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안된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우린
악신이지만 실제생활에서 직접 신을 겪어봄으로써
알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이 있는 것이란 신이 아예
없는 것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상황이 완전히 대 반전이 되는 것이다.
신이 있음으로써, 죽음에 대한 판단 역시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 또한
매우 다르게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죽으면 끝이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마음 먹으려 해도
안되는 것이며, 신에 뜻에 따라 살려면 자유가 제한되어진다.
다만 망나니처럼 사는 것만이 제한되어지는 것이므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어차피 감수해야할 것이니,
오히려 크게 걱정이 되진 않는다.
실제로 신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신을 믿어야 함을, 그리고 어떤 신을 믿을지
아직도 판단을 못할만큼 그만큼 멍청하지 않다.
전세계 1/2....
신이 있다는 것.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그 말은 꼭 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다.
죽음 후의 세상은 신이 있으므로,
신이란 실제로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진바와 다름이 없다.
우리나라에는 실제로 사람들을
괴롭히던 실제 악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으면 안된다.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신을 이제는 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시겠는가.
신이신데 말이다.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OECD회원국 중에
자살률 1위란 사실은,
이젠 우리의 사상과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다시 말하여 지고있는 중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다.
다음생, 즉 사후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후세계가 분명한데도,
이처럼 명확하다 못해 하얀 분필로 검은 칠판에 써 놓은 것처럼,
신은 분명히 있다고
확연히 구분이 된다.
신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악신이지만 신에 의한 고통은 너무나 컸다.
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은,
쉽게 죽음을 생각하거나 멍청한 짓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할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판단은 우리는 모른다.
물론 하느님의 판단을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는 모른다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도,
한걸음도 물러서지도 말고,
모른다는 중앙에 서서
모른다는 정답에 그대로
그 자리에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어야 한다.
“모른다는 것을 명확히 모른다”에 놓을 줄 아는 것도
하나의 지혜이자 명확한
게다가 너무나 정확한 판결이 된다.
거기에 즉, 모른다에 놓는게 더 정확하다는 말이다.
모른다에 놓는다고 절대 멍청한 것이 절대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그리고 분명히 자기자신을 매우 잘 아는
“지혜”라는 이야기이다.
모르는 것은 언제나 모른다에 있어야 한다.
이리저리 생각해보기는 하더라도
오뚜기처럼 모른다로
다시 원상태로 굳건히 세워져야 한다.
모든 생각을 깨끗이 지우고 모른다로 다시 돌아오라.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