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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 21일 목요일...

약하게나마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인지 살포시 눈이 떠졌습니다.
여느 때처럼 반쯤 감긴 눈으로 시계를 쳐다보니 이제 막 9시를 지났습니다.
오늘은 목요일이기에 오후 늦게 강의가 있으니 다시 이부자리에 누웠습니다.
목요일...
목요일?
목요일?!
그러고 보니 오늘이 목요일이었습니다.
그녀를 본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흘렀습니다.
게다가 지난주처럼 밖에선 빗방울들이 서슴없이 떨어지고 있으니 불과 어제 잠들기 전까지
그저 스쳐 지나간 그녀에게 가졌던 설레임은 오늘따라... 그 어느 때보다 더했습니다.
지금 일어나서 부랴부랴 준비하고 일주일 전처럼 그녀를 본 그 시간... 그 장소로 간다면 그
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녀의 얼굴은 생생히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스쳐가기만 해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오뚝한 콧대와 티 하나 없는 뽀얗고 하얀 얼굴, 그 온화한 미소...
괜스레 내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문득, 그 사람에 대한 죄책감이 잠시 나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아직 첫사랑인 그 사람을 완전히 잊지 못했고... 아니, 그 사람을 완전히 내 기억 속에서 지
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람이기에 아직은 내 마음속 어딘가에 그 사람에 대한 미련이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것은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그 미련은 죄책감이 되어 내 가슴을 다시 설레게 했던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갈망
(渴望)과 맞물려버렸습니다.
"어떻게 하지...?"
잠시 복잡한 심정에 갈등도 했지만, 결국은 하나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내 마음은 그 사람에 대한 죄책감보다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갈망(渴望)이 더 크게 느껴
졌습니다.
게다가 어쩌면 이 기회로 얄팍하게나마 그 사람에 대한 죄책감이나 미련 따위를 버릴 수 있
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내게 그녀를 보러 가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목만을 불러 일으켰고 그 작위적인
명목으로 인해 지체된 시간으로 괜스레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서둘러 준비해도 그 시간... 그 장소로 가기엔 약간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방 청소는 물론 이부자리도 정리하지 않은 채 내 몸만을 치장하고는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를 다녀와서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한테 혼 줄이야 나겠지만 그것은 그녀를 볼 수 없
게 되는 사실에 비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기에 있는 힘껏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 갔습니다.

여전히 1시간 남짓하게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12시 47분이었습니다.
지난 주 그녀를 보았던 시간이 12시 50분을 조금 넘은 시간이었기에 최소한 12시 50분까지
는 그 장소, 교양학관에 도착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학교 정문에서 교양학관까지 3분만에 도착해야만 하는데 오늘따라 멀게만...
높게만 보이는 오르막길과 우산까지 들고 있는 상황은 절로 한숨만 터져 나왔습니다.
아니, 지금은 한숨조차 쉬는 그 시간조차 아까운 상황이니 숨을 있는 힘껏 들이키곤 우산을
치켜들며 무작정 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뛰는 동안 학교 정문의 오르막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우산을 치켜든 채 무작정 뛰어가
는 나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의아해하며 쳐다보겠지만,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내가
남의 시선 따윈 무시하며 뛴다는 사실은 내 자신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학교정문에서 교양학관까지의 3
분내의 레이스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하얀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이 어우러진 교양학관에 도착했을 때 나의 입에선 가픈 숨
소리가 쉴새없이 터져 나왔고 나의 얼굴은 물론 전신까지 땀으로 범벅인 상태였습니다.
비록 그녀가 나란 존재에 무지(無地)하다 할지라도 땀 범벅인 내 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
으니 우선 화장실에 들어가 커다란 거울에 내 몸을 비추며 급하게나마 손수건으로 땀을 닦
아내었습니다.
그때 강의실 곳곳마다 강의가 끝났는지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화장실로 들여왔습니다.
난 땀을 다 닦지도 못한 채 급히 화장실에서 나와 지난주 그녀를 보았던 그 자리에 이르자
지난주처럼 많은 학생들이 나를 스쳐갔고 이들처럼 어서 그녀도 나를 스쳐갔으면 하는 바람
에 괜한 설레임과 함께 우두커니 서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주하던 복도가 점점 한산해지고 이젠 나를 스쳐 지나가는 학생조차 거의 없는
데도 끝까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 설레임은 초조함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아직 9월초라 때늦은 더위와 비까지 내리는 축축한 날씨에 차마 불쾌한 기색은 감출
수 없음은 물론 온갖 인상까지 구기며 다시 맺히기 시작하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그 복도를
거닐었습니다.
그렇게 확신이 들어서 그녀를 보기 위해 그 사람에 대한 죄책감까지 외면하며 학교에 왔건
만, 기어이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로 파생된 아쉬움은 괜스레 복도의 끝을 지나 후문에
이르러도 지속되었습니다.
그 아쉬움으로 자연스레 나의 고개는 아래로 떨어졌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강의실의 뒷문을 지날 찰나였습니다.
"화장실에 갔다 가자."
그때 어느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여왔습니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인 듯한 여학생이 뒷문으로 나왔고 연이어 두 명의 여학생까지 더
나왔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나온 여학생 중의 한 명이 내가 그토록 보고자 했던 그녀였습니다.
난 소스라치는 감정을 억누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순간 내 몸은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는지
어떠한 미동조차 할 수 없으니 피하기는커녕 바보같이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있을 뿐이었으
나 다행히 나의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그녀를 포함한 그들에게 포착되지는 않은 듯 했
습니다.
지금 내 앞을 스쳐 가는 그녀가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그녀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
은 지난주 목요일에 보았을 때처럼 똑같은 옷차림과 무슨 재미있는 얘기라도 나누었는지 그
녀의 하얀 얼굴에 환히 번진 그 흐뭇한 미소였습니다.
또한 나의 가슴을 다시 설레게 만든 그녀의 아름다움이 존재하기에 그녀가 지난주 나를 설
레게 만들었던 그녀임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더구나 지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를 이토록 가까이 봤으니 이젠 좋지 않은 내 머릿속
에 그녀의 모습을 확연히 각인(刻印)시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이런 환희(歡喜)도 잠시... 또 지난주처럼 그녀는 친구들과 나를 스쳐갔습니다.
나의 몸은 그녀가 완전히 스쳐 지나고서야 다시 움직일 수 있었고 좀 더 확실히 그녀의 모
습을 각인(刻印) 시키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모습이 아스라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만
보았습니다.
물론 내 마음속 어딘가는 당장이라도 뒤쫓아가 그녀에게 말이라도 붙여보려는 무모함이 존
재하지만 아직 그녀에게 다가서기에는 너무 이른 감도 있고 아직은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
족하기에 지금은 그런 무모함을 단념한 것이 옳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직은 그녀에 대한 마음이 순수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녀를 생각하고 바라볼 때면 그 사람에 대한 죄책감이나 미련 따위에서 벗어날 수 있
다는 작위적인 생각이 내 마음 어딘가에 틀림없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지금의 이 감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면 최소한 그 사람을 내 마음속에서...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울 순 없어도 마음 한 구석 깊숙이 묻을 수는 있을 듯 했습니다.
하지만 차마 그런 불순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그녀에 대한 감정이 단순히 그 사람을 잊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내 자신 스스로가 내
감정에 신뢰할 수 있어 정말 사랑이란, 그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될 때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비록 나 홀로 하는 사랑하기에 힘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