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슬픔
이병률
아이는 마당에 나와 흙을 집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흙을 털어넣습니다
아이는 꿀꺽 흙을 삼키고 나무 옆으로 기어가
나무허리에 자기 배를 문지릅니다
소화를 시키려는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웃통을 벗어던지더니
모래를 쥐어 얼마 안 되는 배꼽에 채워넣습니다
아이는 한참을 그러더니
그네에 앉아 거미줄을 올려다봅니다
감옥을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맨살에 가 닿자마자 피가 솟구치는
지구 저편의 소란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물살에 호청이 흘러가듯 창문 너머
아무것도 아닌 한 아이가 소문을 씻어내고 있습니다
마알간 잔을 들어 허공에 비춰보면
낯익은 무늬들이 허공의 편입니다
이면지를 들어 허공에 비춰보면
복도의 물기들이 허공의 편입니다
나는 누구의 편이 되어본 적 없는데
숲도 숲의 편을 들지 않았는데
편을 먹어 땅을 넓힌 족속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놀다 간 자리를 들어 허공에 대보면
눌린 솜의 결들도 허공의 편입니다
포도주로 벌게진 얼굴을 허공에 대보면
잔을 드는 사이 퍼졌던 소문들도 죄다 허공의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