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이 동식을 발견하고 옆에 와서 털석 앉았다.
정장 차림이거나 파티복인 사람들 사이에서 수완은 당연히 눈에 띈다.
“진토닉 주세요. 드라이 진은 조금만 넣구요.”
“저녁은?”
“당연히 자느라고 못 먹었어요.
이게 다 댁 덕분이죠.”
웨이터는 두 사람 사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자리를 피한다.
“삼촌과 죽이 잘 맞더군.”
동식은 수완을 쳐다보지 않고 말을 건넨다.
“하.... 그게 죽이 잘 맞는것으로 보이던가요.
난 오늘 사업은 이겼지만, 회장님께는 졌어요.”
동식은 위스키와 얼음이 들어있는 언더락 잔을 돌린 후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연다.
“삼촌이 사내 변호인단을 이용해서 공증 서류를 작성했어.
내일이면 우리 둘 다 거기에 싸인하게 될꺼야.
어떻게 생각하지?
수완씨 부모님은 딸의 약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비밀로 넘길건가?”
갑자기 수완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이거 유감이네요.
아버진 어머니와 이혼 하신 후에 어디에 사시는지도 몰라요.
어머닌 재 작년 가을에 돌아가셨죠.
갑상선 암이었어요. 그리고 전 외동딸이죠.
결과적으로 가까운 가족이라고 부를 사람은 없어요.
이제 궁금한 것이 다 풀렸나요?”
수완의 얼굴은 비참하거나 슬픈 표정도 아니다.
마치 모든 것을 초탈하였거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다.
동식은 그런 그녀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을 몰랐군.”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위로의 말이라고 했지만,
하고도 본인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다.
“아뇨.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왜 저를 보자고 하신거죠?”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수완은 얼른 화제를 돌리고 말았다.
“당신이라면 내일 삼촌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군.”
“날 과대평가 하는군요. 난 그런 능력이 없어요.”
“삼촌은 당신을 신뢰하더군.”
“아뇨. 기업인들의 철칙은 그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다죠.
당신도 잘 알텐데요. 회장님도 마찬가지죠.
단지 홀홀단신인 내가 회장님의 조건에 맞았을 뿐이에요.”
“당신은 이제 일이 끝났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고.”
“네. 어디로든 떠날 계획이었어요.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 들어가서 집시 춤과 플라멩고도 배울 예정이었죠.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요.”
수완이 잠시 말을 멈추고 맥주에 들어있는 토마토를 휘젓고 한 모금 마신다.
“외동딸이었지만, 세상을 살면서 무엇 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었죠.
3개월이 지나면 자메이카로 떠날 예정이에요. 킹스턴에 갈꺼거든요.
해변가에서 휴식을 취해야죠. 그동안의 잠깐 아르바이트로 생각할 거에요.
제가 회장님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면 아까 그렇게 했을테니까.”
수완의 단호한 눈길이 동식을 쳐다본다.
동식은 다시 한 번 호기심을 느낀다.
‘그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강하게 만든걸까......
크지 않은 작은 키에 체격도 작은 데 어디서 저런 고집이 나오는거지?’
“내일 공증 서류를 작성할 때 만나겠군요.
회장실에서 하는 건가요?”
“왜 집에서 살지 않는거요?”
동식의 질문에 수완이 조금은 당황한 눈치이다.
“음.... 집에 있으면 여러 가지 손을 대느라고 일을 하지 못해요.
청소와 빨래 등을 하느라고.....
내가 호텔에 사는거와 이 일이 관련있나요?”
“아니, 그냥 궁금했소. 살림에도 소질이 있나보군.”
“요리는 잼병이에요. 나머진 잘하죠.
설거지, 빨래, 청소 등...... 뭐, 그런거요.”
“외동딸치곤 의외로군.”
“친구들은 항상 외동딸이라고 하면 확인 사살을 했죠.
호적에 니 이름만 올라가 있느냐구요.
이런 것들은 다 오랜 객지 생활과 떠돌이 생활의 결과물이죠.
저에겐 집이란 의미가 없으니까요.
혹시...... 미국에 두고 온 애인이 있나요?”
“없소. 그런데 그건 왜 묻는거지?”
“그럼, 마약이나 기타 약물을 한 적은요?”
“내 정신과 육체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묻는거요?”
“그냥 궁금해서요. 몇몇 사람들은 그런 어두운 과거가 있잖아요.
아무튼 이미 시작되어 버린 일이에요. 어쩔 수 없죠. 잘해보죠, 우리.
이만 할 이야기 끝났으면 들어갈까 하는데요.”
“아직......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해 본 적은 있소?”
수완이 적잖게 당황한 눈치이다. 왼쪽 눈썹을 치켜뜨며 되묻는다.
“왜죠? 댁은요?”
“내가 먼저 물었소. 난 있소. 아니, 적어도 있었소.”
“그래요? 지금은?”
“없소. 있었다면 그녀가 당신의 역할을 했었을거요.
서로가 힘들지 않았겠지.”
“어련하시겠어요. 제 대답은 노 코멘트에요.
제 사적인 이야기를 아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군요.
그럼 내일 뵙죠.”
까닥 인사를 하고 멀어져 가는 수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동식은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노 코멘트라니...... 결국은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발끈하면서
자신도 애인이 있었다거나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었다.
솔직히, 동식 자신의 이야기도 반은 진실이고 반은 아니었다.
예전에 만났던 소수의 여자들은 진심이라고 믿었었다.
물론 처음 만나는 동안에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단순한 호기심과 미의 기준이었다.
마치 예쁜 인형이나 물건을 고르듯이.......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거나,
새로운 것이 나오면 교체하고 싶어졌다.
동식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여자들은 그랬다.
만약 누군가가 동식의 옆에 있었어도, 오늘의 수완을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말을 하는 수완의 얼굴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동식은 그녀가 과연 사랑이란 것을 한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