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항상 구하라"는 방언은 신자의 차이로 말하고 있다.
까니
|2024.12.01 18:12
조회 49 |추천 0
우리가 십일조를 받아내는데 머뭇거리기만 하는가.
그렇다. 방언이라는,
성령이라는 거대한 힘을 이용한 적이 전혀 없던
여태까지는 그래왔으니까 말이다.
성경에 써 있음에도, 눈먼 사람처럼 이 구절을 들여다 보는 사람이 없었다.
적나라하게는
“그저 믿음과 천원이라는 돈”을 함께 요구하기에는
"성령의 도움없이" 요구하기에는 천원이란
매우 합당한 금액이기에 그렇다.
가난한 과부의 잘못된 해석이 아닐까....
십일조를 낼 믿음을 사람들에게서
거금을 받아내기에는
성령이라는 거대한 힘을 이용하지 않아,
산도 들어 바다에 옮길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이 없던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실재하지 않는 부재의 시대인 오늘날이라면,
“단지 성령의 활동만 잘 이용했으면 될 일이었다.”
개신교는 진작에 그러한 능력을 잘 활용해왔다.
개신교는 성령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렇다.
우리는 그동안 “항상 구하라”고 깊게 새겨진 성경구절을 개신교에 비해,
이 방언의 존재도 무엇때문인지 터부시해왔으며,
좋은 선교 수단이 될 수도 있었던 “이 방언이라는 수단”을
조용히 두고 사용하려 하지 않은 과거가 있다.
그렇다.
우리는 “항상 구하라” 했던 필수품인 방언의 존재를 감춰두었으며,
성령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활용한 적이 거의 없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없다”는 이야기이다.
개신교에 비해, 정식 가톨릭의 관례만을 준수해 왔다.
그것도 엄격히 말이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정적이고 엄중한 가톨릭은 개신교와는 다르다”는 시선과 함께
바라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보수적이라고 해야할까....
그러나 신에게 원하는 바는, 즉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종교는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교도 이루어지지 않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천주교도 이루어지지 않는데, 사람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이 둘 중이라면,
환생을 선택하겠는가, ㅈㅇ와 ㅇㄷ금지의 대표적인 종교를
선택하겠는가. 성령의 덕을 본 개신교로 가겠는가.
정적인 기도만의 천주교로 가겠는가.
이 환난의 시대에서 그나마 개신교는 큰 활약을 하였다...
성령의 덕으로. 성령을 잘 활용해서. 1000만....
방언 구하기를 “항상 구하라” 하신 성경말씀처럼,
사람들도 정적인 그리고 엄숙한 기존의 가톨릭의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 따위에는
너무나 관심이 없어, 종교는 더욱더 멀어져만 갔다.
개신교만 날로 커져나갔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듯이,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러한 사실을 아는 듯이, 성경은 방언을 “항상 구하라” 하지 않았던가.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방언”이 아니던가.
방언을 항상 구하라고 쓰여있지 않았단 말인가.
성령의 활동을 중점으로 발달한 개신교와
정적인 기도들로 무장하고 말하는 가톨릭과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지를
신이 밝혀진 지금에서는 살펴보아야 하지 않는가.
정적인 기도문을
“영의 언어로 말하지 않고 육의 언어로만 말하는 가톨릭” 말이다.
“육의 언어로 말하지 않고 영의 언어로만 말하는 개신교”였다.
신자의 차이로 증명되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그 “방언이라는 것”이
무조건 차이를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할 거까지는
없지 않는가.
방언이란, 성령이란,
영향력이 생각보다 매우 크기 때문이다.
성경에서조차 “항상 구하라”하시니까 말이다.
항상구하라....
무슨 생각이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