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시간의 육체에는 벌레가 산다

누렁이 |2006.11.16 16:01
조회 24 |추천 0

시간의 육체에는 벌레가 산다

박주택

트럭 행상에게 오징어 10마리를 사서
내장을 빼내 다듬었다. 빼낸 내장을 복도의 쓰레기 봉투에
담아 한 켠에 치워 두었다. 이튿날 여름빛이
침묵하는 봉투 속으로 들어가 핏기 없는 육체와 섞이는 동안
오징어 내장들은 냄새로 항거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장마가 져 나는 지붕 위에 망각을 내리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헛된 녹음에 방문을 걸고 있을 때
살 썩는 냄새만이 문틈을 타고 스며들고 있었다
복도에는 고약한 냄새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방 안 가득 풍겨오는 냄새를 맡으며 냄새에도 어떤 갈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더 정확히는 더러운 쓰레기를 힘겹게 내다
버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과 싸우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복도의 문을 열었다
비가 멎고, 싸우고 난 뒤의 불안한 평온이
사방에 퍼져 있었다. 공기가 젖은 어깨를 말리고 있었다
발자국에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막 열쇠로 지옥 같은 문을 잠그고 돌아설 때쯤
핏기 없는 냄새가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무덤에서 냄새의 뿌리로 태어난 수많은 구더기들이
시간의 육체 속으로 흩어져 갔다

* 제5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