지않았다.
승산이 없어보였지만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스벅에 도착해서 맨 구석 안쪽에 자리를 잡고 그를 기다리며 짧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의 노력을 몰라줘서 미안하다는 내용과 키우던 고양이를 보낸 슬픔이 아직 내게 남아있어서 그가 싫어하는 낮은 텐션이 나왔다는 내용이였다.
멀리간 냥이를 떠올려서인지 내 슬픈 마음을 다 보여줘서인지 주체할수없는 눈물이 계속 났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와서는 내 앞에 앉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차갑게 대하는 그 상황이 비참해서 또 눈물이 흘렀다. 이성적으로 조절할수가 없었다.
마음이 더 아팠다
양쪽 모두 마음이 남아있고 단지 내가 먼저 용기내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가 미안해서 혹은 고마워서 다가올줄알았다.
그런데 완전 예상을 빗나갔다.
그는 정말로 나와 만날수없는 이유를 리스트업해서 나에게 줄줄 말하고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도 설득하고 있었다.
연인사이에서 갑을관계가 된다는게 이런걸까 특히나 을이 되는건 상당히 비참하고 괴롭구나 생각했다.
헤어진 이유였던 여사친문제뿐만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가 문제를 삼고있다는걸 처음 알았다.
그와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의 외모, 패션, 가치관, 식습관마저 걸린다고 걱정하는 그를 보니
지금껏 봐온 모습중에 가장 솔직한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 다시 만나보자"
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영혼없이 수긍하고 나를 포기하고 나에게 상처주는 말을 묵인했는지 생각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걸까? 내가 생각한 재회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지만 결국 다시 만날수있게 되었는데.. 이게 원하던 것이 아니였나? 혼란스러웠다.
새로 시작하는 관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참 미미하게 작아졌구나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계속 떠올리게되었다.
내 손을 잡기싫어 팔짱끼고 걷는 그의 옆에서 상처받지말자 이정도는 감수해야 만날수있다 라고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너무 슬퍼서 속이 쓰린데도 티내지않으려 했다.
오랜만에 타는 그의 차, 그의 향기.. 기분이 참 묘했다.
운전중에도 그의 손을 한번도 내어주지않았다. 그의 온기가 참 그리웠는데..
자연스럽게 들어가던 주차장이 아닌 그 입구에서 날 내려주고 급하게 떠나는 그를 보며 직감했다. 더는 없겠구나
다시 만난다는 대답외에 내가 원한건 하나도 얻지못했구나 서러워서 엉엉 울었다.
그가 나를 이렇게 대하는게..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쉽고 속상했다.
집에 돌아와 친한 언니와 통화하며 다 쏟아냈다.
그가 얼마나 나를 무시하고 상처줬는지 얼마나 못난 놈을 내가 사랑했는지 분단위로 아니 초단위로 빠르게 깨달았다.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미 벼랑끝이였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니 신기하게도 정리가 되고있었다.
내가 힘들게 붙잡아두던 그 사람은 사실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이었고,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
알고싶지 않았던 현실이고 사실인거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출근하면서 문자로 끝내버렸다.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더이상의 방법은 없어보였고 의미없이 시간을 끌고 싶진않았다.
그의 변명도 대답도 듣고싶지않아서 바로 차단했다.
그렇게 7개월 반의 연애가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