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53. 꿀꿀이바구미 12장 (04-05)

마쉬맬로우 |2004.03.15 06:09
조회 386 |추천 0

 

12-4



드디어 놈이 마이크를 잡았다.



‘휘성의 안되나요? 얼씨구나, 한번 보자꾸나.’



잠시 후 노래가 시작된 지 30초만에 나는 세상이 참 살만한 곳이라고 느꼈다.


세상은 그다지 불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천상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감미로움은 원곡 버금가는데.


어린 놈이 무슨 한이 그리 많았는지.


정말 구구절절 자기 심정을 풀어내는 듯 했다.





안되나요 그대 이별하면 이제 그 자리에 내가 가면 안되요




순간 된다고 말해주고픈 충동이 들 정도였다.



‘멀대 수암 둘 다 가버린 자리를 네가 채우거라.’




아니면 그 사람 사랑하면서 살아가도 되요

내 곁에만 있어준다면




‘자랑하고 싶어 도우미를 자청했나봐.’



노래에 쫄아서는 예약 했던 내 노래를 슬쩍 취소를 시켰다.


내 아버님을 다음에 뵈면 가수를 시켜보라고 꼭 말하리라.


얼굴 없는 가수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은 잊지 않고.


놈의 다음 노래는 missing you였다.


수암과 함께 노래방에 가서 불렸던 노래.



‘그때는 몰랐지. 지금 이런 것으로 고민하며 도우미 노래에 처량하게 귀 기울이게 될지.’




한번만 내 맘을 들어줘

every day every night I am missing you

내 곁엔 없어도 다신 볼 순 없어도

언제나 내 맘엔 똑같은 너인걸




‘영어도 굴러가네.’



벽에 기대어 노래에 한껏 취했다.



‘오늘 안으로 결정해야 하는데. 누군가는 오늘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지.’



머리 아픈 사실들은 노래를 들으며 잠시 잊기로 했다.




노래에 열중해있는 진지한 표정.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남자는 꽤나 멋있어 보이는 법이다.


그게 단 한곡의 노래일지라도.


멋지긴 해도 다행히 남자로는 안보였다.



‘나에게는 관심도 없네. 다행이야.’



무지무지 커다란 안도감이 밀려왔다.


개미핥기에 대한 적의도 풀리고 좋은 노래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매니저를 해준다고 할까? 7대 3, 아님 5대 5? 일단 조그만 가요제에 내보내고 친척 결혼식 축가를 부르게 하고.’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음흉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박사님이 들어왔다.


평소 모든 이들이 행복한 연애를 한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지론을 펼치며 몸소 실천하고 있는 분.


무료 상담만 8년째 하고 있어 웬만한 이야기는 그분이 분류한 케이스에 들어간다고 하던데.


그러나 해박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자기 연애에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주리박사였다.


박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무지 한가했던지 정확히 20분만에 도착을 하였다.


츄리닝 차림의 꼬질한 모습이었다.



‘행색이 오늘따라 참 초라하구나. 단둘이 만날 때는 저 모양이라니까.’



뜻하지 않은 총각의 출현에 당황한 주리는 수줍게 얼굴을 가렸다.


저건 자기 관리가 아니라 순간 연기였다.


얼굴을 가릴 바에야 무릎 나온 츄리링을 가릴 것이지.


오늘 따라 심하게 나왔다.


주리는 얼굴을 가린 채 나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기집애야! 저 남자 누구야?”



남자 때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여기 노래방 사장님 셋째 아들.”


“남자문제로 힘든 건 알겠는데 이럴 때일수록 사람을 가려 만나야 되는 거야. 상처가 깊다고 아무나 만나면 안 되지. 물론 얼굴밖에는 못 봤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얼굴을 자세히도 본 모양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혼자 왔는데 갑자기 들어와서 나도 얼마나 놀랐다구.”


“놀랄 만 하네. 어쩐지 수준이 갑자기 떨어졌더라.”


“나쁜 애 같지는 않아. 그리고 우리보다도 어린 것 같고.”


“그래? 나 아직 연하는 못 만나봤는데.”



빛나는 눈빛.


저 눈빛이 무엇을 뜻 하는지 알고 있다.



‘개미핥기는 안돼. 내 너를 몸으로라도 막아서라도 여린 동생은 지켜내겠다.’



