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리에서
박남희
강처럼 다시 흐를 수 없는 발길을 이끌고 강으로 갔습니다
안개 낀 날만 무성하던 풀밭 사이로 혼자 흐를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강물이 흐릅니다 발 아래 풀섶 간지르던
바람도 햇살도 끝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 속으로 밀어넣으며 강은 또 무엇을 태우려 드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마을, 아침 저녁 안개만 저희들끼리 히히덕거립니다
이따끔씩 시커먼 기적소리를 매달고 흑백사진처럼기차가 사라진 뒤, 희뿌연 연기 뒤늦게 하늘로 오릅니다
말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 강둑 너머 그리운 꽃망울 터뜨리던 맨드라미 환한 눈시울도, 길섶 논배미 울리던황소울음도 꿈 속의 봇물 보듯 새삼 그리워집니다
긴 방죽을 따라 이삿짐 나르던 경운기 바퀴 깊게 패인 자국마다빗물이 고여, 여기저기 상처처럼 돋아난 질경이풀 무성합니다
애초부터 객지로 떠돌던 바람이 어디 있을까요
모처럼 잊혀졌던 사람들을 싣고 나룻배 하나 강물을 거슬러 오르다 잠시 오래된 풍물에 귀 기울입니다
강은 흐를 수 없는 것들의 억장 밑으로도 여전히 흐르고, 멀리 가물거리는세월 위에 내 마음 같은 물수제비 하나 띄웁니다
물밑에도가을이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