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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피난처

새로미 |2023.01.02 10:26
조회 151 |추천 2

8. 피난처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태복음 24장 15-21절의 말씀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이미 다 아시는 말씀이고 여러 번 읽으신 말씀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 뜻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다니엘 9장 27절의 말씀을 지칭하시는 말씀이다.

다니엘 9장 27절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한 이레 동안”

다니엘의 70 이레 중 이미 지나간 69이레를 뺀 나머지 7년 동안. 이 7년 동안이 바로 7년 환난 기간이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그가 곧 적그리스도가 이레의 절반 곧 전 3년 반이 지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제사 지내는 것과 예물 드리는 것을 금지시킨다.

“또 강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적그리스도는 차츰 그 포악성을 발휘하여 성전에서의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키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성전 마당에 미운 물건 곧 자신의 우상을 세우고 사람들로 그 우상에게 경배하게 한다.

자, 다시 마태복음 24장 말씀으로 돌아가자.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멸망의 아들 곧 적그리스도의 우상이 거룩한 곳 곧 성전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인가?

다음과 같은 자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1) 지금 이스라엘 영토 안에 있는 자들로서 그 때 곧 성전에 가증한 것이 섰을 때, 예수를 영접하고 666표를 받지 않는 자.

2) 이스라엘 이외의 땅에 사는 예수 믿고 666표를 받지 않은 이방인 구원자들. 이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이들이 있는 곳은 그 어느 곳이든 영적 유대 땅이다.

유대 =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땅 = 교회

유대 땅은 믿는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뜻하며, 영적으로는 신약 교회를 뜻한다.

따라서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이란,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이 섰을 그 때에,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66표를 받기를 거부하고 있는 마지막 때의 모든 믿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666표 받기를 거부한 성도들은 이제는 산으로 도망할 수밖에는 없다. 산으로 도망가야 산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산이 피난처가 아니라, 산에 피난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 산으로만 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산에 있는 피난처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사태의 긴박성을 말씀하고 계시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미련이나 염려로 도망하는 것을 지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한층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지붕 위에 있는 자”

유대인들의 집은 지붕 위(옥상)가 편편하게 되어 있고, 그 옥상에는 골방이 있는데, 기도하는 방으로 사용한다. 지붕 위에 있는 자란 기도를 많이 하는 신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붕 위에 있는 자가 집안으로 내려가다 = 신령한 자가 세상의 염려로 그 신앙이 떨어지다.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물건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 신앙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밭에 있는 자”

밭에 있는 자는 농사를 짓는 농부이다. 농부는 주의 종을 뜻한다.

농부 = 씨를 뿌리고 가꾸는 자.

주의 종 = 복음의 씨를 땅(세상)에 뿌리고 가꾸는 자.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겉옷은 그의 신분을 나타낸다. 주의 종이라는 신분으로 인해서 산으로 도망가는 길에서 돌이키지 말라는 말씀이다. 주의 종이라는 신분이나 책임감으로 해서 믿음이 부족한 자들 때문에 지체하지 말고 빨리 도망가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실은, 성전 마당에 가증한 우상이 섰을 때, 시기적으로는 7년 환난의 전 3년 반이 지났을 때, 그때까지 666표 받기를 거부하고 피난처로 도망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집안에 있지 않고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이거나 밭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

집안에 있지 않고 지붕 위에 있는 사람

산에 가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집에서 사는 사람이다. 즉 우리들과 함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편안하게 집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지붕 위에서 사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의 육적 희노애락을 초월하여 기도와 간구로 높은 영적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집에 있지 않고 밭에 있는 사람

편안한 가정생활을 버리고 오직 복음을 위해 그때까지도 일을 하고 있는 참 주의 종이다. 여기서 주의 종이란 목사들이나 신부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가 목사건 뭐건 간에 상관없이 충실하게 주의 명령을 따라 주의 일을 하고 있는 자가 주의 종인 것이다. 말하기는 좀 거북하지만, 지금 주의 종이 아닌 목사가 너무나 많다. 이것을 알자.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피난처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말한 두 종류의 사람들뿐이다. 지붕 이에 있는 자와 밭에 있는 자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사람도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아야 하며, 겉옷을 가질러 돌이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아이 밴 자와 젖먹이는 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지붕 위에 있는 자와 밭에서 일하는 자는 산으로 가서 화를 면하지만,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는 둘 다 여자다. 여자는 교회 또는 성도를 뜻한다. 교회와 성도들은 성령과 하나가 되어 생명을 낳아야 한다.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신부로서 부족함이 없게 자라야 한다. 영이 성장해야 한다.

아이 밴 자는 이직 생명을 낳지 못한 상태에 있는 신도나 그런 교회를 뜻하며, 젖먹이는 자는 예수를 영접하여 생명을 낳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 영이 덜 자라서 영적으로 미숙한 성도나 교회를 뜻한다.

다 자란 사람들은 지붕 위에 있거나 밭에 나가 있다. 그러나 아직 자라지 못한 아이 밴 자와 젖먹이는 자들은 집안에 있다. 이들이 집에 있는 자들이다.

지붕 우에 있거나 밭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산으로 간다. 그러나 집에 있는 자들은 집에 있다가 화를 당한다.

