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환자를 지키는 전공의를 병원 밖으로 내몰지 마라
의대정원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한대장항문학회 대정부 성명서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지키고, 질병을 극복하기 위해 연구하고 교육하는 전문가 집단입니다. 미래 의료를 책임질 전공의들이 정부와 소통이 되지 않아, 환자 곁을 떠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입니다. 10 만명이 넘는 대다수의 선량한 의사들을 갑자기 의대 증원을 방해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몰아 세우는 프레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과학을 연구하고 지식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나라는 희망이 없습니다. 필수의료 위기의 본질과 해결책이 무엇인지 즉각 다시 논의를 시작하고, 전공의들이 병원 일터를 떠나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선택의 열쇠는 정부에 있습니다.
지난 2월 1일 발표된 의료인력 확충,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보상체계 공정성 제고 등을 포함하는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패키지는 책임 있는 대책을 내놓기 위해 노력하는 정부와 대통령실에 많은 기대를 갖게 하였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대장항문외과 간담췌외과 등의 외과, 신경외과, 심장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이 기피과가 된 것은, 1977년 건강보험 제도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합니다. 돈 없는 나라에서 건강보험을 도입하다 보니, 모든 병원을 건강보험 요양기관으로 강제 지정하였고, 수가는 원가의 70% 이하로 정했으며, 병원은 CT, MRI 등의 검사와 비급여 진료를 통해서 보상케 한 것이 현재의 필수의료 위기를 만든 본질입니다.
그동안 의료계 내부에서 비급여 진료 과목별 편차가 인기과와 기피과 차별을 낳는 원인이라 제기하였고, 불필요한 비급여 진료에 대한 반성과 자정 움직임이 있었으나, 의사대표단체는 이러한 자정운동을 이끌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정부대책이 비급여 관리체계에 대한 개선을 담고 있는 점은 의료의 지속성을 위해 필요한 부분 입니다.
그러나, 장천공 장폐색 등의 복부 응급수술을 최전선에서 담당하는 대한대장항문학회 2500여 회원은 2월 6일 발표된 정부의 2000명 의대 증원이 필수의료 위기를 개선하기 보다는, 인적자원의 쏠림을 가속화하여 국가백년대계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데,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첫째, 이 방안은 OECD 국가가 인구 천명당 의사 숫자가 3.6명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2.6명으로 미국이나 일본과 비슷하나, 고령화 속도가 빨라 2035년에는 OECD국가 대비 1만5천명 정도 부족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OECD 국가에 비해 의사 숫자가 적음에도, 기대수명, 영아사망률, 회피가능사망율 등 주요 의료질지표가 세계에서 가장 좋고, 외래이용횟수, 입원병상숫자, 수술대
기시간 등 의료접근성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 방안은 국민의 89%가 의대 증원에 찬성한다는 여론, 즉, 다수의 비전문가 의견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 정책은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납득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에 기초하여야 합니다. 최근 필수의료 위기의 중심에 있는 우리나라 외과계 전문의는 인구대비 OECD 국가보다 많습니다. 미국과 비교하여 외과 전문의는 1.7배, 산부인과는 1.6배, 흉부외과는 1.3배 많으며, 신경외과는 OECD 국가 대비 3.5배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전문의들을 증원하기 보다는 그 힘든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서도 다른 과로 개업하거나, 미용피부 등 개원가로 빠져 나가는 원인 해결이 우선일 것입니다.
셋째, 이 방안이 모델로 삼고 있는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등 유럽식 의료사회주의는 GDP의 11.9-12.9% (2020년 기준) 를 의료비에 쓰고 있지만, 수술대기시간이 3개월이 넘을 정도로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며, 의료의 질도 현격히 떨어집니다. 의료
의 질과 접근성이 떨어지는 나라를 왜 개혁의 모델로 삼는지 그 정책 의도가 걱정입니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들보다 적은 GDP의 8.4%를 쏟고도 이렇게 질 좋고 접근성 높은 의료가 가능하다면 단점을 보완하고 개선하면 될 것입니다.