“그러지마. 착한 애 같던데.”


“네가 벌써 찜한 거야? 그럼 안되겠네. 남자보다야 우정이 먼저니까.”



‘언제부터?’



“아니라니까. 안 그래도 민국 오빠랑 여봉이 때문에 머리 복잡해 죽겠단 말이야.”


“노래방 재가 쏘는 거지? 그럼 그냥 재미있게 놀다가자.”



나온 참에 수암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역시 수암은 얼굴값을 하는 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구질 구질이라고 직접 말한 거야?”


“그렇대두.”


“의외다. 그렇게까지 말한 것 보면 네가 여봉이한테 간다고 해도 진짜 잡을 생각이 없을 거야.”


“...”



‘역시 그렇겠지. 농담이나 협박이 아니었어.’



“행복한 고민에 빠지셨군. 둘 다 만나. 뭐가 어려워?”



‘내 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너라면 능히 그랬을테지.’



“난 심각해. 정말 오늘까지는 마음을 정해야 할까봐.”


“막상 여봉이한테 가자니 아쉽지? 그런 오빠 만나기 쉽지 않지. 내가 다 아쉽다.”



‘약 올리냐? 그래. 아까워 죽을 것 같다. 이러다가 멀대한테 어이없이 차이고 갈 곳 없어진다면? 그럼 노래방 아들이나 만나면서 같이 가게나 봐야 하는 건가? 나 참 김칫국부터 마시는구나. 개미핥기가 날 좋아해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가고 있었다.



“누구를 택해야 한다니. 너무 머리가 아파. 정말 이대로라면 둘 다 보기 싫을 정도라니까.”


“너 첫키스는 누구랑 했어?”


“아직은 아무도.”


“어머나. 아무도 안해주디?”



‘은근히 무시하네.’



뭔가가 속에서 불끈 불끈했다.


당당히 아주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날 가만뒀겠니?”


“그랬는데?”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


“으. 쑥맥아. 또 내숭 떨었구나. 내숭은 떨데 떨어야지.”


“뽀뽀 얘기가 중요한 거야?”



‘기집애. 사람 심각하다는데 계속 뽀뽀 얘기는. 이걸 빌미로 다 캐 내겠다는 거야?’



주리가 날 놀리는 것 같아 은근히 기분이 나빠져 왔다.



“누구랑 했으면 좋겠는데? 잘 생각해봐. 그게 답이야.”



듣고 보니 그럴 듯한 말이었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쉽게 생각하라는.



‘내가 모르는 내 맘이 가는 곳을 알 수 있는 질문일 수도 있겠어. 역시 박사님이라니까.’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운 것 같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도우미 몇 살?”


“열아홉인데요.”


“그래. 노래해. 신나는 걸루.”



도우미를 다룰 줄 아는 주리가 신기해 보였다.


하긴 지가 도우미라고 들어왔는데 시키는 데로 해야지.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남자로 보고 있는 주리의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빠른 노래를 해도 정말 잘 부르네.’



“템버린은 잊었니?”



간주 도중 주리가 말했다.


정말 노래방 도우미를 했던 아이인지 템버린으로 장단 맞추는 것도 예술이었고, 시키는 것도 다 고분고분 들었다.



“동생 노래 퍼팩트!”



주리는 기립박수까지 쳐대고 난리였다.


자신의 츄리닝 상태도 잊은 채.



주리의 엥엥거리는 목소리가 노래방을 메우는 동안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우리는 곧 누나 동생하면서 친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민망한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



‘첫키스라면 수암이 낫지 않을까? 우선 비주얼이 되잖아. 수암이랑 나랑. 어머나 완전 영화잖아. 멀대는 키가 너무 커서 그림이 안나올 것 같은데. 거의 매달리면서 해야겠네. 누워서 하면 어떨까?’



순간 얼굴이 붉어져 왔다.


심장이 벌렁 벌렁.


그렇게 멀대와 수암이랑 너댓번, 대여섯번 뽀뽀를 하는 장면을 그려보는 중이었다.


주리가 내게 가까이 오더니 귀속말로 노래를 불렀다.



“키스해 주세요. 앞 이빨이 쏙 빠지도록.”



뭐가 재미있는지 꼬꾸라지게 웃고 난리였다.



‘마음의 결정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아 머리만 더 아프다.’