우리는 지붕 위에 있거나 밭에 있어야 한다. 이들만이 환난 때에 피난처로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치한 어린이 신앙에서 빨리 벗어나 어른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겨울은 만물이 성장을 멈추고 겨울잠을 자는 계절이다. 또 구약의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날이다. 율법에 얽매어 꼼짝도 못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겨울에나 인식일”은 영적 잠을 자며, 신체적으로는 자유를 상실하고 있는 그런 상태, 좀 더 쉽게 말하면, 영은 잠이 들고, 몸은 종교적 계율에 의해서 자유로운 행동이 제약을 받고 있는 그런 상태, 말하자면, 눈은 소경이요, 몸은 종교의 계율로 그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이럴 때에 도망을 가야 한다면 아무도 도망을 못 갈 것이다. 그러므로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늘 기도를 해서 도망가야 할 때에 네 영적 상태가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7년 대환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7년 대환난은 창세 이래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그런 어마어마한 큰 환난이다. 따라서 살 자는 빨리 피난처인 산을 향해 도망을 가야 한다.

방주와 피난처

노아의 홍수 때에 만일 방주가 없었다면, 인류는 그것으로 완전히 종말을 고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들을 멸하시기 위해 지상에 40주야 비를 내리게 하였을 때에, 노아와 그 가족만은 방주에 들어가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제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 죄악 세상을 멸하실 때에, 당신의 택하신 성도들을 위해 방주를 예비하신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마련하신 방주가 바로 “피난처”인 것이다.

홍수 때에는 배가 피난처였지만,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시는 마지막 환난 때에는 “땅”이 피난처가 된다.

노아의 방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 방주로 인하여 노아와 그 일족이 구원을 받았고 그들의 후손들이 지구상의 인류가 되었다.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 사건을 통해 장차 우리 인류를 죄로 인한 사망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란 것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신다. 동시에 이제 마지막 환난 때에도 우리에게 방주를 예비해 주시고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 주시리라는 사실을 우리로 깨달아 알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 방주가 바로 피난처인 것이다.

노아에게 있어 방주는 그들의 생명이었으며, 이것은 장차 임하실 구주 예수의 그림자였다.

은혜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는 생명의 방주이다. 우리는 예수라고 하는 방주에 올라타서 죄악 세상인 물 속에 빠져 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방주 = 예수

방주는 노아와 그 일족을 구원했고,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다.

자, 생각해 보자.

노아는 방주라고 하는 물체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예수님(하나님 = 영)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

노아의 구원은 육신의 구원이었고, 지금 은혜 시대의 우리의 구원은 영의 구원이다.

노아는 나무로 만든 물체인 방주에 의해서 그 육신의 구원을 받았고, 지금의 우리들은 영이신 하나님(예수님)에 의해서 영의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마지막 때의 피난처는 육과 영이 다 보호를 받는 곳인 것이다. 피난처에서는 우리의 영이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도 적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노아의 방주에 의해서 육신의 목숨이 구원을 받았다. 은혜 시대의 우리는 예수를 믿어 우리의 영이 구원을 받았다. 피난처에서는 우리의 육신의 목숨과 영이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환난 동안에 피난처에 가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는 몸과 영 그 어느 하나가 죽어야 한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적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에 의해 육신이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육신의 목숨이 살기 위해 배도하여 영이 죽거나 해야 한다. 피난처에서만 이 둘이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환난 중 피난처에 가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서 환난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좀 더 많은 생각과 검토를 해 봐야 할 것 같다)

피난처는 어디 있는가?

피난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시편 61편 3절의 말씀을 읽어보자.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지금은 주가 나의 피난처이다. 나는 먼저 주에게로 피하여야 한다. 마지막 때에, 산으로 도망가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에 주를 나의 피난처 삼아야 한다. 그럼 피난처이신 주께서 나를 지켜 주시고 그리고 마지막 때에 나를 피난처로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피난처가 어느 산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주를 피난처 삼지 않고 오직 육의 눈만 가지고 피난처를 찾아가겠다고 이 산 저 산 찾아 헤매도 피난처는 찾지 못한다.

지금 현재, 피난처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다고 한다면 그는 가짜다. 우리가 피난처로 가야 할 때가 되면, 그때 성령께서 앞장서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갈 곳을 알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를 믿고 따라가는 자들만 피난처로 가게 하시기 위해서다.

피난처는 세계 각지에 아마도 여러 곳에 있을 것이다. 또한 피난처는 처음부터 여기다 저기다 하고 정해져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 이리저리 광야 길을 다닌 것처럼, 피난처 가는 방법도 그럴 것이다.

피난처의 모형

노아의 방주

노아의 방주는 예수님의 모형이며, 동시에 마지막 때에 있을 피난처의 모형이다.

노아의 홍수 때, 방주가 없었다면 육체를 가지고 살아남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류는 홍수를 끝으로 영영 멸망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만일 땅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우리 죄로 인하여 멸망 받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때에 피난처가 없다면 이 땅에 임할 대환난으로부터 살아남을 육체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멸망을 면하도록 홍수 때 방주를 마련하신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주신 것처럼, 마지막 때에는 우리를 환난에서 구원하시기 피난처를 예비해 주시는 것이다.

고센 땅

출애굽기 8장 21-23절의 말씀을 보자.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파리 떼”

환난 때에 있을 재앙의 한 모형.