망국적인 의대 열풍에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대 증원 2000명 확대가 의대 열풍의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의대 열풍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직업 안정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면서 심해진 측면이 있으나, 비급여
진료에 대한 국가방임이 결합되어 발생된 의료계의 상대적인 고수익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는 정책제도의 누적된 문제이지, 누구든 원할 수 있는 안정된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며, 의사의 개인적인 이기심 탓으로 치부할 수도
없습니다.
의대 증원의 파격적인 확대로 의사의 인기가 떨어지면, 의대 열풍도 해결될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이로 인해 의대 열풍이 더 심해지고, 이공계가 무너질 경우, 나라의 장래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의사를 필수의료 위기의 책임을 뒤집어 씌울 희생양으로 만들고 국민을 대상으로 불확실한 실험을 무자비하게 시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현재 목도하는 필수의료 위기의 해결은 쉽지 않은 일이나, 다음 세대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에 넘길 수 없는 과제입니다.
정책패키지에서도 일부 언급하고
있는 우선 세가지 과제의 해결을 요청합니다
첫째, 의료수가를 적정하게 보상해야 합니다. 요양기관을 강제로 지정하는 의료제도를 계속 존속하려면, 원가의 60-70%에 머물고 있는 보험수가를 원가의 100%는 되도록 수정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건강보험 재정에서 국고부담이 14%에 불과하지만, 의료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국민의료비에 대한 국가재정 투입이 OECD 국가는 평균 73%이고 심지어 미국도 43%에 이르고 있으나, 우리는 38%에 불과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적정수가가 불가능한 부실한 재정구조입니다. 일부 필수의료 등에 보상하는 정책가산금은 일시적인 해결책은 될 수 있을지 언정, 근본적인 해답일 수 없습니다.
둘째, 근거가 약하고 불필요한 비급여 진료는 학회에서 자정하고 국가에서 관리해야 합니다. 현재 필수의료 진료과의 기피현상, 대학교수의 개원가 유출, 초중고 학생의 망국적인 의대 쏠림, 실손보험 제도의 존립 위험에는 비급여 진료의 방임이
있습니다. 비급여 진료는 공개되고 투명해야 하며, 중립적 기구에 의해 관리되어야합니다. 야간 응급수술의 70%를 담당하고 있는 외과는, 매년 전공의 지원이 미달하고 있고, 전임의 지원 단계에서 편차가 더 심해져서, 비급여 진료가 많은 분과는 지
원자가 몰리는 반면, 야간 응급수술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대장항문외과, 간담췌외과,소아외과 등은 지원자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셋째, 소신껏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최근 소장폐색 환자에서 보존적 치료를 한 외과의사가 수술지연에 대한 과실이 인정되어 업무상 과실치상의 죄로 실형이 확정되었고, 심지어 항문 출혈로 내원한 환자의 사망사건에 대해 외과
의사가 법정 구속되어 의료행위의 불가피한 결과에 대해 사법부의 과도한 형벌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환자를 위해 최선의 치료를 선택하기보다 방어진료를 하게 되고, 어렵고 위험한 수술은 기피하게 됩니다. 최근 심장이나 폐, 신
장질환 등의 문제를 갖는 고령 환자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사망 사고가 나면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송 부담에서 벗어나 의학적 판단을 기준으로 교과서적인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절실합니다.
이번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방안은 묵묵히 의료현장을 지키는 전공의나 강의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병원과 학교 밖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무기는 환자에 대한 인술과 지식 뿐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설득과 대
화보다, 일단 정했으니 따라오라 하고, 명령에 응하지 않으면 최고 3년 이하의 징역, 사망사례가 발생하면 법정 최고형, 금고 이상형이면 면허취소 운운하는 복지부를 보며, 현재의 심각한 상황을 해결해 나갈 주무 부서가 맞는지 귀를 의심케 합니다.
대한대장항문학회는 필수의료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부와 대통령실의 진정성을 믿고자 하며, 건강보험제도 시행 이후 47 년 만에 모처럼 의료개혁의 철학과 방향을 제대로 잡은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의료개혁의 본질적 문제가 아닌 의대 증원 2000 명 확대에 묶여 절실하게 기다려 왔던 개혁을 좌초시키는 누를 범하지 않기를 강력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2024년 2월 19일
대 한 대 장 항 문 학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