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삼순이 # 9
연희동 본가에 도착해서 큰아버지를 기다리기를 네시간. 다섯시가 가까이 되자 큰아버지가 들
어오셨다.
"흠..."
"오셨어요."
"언제 온거냐?"
"아까 한시 되기 전에 왔어요. 신우가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그정도 인내심도 없어서 뭐에 써먹어!"
"당신두 참..."
"들어오라고 해!"
큰아버지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넓은 벽면 양쪽에 빼곡히 들어선 책들이 분위기를 한층 더
가라앉게 만들었다. 답답한 이곳.
"앉아라."
"......."
"그래. 이제 뭘 해야 할지는 결정됐겠지?"
"......."
"니가 사업을 하겠다면 사업자금을 대어줄테고, 공부를 하겠다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도
와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싫다면 니가 하고 싶어하는 걸 찾아오면 무엇이든 도와주겠다고 했
다. 근데 왜 여태껏 말이 없는거냐?"
"......."
"아직도 윤준지 뭔지 하는 그 의사 때문이냐?"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뭐 때문이야?! 왜 아무것도 할 생각을 않는거냐?"
"하고 싶은게 없습니다..."
"하고 싶은게 없다니? 그게 말이 돼? 이도 저도 싫으면 예전처럼 그림이라도 그리란 말이야!!"
내가 그림 그리는 걸 반대하셨던 큰아버지였다. 우리집안의 유일한 남자. 큰아버지는 양자셨
고, 아들이 귀한 집안이라는 우리집안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큰아버지에게는 큰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과 작은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외동아들인 나...
"......."
"하긴 진혁이도 너한테 그렇게 관심이 없는데 니가 이럴만도 하지. 하지만 난 널 포기하지 않을
거다."
제발 포기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도 포기한 나인데 왜 날 포기하지 않으시려는지...
-똑똑-
"누구야?!"
"여보. 한사장님 오셨어요."
"한사장이?"
"네."
"알았어."
"하던 얘긴 다음에 하자."
큰아버지가 먼저 서재를 나가셨고, 내가 그 뒤를 따라 나갔다. 거실 소파에 앉아계신 한사장님.
승민이의 아버지다.
"어이구- 한사장. 바쁜 주말에 어쩐일인가?"
"의원님. 너무 오랜만에 뵙지요. 죄송합니다."
"하하하. 아닐세. 한사장 바쁜거야 다들 아는 사실인데- 우리나라 무역계에 일등 공신인 한사
장이 내집에 다 들르고 영광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드릴말씀이 없습니다-"
"하하. 앉지- 앉아."
"안녕하세요-"
"오- 이게 누구야? 신우아니야?"
"예."
"그래- 승민이 녀석은 어제도 너네집에서 있었다며?"
"예."
"하하. 어려서부터 단짝이더니 커서도 친하게 지내는걸 보니 기분이 좋구나"
"그게 다 승민이 녀석이 성격이 좋아서 아니겠는가?"
"아닙니다-"
"하하하"
큰아버지와 승민이의 아버지 웃음소리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집안 곳곳을 쩌렁쩌렁 울리게
했다. 본가에 오면 느끼는 거지만 어느 한곳 내가 서 있을 곳이 없었다. 한달에 한번씩 꼬박꼬
오지만 올때마다 더욱 낯설어 지는 이곳...
"신우야- 이리와서 과일 좀 먹으렴"
주방에 계신 큰어머니가 날 불렀다.
"앉아- 집에 아무도 없어서 심심하겠구나?"
큰어머니는 내게 아쉬울게 없을텐데... 내게 가끔 형식상 따뜻한 말을 건내기도 한다.
"아뇨-"
"아참- 얼마전에 알렉스 샵에 갔었는데-"
"들었어요."
"...그래? 어쩌면 그렇게 옷을 세련되게 만드는지- 내가 몇몇 사모님들한테 소개해줬지-?"
"그것도 들었어요."
"그, 그래?... 지연이랑 세연이도 늦고, 오늘따라 유나도 좀 늦는거 같구나..."