“고센 땅”

마지막 때의 피난처의 모형. 이 세상에는 재앙이 내리고 있지만, 피난처는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내 백성과 네 백성”

하나님의 백성과 사단의 백성. 666표를 받지 않은 사람과 받은 사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별하여 피난처로 인도하여 보호하시고 사단의 백성들에게는 재앙을 내리신다.

출애굽기 11장 5-7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세상에는 창세 이래 전무후무한 재앙으로 인하여 대 곡성이 있지만, 피난처에는 개도 혀를 움직이지 않을 만큼 평온하다.

고센 땅은 마지막 때의 피난처의 모형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센 땅에서 보호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장차 피난처에서 그렇게 보호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신다.

아둘람 굴

사무엘상 22장 1-2절의 말씀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명 가량 이었더라”

다윗 왕은 사울 왕의 낯을 피하여 아굴람 굴로 몸을 피한다.

사울 왕 = 세상 왕의 모형. 또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의 사주를 받아 참 하나님의 종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어리석은 세상 왕의 모형.

다윗 = 적그리스도의 손을 피해 피난처로 가는 참 종의 모형. 믿는 자들을 피난처로 인도해 가는 참 주의 종의 모형.

“그 형제와 아비와 온 집”

예수 안에서 한 형제, 한 가족이 된 믿음의 식구들.

다윗과 한 형제가 되다 =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되다. 하늘나라의 한 식구가 되다.

다윗(예수)과 한 형제, 한 시구가 된 자라야 예수 재림 때에 휴거 된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원통한 자”

믿음으로 666표를 거부하여 세상에서 핍박과 환난을 당하던 자.

아들은 다윗을 따라온 자들이긴 하지만, 다윗의 형제나 아비 집 식구는 아니다. 이들은 예수님 재림 시 육신을 가지고 천년 왕국에 들어간다.

자, 이 문제는 뒤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학자들 중에는 도피성을 피난처의 모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민수기 35장 10-12절의 말씀을 보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도피성은 잘못해서 살인한 자가 복수자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성이다.

도피성은 예수님의 모형이다. 죄인이 도피성으로 피하여 목숨을 건지듯, 우리도 예수님에게로 피해서 죄로 인한 죽임을 피할 수 있다.

민수기 35장 28절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대제사장이 죽으면 살인자는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다. 곧 예수님이 죽으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고 본향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도피성은 예수님의 모형이지 피난처의 모습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소알성을 피난처의 모형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소알성도 피난처의 모형은 아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두 천사는 롯을 행해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롯은 겁을 먹고 소알성으로 가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결국, 롯은 유황과 불의 심판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두 딸과 함께 굴에서 살다가 딸들과 동침을 하고 불의의 자식들을 낳고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 때의 피난처는 성(城)이 아니다. 피난처는 도피성도 아니고 소알성도 아니다. 절대로 성이 아니다. 마지막 때의 피난처는 <산>인 것이다.

창세기 19장 17절의 말씀을 보자.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마태복음 24장 16-17절의 말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피난처에 대한 예언의 말씀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은혜 시대의 입장에서만 읽으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예언의 말씀은 그냥 놓쳐 버리고 말 때가 많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종말론적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읽어 나가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피난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시편 12편 5절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이 시편의 말씀을 단순히 은혜 시대의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한다면 어떤 해석이 나올까? 좀 어색하고 이상하다. 그러나 종말론적 입장에서 이것을 피난처에 관한 말씀이라고 본다면, 참으로 선명하게 그 뜻이 눈앞에 떠오른다.

“가련한 자의 눌림”

666표를 거부하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가련한 자들이 받는 억압.

“궁핍한 자의 탄식”

666표가 없어서 먹지 못하고 피해 다는 자들의 탄식.

“내가 이제 일어나”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역사를 시작하시다.

“그 원하는 안전지대”

그들이 가기를 원하는 피난처.

“안전지대에 두리라”

피난처로 가게 하리라.

“두리라 하시도다”

피난처로 가게 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이 시편 기자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시편 31편 20절의 말씀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주의 은밀한 곳이 어딘가? 저희를 비밀히 감출 장막은 어디인가? 바로 피난처가 아니겠는가?

또 시편 32편 7절의 말씀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은신처 = 피난처

다시 시편 59편 16절의 말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창세기 19장 15절 말씀에 보면, 동틀 때에, 곧 아침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소돔성을 떠나게 한다. 그리고 롯이 소알성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다. 롯이 소알성에 들어가자 하나님께서는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소돔과 고모라를 치신다.

아침은 땅이 받는 재앙으로부터 구원받는 시간이다. 우리를 피난처로 인도하여 적그리스도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높이 찬양하며, 우리를 괴롭혔던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을 갖가지 재앙으로 치시는 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노래하리니 이는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환난 날에 나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이다.

또 시편 46편 1-3절의 말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7년 환난 끝날 즈음부터 지구상에 대변혁이 일어난다. 지각에 대변동이 일어나고, 큰 지진이 일어나서 큰 산들이 바다 속으로 빠지고 바다 속에서 신대륙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피난처에 있을 때에 일어나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지구의 대재해로부터도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다시 시편 55편 2-8절의 말씀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원수 = 적그리스도

악인 = 거짓 선지자

광야 = 산 = 피난처

사망의 위험 = 그들의 말을 따르면 영이 사망하고, 그들의 말을 거역하면 육신이 사망에 이른다.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이런 사망에서 벗어날 길은 오직 하나 피난처를 향해 가는 것뿐이다.

