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라는 여자를 만난 건 노란색 조명 빛이 은은하게 풍기는 술집 앞에서였다.
가끔 가는 술집이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나는 늘 그렇듯 창문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러니까 멍하니 있기에 좋은 곳이었다. 창가 테이블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건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오후 아홉시쯤이 되면 거나하게 취한 자들의 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씹기 좋은 안주 하나에 소주 한 병. 술은 잔에 따르지 않고 병째로 마시는 것, 내 오랜 습관이었다. 목구멍으로 알코올이 구석구석 스며들 때마다 나는 작은 짜릿함을 느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순간부터 나는 술에 절어 살았다. 아니, 나에게 무언가 있긴 했던가. 이제 와서는 내게 무엇인가가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거 놓으라니까요!"
나는 의식적으로 창문 밖에서 벌어진 광경을 목격했다. 드디어 시작인 건가? 설레는 마음에 소주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도 시선은 창문 밖에 뒀다. 와이셔츠가 절반 정도 벌어져 가슴팍이 보이는 남자가 여자의 가방을 쥐고 있었다. 남자는 술에 취한 건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을 헐떡이며 고함을 쳤다.
"내 돈 내놔!"
"저 아니라니까 왜 그러시냐고요!"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남자와 가져간 적 없다는 여자의 팽팽한 대립이었다.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통에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 때문에 창가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다툼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주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와 여자의 대립은 좀처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잘 들어보니, 계산을 마치고 나오다가 돈을 흘린 남자는 곁을 지나던 여자가 돈을 주워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여자의 입장은 달랐다. 사교모임에서 먼저 나오면서 술값을 일부 계산하려다가 모임원들의 만류로 그냥 나왔을 뿐, 과정에서 돈을 훔치거나 한 적은 없다면서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CCTV를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소주병을 든 채 남자와 여자를 보며 말했다. 남자와 여자의 시선이 서로에게 엉켰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맞아, 맞아,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남자는 어딘가 당황한 표정이었고, 오히려 여자는 당당한 말투로 가게로 가자면서 남자를 이끌었다.
CCTV를 확인한 결과 남자의 돈을 가져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남자가 계산하는 장면은 찍혔으나 돈을 떨어뜨리거나, 누군가 바닥에 있는 것을 가져가는 장면은 찍히지 않았다. 열댓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나가는 통에 유력한 용의자를 찾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남자는 창피한 나머지 여자에게 사과도 안 한 채 급히 자리를 떴다. 결말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탓에 사람들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흩어졌다. 제일 아쉬운 쪽은 나였다. 누구보다도 이 상황을 응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원래라면 나서지 않을 일도 나섰던 건데, 이건 아니었다.
나는 남아 있는 소주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고마워요. 도와주셔서."
누군가 내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조금 전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던 여자였다.
"아뇨. 몇 마디 말한 것뿐인데요, 뭐."
나는 진심을 감추려고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려보였다.
"괜찮으시면 저도 술자리에서 합석해도 돼요? 보시다시피 혼자라서."
"저도 혼자라 합석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요."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여자의 머리는 내 턱 아래에 간신히 닿을 정도여서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고, 나는 무언가라도 말을 하거나 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술은 제가 살게요."
그러면서 여자는 자신의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흔들었다. 황금색 지폐였다. 오만원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