큰어머니의 딸인 지연이 누나와 세연이 누나, 그리고 작은어머니의 딸인 유나.
"제가 언제 유나 좋아합니까?"
"......."
"그만 가보겠습니다. 어차피 큰아버지 얼굴 뵈러 온건데 뵜으니 그만 가봐야죠- 그럼 한달 뒤
에 뵙죠."
식탁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갔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내가 와서 가족모임이 방해가 된 것 같구나-"
"그게 무슨말이야- 방해는 무슨- 한사장은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지-"
"죄송합니다. 약속이 좀 있어서-"
대충 고개를 까딱해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문을 닫고 정원으로 나오자 그나마 좀전까지 내
목을 조르는 듯한 답답함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젠장... 집에도 가기 싫었고, 그렇다고 말한대
로 내게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승민이냐?"
"어-"
"애들이나 모아-"
"어? 너 본가에 있는거 아니야?"
"나왔으니까 애들이나 모으라구-"
"알았어. 재현이네 클럽으로 모이라고 한다?"
"알아서 해-"
"OK-!"
"아. 선호도 불러-"
"선호도?"
"어."
"선호가 언제 우리처럼 노는거 봤냐-"
"그래도 불러. 꼭!"
"그, 그래- 한시간 뒤로 하자."
"OK-!"
핸드폰을 끊고 차를 몰았다. 선호네 집앞. 분명 애들과의 모임이라고 하면 선호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문열어-"
"어? 이시간에 왠일이야? 너 오늘 본가 가는날 아니야?"
"됐어. 준비나 해-"
"준비? 무슨?"
"오늘 애들이랑 좀 놀아 보려구-"
"애들? 내가 언제 그런데 나가서 노는거 봤어?"
"그러니까 직접 내가 오셨잖아-"
선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왔다. 삼순이. 삼순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갔어?"
"누구?"
"......."
"아- 삼순이? 자-"
"잔다구?"
"어."
"지금이 몇신데 잠을 자?"
"감기기운이 있어-"
"감기? 훗- 애는 애군."
"......."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빨리 나갈 준비나 해-"
"오늘은 진짜 안 될꺼 같은데-"
"왜-?"
"나 원래 그런 모임 안 좋아하잖아- 게다가 삼순이도 아프구"
"감기는- 자면 낫는거야. 저절로 낫는다구. 감기가 무슨 병이냐?"
"아픈거 말도 못하고 앓고 있었어."
"벙어린데 말 못하는거 당연한거지."
"왜 그런식으로 얘기해-"
"아 진짜- 그래서 안가겠다구?"
"알았어. 기다려..."
선호는 이내 방으로 들어가 나갈 준비를 하고 나왔다.
"가자-"
"나 정말 잠깐만 가는거다?"
"알았어. 알았다구! 자자- 가자"
선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마지못해 걷고 있는 선호를 끌고 나왔다. 정확히 한시간이 지났고,
녀석들은 하나둘 재현이네 클럽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누구긴 천하에 황보신우시지. 잘 지냈냐?"
"그럼- 도대체 천하에 황보신우한테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애들을 다 불러 모은거야?"
"글세- 이야- 이거 너무 한거 아니야?"
승민이 녀석이 서있는 클럽의 정 중앙으로 걸어 갔다.
"어 왔냐?"
"어... 이거 너무 한거 아니냐구?"
주위의 시선이 내게로 모아졌다.
"아무리 내가 주선한 모임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들 외롭게 온거냐?"
"그럼- 여성결핍증 환자 황보신우가 모은 자린데 어디라고 기지배들 끌고 오겠어?"
"야- 이거 너무 감동스러워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
"후훗-"
"그래도 이건 너무 삭막한거 아니냐? 평소 하던대로들 해라-"
"훗. 나중에 딴말하지 않기다-?"
"오케- 오늘은 미치도록 마셔보자- 즐겨보자구-! 오늘 주선자가 나니까 내가 쏘지!"