이사야 26장 20-21절의 말씀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

밀실 = 피난처

분노 = 하나님의 분노

“분노가 지나기까지”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피난처에 들어가면 그때 그 하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들을 벌하시기 위해 재앙을 내리신다.

계시록 3장 10절의 말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시험의 때 = 7년 환난, 특히 후3년 반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세대주의 자들은 이것을 휴거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환난 전 휴거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휴거를 뜻하는 말씀이 아니라 피난처를 뜻하는 말씀이다.

이것을 휴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단지 시험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험의 때를 떠나 공중으로 휴거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휴거는 시험의 때를 면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시험의 때 곧 환난을 피하는 곳은 공중이 아니라 피난처이며, 휴거는 믿음이 완성된 성도들이 변화체나 부활체를 입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 휴거는 변화체 성도들과 부활체 성도들이 재림하시는 주를 영접하기 위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이지, 환난을 피하기 위해 공중으로 날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환난을 피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이 휴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휴거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주님의 고난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다시 말해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였기 때문에.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실험할 때를 면하게 하리니”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 위해 고난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 이미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또다시 그의 믿음을 시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피난처는 누가 가는가?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 자들만 갈 수 있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신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이 시험에 저서 모두 666표를 받고 명망 당하고 만다. 오직 소망을 하늘에 둔 자, 하늘에 속한 자들만이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고 승리하게 된다.

계시록 12장 6절의 말씀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도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그 여자 = 12장 1절에 나오는 해를 입은 여자. 마지막 때 곧 7년 환난 중에 있는 신령한 교회 또 성도들.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여자 곧 참 성도들이 광야 곧 피난처로 도망을 하매.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 1260일 = 7년 환난의 후 3년 반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후 3년 반 동안 신령한 성도들을 이끌어 들이고 그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양육하다 = 하나님께서 피난처에 들어온 성도들을 영적으로 키워서 천년왕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성도로 만드신다. 피난처에서는 천년왕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키우신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 = 피난처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환난 때에 우리를 양육하시기 위해 예비해 놓으신 피난처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으로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노아의 때와 같이

마태복음 24장 37-39절의 말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노아의 방주가 마지막 때의 피난처의 그림자라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그런데, 환난 전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노아의 방주를 휴거의 그림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며 세상살이에 정신이 없을 때, 갑자기 휴거가 일어나고 그런 다음에 7년 환난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노아의 방주는 노아 일족이 홍수라는 환난을 피하고 목숨을 건진 피난처인 것이다.

그럼, 앞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 보자.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인자 곧 예수님의 재림 때도 노아의 때와 같다. 어떻게 같은가?

그것이 다음절에 나온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이 말씀을 종말론 적으로 해석해 보자.

홍수 = 환난

노아 = 참 성도

방주 = 피난처

환난 전, 참 성도들이 피난처로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나 갑자기 환난이 닥쳐서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까지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이제 환난이 닥쳐와서 자신들이 멸망당하리라는 것을 참 성도들이 피난처로 떠나는 날까지 알지 못한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님 재림 때도 이와 똑같을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 곧 육신의 즐거움과 쾌락에 마음을 빼앗겨 환난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는 자들은 피난처로 갈 수가 없다. 아니, 피난처 같은 것이 있는 줄도 모른다. 혹 안다 해도 믿지는 안는다. 이들은 피난처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이어 마태복음 24장 40-41절의 말씀을 보자.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또 휴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밭에 있다는 것은 농사를 짓는 것이요, 여자가 매를 간다는 것은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다. 농사짓는 일과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은 늘 하는 일상사이다. 그러니까, 휴거는 환난 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 전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여자들은 저녁 식사를 위해 매를 갈 때에 갑자기 휴거가 일어나는 것이다”

듣기에는 그럴 사 하지만 물론 잘못된 해석이다. 성경 말씀이 그렇게 아이들 동화처럼 만만한 게 아니다. 성경 말씀은 언제나 그 말씀 속에 또 말씀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럼, 이 말씀을 해석해 보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여기 밭에 있는 두 사람은 농부가 아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고 가꾸는 주의 종을 뜻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주의 종이 아닌 진짜 농부들은 앞의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사람들 속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별히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고 그들과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은 이 두 사람이 단지 먹고 미시고,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 숫자적으로 2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두 종류의 주의 종들이란 뜻이다.

밭에 있으매 = 이 두 사람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 즉 복음 농사를 짓고 있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똑같이 주의 일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어디로 데려감을 당하나? 피난처로 데려감을 당한다.

같은 주의 일을 해고 있었는데도 누구는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누구는 버려둠을 당한다. 똑같이 하나님의 일을 해도 주의 마음에 합당하게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여자는 교회 혹은 성도들을 뜻한다. 매를 간다는 것은 곡식을 가루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고운 가루 =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돌은 예수님. 맷돌의 밑돌은 초림 예수, 윗돌은 재림 예수를 뜻한다.

우리 성도들은 나 자신을 맷돌에 넣어 가루로 만들어 하나님 앞에 화목 제물로 드려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나의 헌신이다. 우리 몸은 맷돌의 아랫돌과 윗돌 사이에 넣고 곧 초림 예수와 재림 예수 사이에서 가루가 되어야 한다.