12-5


음료수를 벌컥 벌컥 들이켰다.


개미핥기의 노래가 또 시작되었다.



‘노래나 듣자.’



브라운 아이즈의 [For you]였다.





이젠 그만둬 또 내게 오는 일

항상 넌 언제나 그랬듯이


너 힘들어지면 또 나를 찾겠지

이제는 머물러 한 곳에 머물러 you know

니가 사랑할 사람 널 사랑할 사람 단 한명이면 돼


For you 돌아가줘 나로인해 사랑이

넌 더 쉬워진 것만 같아 take on your life

너의 사랑이 끝날 땐 왜 나를 찾아

니가 올까봐 나는 다른 사랑도 못하잖아




수암이 저런 마음이 아닐까 생각하며 노래를 들었다.


노래가 끝난 개미핥기는 울고 있었다.



“누나들은 이러지 마요.”



‘무슨 사연이 있나봐.’



자리에 털썩 앉아버린 모습이 너무나 측은해 보였다.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해.’



“주리야! 나 갈게.”


“어딜 가?”


“나중에 말해줄께.”


“그래? 잘 가.”



주리는 웃고 있었다.


화장실에 들렀다 미안한 마음으로 인사를 다시 하려고 보니 주리가 울고 있는 개미핥기를 위로하고 있었다.


개미핥기에게 상당히 미안했다.



벌써 저녁이 오려는지 어둑어둑해져가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또 마음이 바뀔지 몰라. 꼭 오늘 말 해야겠어. 오늘밤에 후회하더라도 주워 담을 수 없게 확실히 하고 와야지.’



도착한 곳은 멀대의 집앞이었다.



“여봉아, 나와. 할 말 있어. 너희 집 앞이야.”



나는 할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여봉아! 내 말 잘 들어.”



‘잘 들으랬지 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래? 꿈벅 꿈벅 감는 꼴이 꼭 소 같네.’



“아니다.”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 잘 나오지 않았다.



“뭐가 아니야?”



‘에에 그럴 줄 알았지. 궁금하지?’



멀대는 뒤돌아 숨을 고르는 내 팔을 잡았다.


표정 관리를 하고 돌아섰다.


역시 꽤나 궁금해 했다.



“눈 감아.”


“눈?”


“그래. 눈.”



‘시키면 퍼뜩 퍼뜩 할 것이지.’



멀대는 선 채로 눈을 감았다.



‘내가 때리기라도 한대냐 왜 이는 악물고 그래?’



많이 맞아본 자세였다.



‘목표점이 너무 높은 걸. 조준하고. 껑충 점프.’



“아얏!”



거의 뽀뽀가 아니라 부딪친 것 같았다.


그런데 약간은 슬픈 맛이 났다.



“미안! 아팠어?”


“아니. 안 아파.”



멀대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좋기도 하겠지. 입이 찢어지려고 하네. 그게 아니라 진짜 찢어졌나봐.’



“여봉아! 너 피나.”



멀대의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뭐 피?”



멀대는 피를 쓰윽 닦아내더니 자신의 피를 쳐다보았다.



“미안해. 괜찮아?”



상황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멋진 첫키스를 기대했건만 입술이 터져버리다니.’



멀대도 당황하는 눈치였다.



상황이 좀 정리가 된 후에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 이제 네 꺼 할게.”



약한 닭살 멘트.


멀대는 아까보다 더 커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쑥스럽잖아. 이 자식아.’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었다.



“너 나 좋아하지?”



‘오늘 날 잡았다구. 아예 못 박아 버리고 가겠어.’



“몰라서 묻냐?”


“만약에 내가 너 싫다고 민국 오빠랑 사귀니까 가라고 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따라갔지. 둘 못 사귀게 말려야지.”


“말린단 말이지?”


“네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건 못 보겠거든.”


“구질구질하게?”


“그래.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거다.”


“이쁜 놈.”



멀대의 볼을 사정없이 비벼주었다.



“이쁘면 아까 꺼 다시 제대로 좀 해줘라.”


“으이구.”



‘귀여운 놈. 완전히 빠졌 구만.’



“오늘은 그만 가야 돼. 내일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오늘 준비해야 되거든. 미안해. 이제 앞으로 자주 볼 거잖아.”



“그래. 알았어.”



수암 없이 혼자 해결하려면 해야 할 일들이 정말 많았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