"오-오오-!!"
그리고 다시 한시간여가 지나자 안은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비슷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끅- 내가- 어?"
"취했다 신우야."
"아아- 안 취했다고!! 내말 좀 들어봐. 들어 보라구-!"
"승민아-"
"어 왜?"
"신우 취한거 같다- 집으로 가야 할것 같은데 니가 마무리 잘하고 우리먼저 들어간다-"
"그래- 알았다-"
"누가 취했다고 그래-! 내가 이깟 양주 한병으로 취할꺼 같애? 끅-! 안 취했다니까!!"
난 의자에서 일어나 바 테이블 위로 풀쩍 뛰어 올라갔다.
"자자- 이몸이 한말씀 하시겠다- 야야- 저자식 저거- 집중 좀 하라구!"
테이블 위에 있던 양주잔 하나를 들어 여자들과 얘기에 정신이 없던 한녀석이 있는 곳으로 집
어 던졌다. 물론 만취상태에 가까운 내가 던진 잔이 녀석에게 명중했을리는 없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다 모인건데-"
-드르르륵-
조용한 분위기 속에 테이블 위에 있던 내 핸드폰의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전화 온다-"
"뭐?
난 핸드폰을 받아 열었다.
"누구야-?"
"......."
"누구냐구!!"
"......."
"쉣! 장난 전화ㄹ..."
핸드폰을 닫음과 동시에 핸드폰 화면에 뜬 글씨... 분명 선호였다. 선호는 내 옆에 있음에도 선
호라는 글씨가 분명히 핸드폰 화면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몇번 흔들고 핸드폰을
열어 통화버튼을 눌러 목록을 보았다. 분명 선호라고 씌여있었다. 그리고 다시 통화버튼을 누
르자 02-####-#### 이라는 번호가 떴다. 선호의 집 전화...
좀전에 분명 내게 선호의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는데도 쉽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뭐야...
난 불안한 마음에 꾀 높은 높이였던 테이블에서 뛰어 내렸다. 물론 전화때문에 술이 좀 깨는 건
같았지만 양주 한병 반정도를 마셔버린 내가 평소와 똑같은 상태일리 없었고, 난 바닥에 고꾸
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난 아픈지도 어쩐지도 모른채 바닥에서 일어서 클럽을 뛰어나왔다.
"어디가-"
"신우야- 신우야-"
운전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정신은 드는 것 같았지만 아직 내 몸은 내 머리가 시키는 대
로 행동해주지 못하고 있었기에 난 보이는 택시를 잡아탔다.
"이촌동- 동부이촌동! 빨리 가란말이야!!!!"
택시 운전기사는 내말대로 정말 빠른 속도로 선호의 집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다. 물론 많이 늦
은 시간은 아니었다. 토요일 밤 10시. 차가 꾀 밀리고 있었다. 젠장- 다와가는데- 조금만 더 가
면 되는데-
"여기서 세워-!"
난 주머니에 있던 만원짜리 몇장을 꺼내어 운전석을 향해 집어 던지다 시피하고는 얼른 택시에
서 내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밀리는지 알수가 없었다. 여기서 선호네 집까지는 버스 두 정거장
정도의 거리. 난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픈거 말도 못하고 앓고 있었어.'
선호가 아까 했던 말.
'벙어린데 말 못하는거 당연한거지.'
이렇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나도 내심 걱정은 됐었던 듯. 아까 테이블에서 뛰어 내릴때 발목이
조금 삐었던 건지 달리고 있는 지금 발목이 조금씩 욱신 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취해있었
고, 무엇보다 삼순이가 걱정됐다.
"기다려- 금방 도착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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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늘은 커플들이 굉장히 즐거운 날이죠? 흠... 근데 전 아니기때문에...ㅜ.ㅡ 별로 즐거운 날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일요일 오전 내내 글만 쓰고 있었지요. 그래서 오늘은 두편을 올립니다.
내일 퇴근하고 저녁때 다음편 올릴게요. 답글 달아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의 시작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