매를 가는 두 여자 = 성도들을 가루로 만들어 주는 주의 종.

두 여자는 주를 위해 매를 갈고 있었으나 누구는 데려감을 당하고, 누구는 버려둠을 당한다.

왜 그럴까? 한 사람은 주의 뜻을 따라 매를 갈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뜻대로 매를 갈았기 때문이다.

42절의 말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 이 말씀은, 깨어 있으면 주가 오시는 날을 알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전혀 일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어떤 사람들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뜻은 기도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른 해석은 아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 중에도 너무나 깊은 영의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인가?

영이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영안이 열려 영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종말 때에 영을 분별하지 못하면 참 그리그도와 적그리스도를 분별 못하고,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 못한다.

말씀을 보는 눈이 깨어 있어야 한다. 바른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 말씀이 참 말씀인지 거짓으로 날조된 말씀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바른 말씀과 거짓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은 다 영의 눈을 감고 있는 자들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깨어 있어야 한다. 세계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도해 나가신다. 역사의 변화, 상황의 변화를 보며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종말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그것을 느끼기지 못하고, 또,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도 당장이라도 휴거가 일어날 것처럼 아우성을 친다.

영의 눈, 말씀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 이 셋을 크게 뜨고 주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깨어 있으며 어는 날에 주님이 오실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모습이 영안을 통해 심령 안에 느껴지는 것이다.

그 어린이의 부질없는 예언을 듣고 1992년 10월에 주님 공중 재림이 있다고 떠든 사람들은 영의 소경이었으며, 말씀 앞에 소경이었으며, 세상을 보는 눈이 소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소경들이 소경들을 인도하다가 모두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럼, 그때 그것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다 영의 눈을 뜨고 깨어 있었던 사람들인가? 아니다. 지금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며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또 많은 주의 종들이, 잠을 자고 있다. 영이 잠을 자고 있고, 말씀 앞에 잠을 자고 있으며, 세상 앞에 잠을 자고 있다.

롯의 실패

창세기 19장은 마지막 때를 위한 참으로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다. 창세기 19장을 읽고 있으면, 마지막 때에 있을 두 증인의 활약과, 죄악 세상의 멸망과, 피난처를 향해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은 의인이다. 그는 율법을 따라 성문에 앉았다가 두 천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다.

롯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충실히 율법을 지키려는 의인이긴 하지만,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을 떠나 물이 많은 동쪽으로 옮겨가다가 결국은 죄악의 도시 소돔까지 이르게 된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죄악 세상 속으로 우리를 빠지게 만든다.

창세기 19장 12절의 말씀을 보자.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밖으로 이끌어내라”

“그 사람들”

두 천사. 마지막 때의 두 증인의 모형.

두 천사는 롯에게, 네게 속한 자들을 데리고 성밖으로 도망하라고 이른다. 롯은 이 말을 듣고 그들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한다.

마지막 때에도 두 증인이 우리로 하여금 피난처로 떠나야 할 정확한 시점을 알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 즉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전해야 한다.

14절의 말씀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사위들”

성경을 끼고 교회엔 다니지만, 믿음은 없는 신자들. 이들은 종말론이니 피난처이니 하는 말을 하면 농담으로 여긴다.

15절의 말씀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롯은 찬사들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믿기는 했으나 그 말을 실천하는 데는 게을렀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가기가 쉽지가 않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데에는 게으르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나의 많은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믿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만, 자기 자신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데 게으르다.

16절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아직도 롯은 지체하고 있다. 두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며, 염려 때문이며, 자기 소유의 재물을 버리기가 너무나 아깝기 때문이다.

피난처로 가야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아무리 열심히 믿고 있어도 피난처로 가야 할 때 가지 않으면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믿음이 부족한 롯, 여러 가지 염려와 미련, 욕심 때문에 선뜻 피난처로 떠나지 못하는 롯을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천사로 하여금 그들의 손을 잡아 강제로 성밖으로 인도해내신다.

마지막 때에도 같을 것이다. 믿음이 적어서 선뜻 피난처로 떠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잡아 죄악 세상 밖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17절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이제는 자기 힘으로 도망을 가야 한다. 천사는 산을 향해 떠나는 것까지만 도와주시고 그 후에는 자기 힘으로 산으로 도망을 가야한다.

산이 피난처이다. 이 말씀을 믿고 일심으로 산으로 도망가야 한다.

“돌아보거나”

죄악 세상에 미련을 두거나, 재물이나 명예나 인정에 끌려 우물쭈물하면 안 된다.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피난처를 찾아 가다가 힘이 든다고 도중에 주저앉지 마라. 혹은 도시 근처에 숨어서 도시로부터 식료품이나 일용품을 얻으려고 하지 마라.

18-20절의 말씀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여기서 롯은 결정적인 실수를 한다. 자신의 믿음이 피난처에 갈 만한 믿음이 못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니”

그렇기 때문에 믿고 산으로 도망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롯은 반대로 산까지 갈 수가 없다고 말한다.

왜 산에 갈 수 없다는 건가? 도중에 재앙을 만나 죽을까 겁이 나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재앙을 피하게 하기 위해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롯은 반대로 재앙을 만나 죽을까 두려워서 산으로 도망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롯은 작은 성으로 도망하겠다고 말한다. 그 성까지는 가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산으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롯은 작은 성으로 도망하여야 내 생명이 보존되리라고 말한다.

이것이 롯의 믿음이다. 이런 롯의 믿음으로는 피난처에 갈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의 믿음은 피난처에 가서 보호받을 만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소돔성을 빠져 나오기는 했으나 산으로 가지는 못했다.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파괴된 후, 그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두 딸과 함께 산으로 가서 굴속에서 살다가 두 딸과 더불어 불의의 자식들을 낳아 이방 민족이 되어 구원에서 멀어지고 만다.

마지막 때에, 롯과 같은 믿음밖에는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마지막 환난 때에 죄악 세상에서 피난처를 향해 나오기는 하지만, 도중에 좌절하고 포기하여 피난처에는 이르지 못한다.

피난처에 들어가서 보호받은 성도들은 주님 재림 후 천년왕국에 들어간다. 롯처럼 죄악 세상을 빠져 나와 재앙을 면하고 육신의 목숨을 보존하기는 했으나 피난처에 이르지 못한 자들은 천년왕국 밖에서 산에 굴을 파고 짐승처럼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고 죽고 만다.

누가 피난처에 가는가?

누가 피난처에 가는가? 누가 피난처에 갈 수 있는가?

아모스 2장 14-16절의 말씀을 보자.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16절에서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날에는 아무나 산으로 도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자동차와 같은 빨리 달릴 수 있는 교통수단을 가지고도 피난처에는 갈 수 없다.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권력자들도 그날에는 그 권력이 피난처로 가는데 아무 힘이 되지 못한다.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용감한 자들도 그 용기를 가지고 환난을 피할 수 없다.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최신예 병기를 가지고도 환난에 대처할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민첩한 자나 몸이 건강한 자도 환난을 피하여 도망할 수 없다.

“말 타는 자도 피할 수가 없고”

특수한 기계 장비나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서도 환난을 피할 수 없고.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용사 = 하나님의 용사. 하나님 일에 용감한 자.

용사 중에 굳센 자 = 용사 중에서도 그 믿음이 더욱 굳센 자.

벌거벗다 = 모든 것을 다 버리다.

하나님 일에 용감한 용사 중에서도 그 믿음이 더욱 굳센 자가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피난처에 갈 수 있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 피난처로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용사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려가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17-18절의 말씀을 다시 보자.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벌거벗고 도망하라고 하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첫째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물질(선악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단의 시험에 빠져 범죄하고 에덴을 쫓겨났다. 이제 새 에덴인 천년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이겨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다 버릴 수 있는 자만이 피난처에 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둘째,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만 피난처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6장 30-3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피난처에 가면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여 무엇을 가지고 가려고 하는 자들은 믿음 이 적은 자들이며, 이방인들이다.

믿음이 적은 자들과 이방인들은 피난처로 가기에 합당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르므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벌거벗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를 피난처로 가는 길에서 막으신다.

마태복음 19장 27-29절의 말씀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은혜 시대가 가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이 되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예수님께서 천년왕국에서 왕의 자리에 오르실 때에.

“열 두 보좌에 앉아”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한 후, 예수님 재림 때 부활하여 천년왕국에서 왕권 성도가 되어 천년왕국의 열 두 고을을 다스리게 된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천년왕국에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얻게 된다. 예수님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들은 천년왕국에 들어가 왕권 성도가 되며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19장의 이 말씀 바로 앞에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나와서 묻는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그 청년은 말한다.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

재물이 많으면 예수를 좇을 수가 없다. 예수를 좇기 위해서는 재물을 다 버려야 한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십일조 내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만으로는 피난처에 갈 수 없다.

마지막 때에, 피난처에 가기 위해서는 모든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소유한 것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피난처로 가는 것을 포기한다.

마지막 때에, 부자는 피난처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마태복음 10장 35-38절의 말씀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아비나 어미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를, 진리를, 즉 예수를 멀리 하는 자는 예수를 좇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이다. 아들이나 딸 때문에 예수 좇기를 망설이는 자도 합당치 아니하다.

마지막 때에, 아비나 어미를 사랑하여 그들 때문에 피난처에 가기를 망설이거나 가지 못하는 자는 예수 좇기에 곧 피난처 가기에 합당치 아니한 자다.

마지막 때에, 아들이나 딸들이 붙들고 매달려서 피난처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아들과 딸이 그를 죽이는 것과 같다. 완수가 집안 식구들이다.

마지막 때에는, 의와 불의, 진리와 거짓이 가장 예리하게 대립해서 싸움을 하게 된다. 그때에는 진리 쪽에 서는 자와 거짓 쪽에 서는 자들 간에는 비록 그들이 형제, 자매,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서로 대적하고 서로 죽이는데 내어 주게 된다. 이때에, 믿는 자들은 자기를 대적하는 부모, 형제, 자매, 자식들을 버리고 피난처를 향해 떠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장 48-5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지막 때에는, 육신의 형제가 형제가 아니요, 육신의 모친이 모친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요, 나의 모친이다. 왜냐하면, 아들만이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참 형제, 자매가 되어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육친의 형제가 형제가 아니요, 예수 안에서 형제가 참 형제인 것이다.

앞의 35-38절 말씀 중에서,

자기 십자가 =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이 각자 예수님을 위해 저야 하는 짐이요, 고난이다.

짐 = 우리가 지켜야 하는 예수님의 계명(말씀).

고난 = 예수님의 계명(말씀)을 지키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으며, 그 고난을 인내하며 예수님을 좇는 자만이 예수 좇기에 합당한 자이다.

마지막 때에, 모든 소유를 버리고, 육신의 정까지도 끊고, 예수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며, 예수의 명령과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피난처 가기에 합당한 자이다.

피난처 가는 길

피난처는 어디에 있는가?

피난처로 가기 위해서는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현재로서는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산으로 도망해야 하는 시점에 대해서는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그 시점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볼 때”이다.

그럼,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어느 산으로, 어느 방향으로 도망을 가란 말씀인가?

계시록 12장 14절의 말씀을 보자.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그 여자”

12장 1절에 나오는 해를 입은 여자. 곧 환난 시대의 신령한 교회. 신령한 성도들.

“큰 독수리의 두 날개”

하나님의 큰 능력. 성령의 능력.

출애굽기 19장 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또 이사야 40장 30-31절 말씀.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다시 계시록 12장 14절로 돌아가서,

광야 자기 곳 = 광야에 마련된 피난처(광야 = 산)

그 뱀 = 사단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 환난 후 3년 반 동안

그 여자 곧 피난처 성도들은 피난처로 갈 때에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간다. 말하자면,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어 가게 된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 피난처에 갈 때에는 우리의 능력이나 지식을 가지고, 또 우리의 체력에 의지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성령의 이끌려서 가게 되는 것이다.

젊은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지만, 피난처 성도들만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달음박질해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도 피곤치 아니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 피난처까지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도 천사가 데리고 어느 순간에 피난처에 도착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노력하고 땀을 흘리기를 요구하신다. 구원도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요, 영생은 더구나 우리의 힘이나 땀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함 쓰고 땀 흘리고 노력할 때, 우리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19장 4절의 말씀

“내가 어떻게 독수리의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독수리 날개로 업어 광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광야로 나오게 하셨다는 말씀은 아니다.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였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발로 걸어서 광야로 결어 나왔고, 그들의 발로 홍해 바다 밑바닥을 걸어 홍해를 건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애굽에서 바로의 손을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고, 더구나 홍해 바다 밑을 걸어서 건널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의 발로 걸어서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 길을 걸을 때에, 몹시 힘들고 괴로웠을 것이다.

피난처 가는 길도 만찬가지다. 젊은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지만, 피난처 성도만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달음박질해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도 피곤치 아니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 피난처까지 갈 수 있다는 말씀은, 아무 고통도 없이 힘도 안들이고 갈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다만, 도중에서 좌절하거나 넘어지지 않고 어려울 때마다 새 힘을 얻어 피난처까지 갈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피난처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한 길일 것이다. 도중,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고 마실 물이 없어 고통 받기도 할 것이다. 도중에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말하며 낙오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차라리 되돌아가서 666표를 받고 잠시라도 편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고 되돌아가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다면 왜 우리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느냐, 하나님은 안 계시다, 우리는 속았다, 하며 되돌아가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피난처에 가는 노상에서도 참으로 천년왕국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을 구별하신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들 중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불평불만을 말하던 자들은 광야에서 죽고 나머지 사람들만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것처럼, 피난처 길에서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하며 인내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중에서 다 낙오되고,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킨 자들만이 피난처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만이 살아서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

사무엘상 22장에 보면, 다윗은 사울의 손을 피해 아둘람굴로 도망하여 그곳에 숨는다. 그러자, 그 형제와 아비와 온 집이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그에게로 왔고,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가 된다.

아둘람굴은 피난처의 모형이다.

그럼,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사울이 죽을 때까지 그 한곳에만 숨어 있었는가?

아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이리저리 계속 도망을 다닌다.

사무엘상 23장 14절의 말씀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19절의 말씀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24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 아라바에 있더니”

24장 1절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25장 1절의 말씀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 가니라”

다윗은 사울을 피해 계속 이리저리 장소를 옮기며 피해 다닌다. 그리고 그때마다 누군가가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에게 밀고한다.

피난처로 갈 때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 장소를 옮기며 도망 다녀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밀고자에 의해서 그 숨어 있는 곳이 당국에 보고되고 군대나 경찰에 의해서 추격을 당한다.

이때에는 누구도 피난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추격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을 다닐 뿐이다. 이때에는 장소가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님이 피난처인 것이다.

자, 다시 말하거니와 이때에는 “장소”가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님이 피난처인 것이다. 이때에는 어느 장소로 가야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잡혀 죽는다.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성령께서 적그리스도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

눈에 보이는 험한 산이 나를 지켜 주는 산성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산성이요, 나의 피난처인 것이다.

이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 무리를 이루기도 하고, 소수의 사람들이 작은 무리를 이루기도 하고, 또 여러 무리들이 도중에 하나로 합치기도 하고, 혹은 여러 무리로 분산되기도 하며 길을 갈 것이다.

도중, 고통을 못 참고 낙오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믿음이 부족해서 포기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또 잘못해서 추격대에 잡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피난처에 도착한다.

마지막 환난 때에, 우리 믿는 성도들은 다음의 셋 중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1) 배도

2) 순교

3) 피난처를 향해 도망

마지막 때에, 우리 믿는 자들은 666표를 받고 배도를 하든지, 아니면 666표 받기를 거부하고 순교를 하든지, 피난처를 향해 도망을 하든지, 셋 중 어느 하나를 택하여야 한다.

지금 셋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은 “도망”을 택할 것이다. 배도는 하기 싫고, 순교는 죽는 것이 두렵고, 피난처로 도망을 하면 육신도 살고 영도 구원을 받으니까.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때가 되면 아마 대부분은 배도를 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뭐라고 말하든, 그때가 되면, 거의 대부분의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배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극소수의 사람이 순교를 하고, 순교를 하는 사람들 보다 조금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666표를 거부하고 피난처를 향해 도망할 것이다.

피난처로 도망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닌 것은, 피난처로 도망을 하기 위해서는 666표를 거부해야 하는데, 666표를 거부하는 것은 순교할 각오가 없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사람들이 666표를 거부하고 피난처를 향해 도망하기 시작했다고 하자.

이들 중에 일부는 추격대에 의해 잡히게 된다. 잡힌 사람 중 어느 사람은 끝까지 믿음을 지켜 순교를 하게 되고, 나머지는 배도를 하게 된다. 잡히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피난처를 향해 도망을 한다. 그러다가 다시 일부 사람들은 잡히게 되고, 잡힌 사람들 중 일부는 죽음이 무서워 배도를 하고 용기 있는 자는 끝가지 믿음을 지켜 순교를 한다. 용케 잡히지 않은 사람들은 계속 피난처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순교는 휴거되어 천년왕국에 왕권 성도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도망은 언제 잡힐지, 그리고 잡혔을 때 배도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도망은 순교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피난처까지 간 성도들은 순교한 것과 똑같은 상급인 휴거, 왕권 성도가 되어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는 누구나 순교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피난처에 가서 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잡혔을 때 배도를 할 가능성이 많다. 은혜 시대에는 순교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환난 시대에는 쉽게 순교할 수가 있다. 쉬게 수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환난 시대의 가장 큰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리라” (마 10:39)

휴거되는 자와 땅에 남는 자

계시록 15장 2절의 말씀을 보자.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불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곳”

불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곳 = 피난처

여기까지는 아무도 쫓아오지 못하며, 지상의 어떤 재앙도 여기에는 미치지 않는다. 불 섞인 유리 바다가 그들과 인간 세상을 구별하고 그들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이곳에 도착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앙하며, 하나님의 양육을 받으면서 오직 신령한 기쁨으로 충만한 나날을 보낸다.

그들은 마치 천년왕국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영적 상태가 된다.

계시록 12장 14절의 말씀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광야 자기 곳 = 피난처

양육 받다 = 영적이 양육을 받다.

홀연히 번화 받아 변화체를 입고 휴거되도록 영의 훈련을 받는다.

환난전 휴거론자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 오실 때 우리의 이 육체가 그대로 휴거되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광야 자기 곳에 가서 영적 양육을 받아야 우리의 육체가 변화체를 입을 수 있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순교한 자들은 일단 그 몸이 죽었다가 부활해서 휴거된다. 또 그때까지 육체로 살아 있는 자들은 일단 이 세상을 떠나 피난처에 들어가서 영적 양육을 받은 후에야 비로써 주 재림 때 변화체를 입고 휴거되는 것이다.

불 섞인 유리 바다 피난처까지 이른 성도들은 이곳에서 지상의 모든 환난과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의 양육을 받다가 주가 재림하시면 홀연히 변화 받아 공중으로 휴거되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땅에 내려와 천년왕국에서 왕권 성도가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살아 있는 자의 휴거는 어는 날 갑자기 유체가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육체가 공중으로 휴거되기 위해서는 마지막 때에 광야 자기 곳 피난처에 가서 영의 양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환난전 휴거를 주장하면서 이렇게 설교하고 있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나는 후거 된다, 나는 꼭 휴거된다, 하고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휴거되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사람은 휴거되지 않습니다. 휴거되지 않으면 이 지상에 남아서 그 무시무시한 재앙을 받아야 합니다. 믿습니까?”

휴거는, 휴거된다고 믿는 사람이 휴거되는 것이 아니라, 휴거될만한 믿음에 이른 사람이 휴거된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후거 될만한 믿음에 이른 사람이란, 순교한 사람과, 마지막 때에 피난처에 가서 그 육신이 변화 받을 수 있게 양육 받은 사람이다. 그 밖의 사람은 결코 휴거되지 않는다.

한편, 666표 받기를 거부하고 피난처를 향해 떠났으나 피난처까지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서 재앙을 피하다가 예수님 재림을 맞게 되는 성도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죽음을 무릅쓰고 666표 받기를 거부하고 피난처를 향해 떠난 성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도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때, 그때, 지켜 주시며 보호해 주신다.

유리 바다 피난처는 몸도 영혼도 함께 보호받는 피난처이며, 살아서 왕권 성도가 되는 성도들을 양육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성도들에게는 피난처를 향해 가는 도중의 그 곳, 그 곳이 다 피난처이며, 이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것이다.

이들 피난처에 이르지 못한 성도들은 주 재림 후에 육체를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육체 성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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