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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는 속도가 다른 삶 – 심판승의 오심을 뒤집고 싶다

기러기거부... |2025.08.26 11:01
조회 37 |추천 0
지극히 "내 기준"에서

깔끔을 넘어 결벽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서두 – 심판승의 오심



경기에서 실력보다 심판의 채점으로 승리하는 걸 ‘심판승’이라 한다.

내 삶에도 이런 심판들이 있다.

정리정돈을 빠르게, 자주, 눈에 보이게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게으르다고 판정을 내려버리는 사람들.



나는 위생에도 문제없고 나만의 질서와 속도가 있지만, 그들은 오직 자기 기준으로 승패를 가른다.

경기 시작 전부터 이미 ‘패자’로 기록되는 셈이다. 본인만의 "깨끗함은 곧 평화" 라는 종교적 신념으로 판정하는 이 경기, 이제 그 불합리한 심판승을 뒤집고 싶다.







제1장 – 지극히 내 기준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결벽증







변하지 않을 사람들아…

부디 단 한 번이라도 내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평생 이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적어도 인생에서 한 번 쯤은 이 생각이 스쳐 지나가게만이라도 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 역시 너희의 엄격한 정리정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번아웃 상태를 치료 중이라 내면이 매우 혼란스럽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정상적인 속도로 숨을 내쉬고 마음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에게

“주변이 너저분하다”라는 표정과 말투는 내가 먹어야 할 알약의 개수를 늘릴 뿐이다.

그 가느다란 눈빛과 두 눈 사이로 깊게 팬 세로 주름으로 나를 응시하며 얄미운 검지를 까딱이거나 때로는 불만 섞인 숨을 내쉴 때 내 마음을 더 옥죄는 심판봉 같다.







제2장 – 속도와 우선순위의 차이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있고, 우선순위에 따라 반응하는 대상과 결과물이 달라진다. 그런데 왜 그걸 오로지 자신만의 기준으로 강요하는가.



정리정돈은 나에겐 폭풍과도 같다.

수저 몇 벌, 그릇 몇 개는 열대저기압 수준이고, 큰 프라이팬과 냄비, 설상가상으로 씻을 여분의 가위까지 몽땅 사라져야 태풍으로 변한다.

그제야 나는 치울 이유가, 힘이 생긴다.



나는 정리정돈에 대한 기준이 낮은 편이다. 청결에 대한 건 캠핑장에서 세상 제일 혐오하던 바퀴벌레와 이틀 동안 동침한 사실을 안 날로부터는 더 자유로워졌다.

어차피 어디에나 나의 면역력을 시험하는 존재는 많다. 세상 모든 정리정돈이 해초의 해골물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나는 일상생활에서 벌레, 곰팡이, 심한 악취로 인한 불편이 생기지 않는 한, 적당히 치우고 귀찮은 소일거리는 좀 밀리는 게 좋다.

그리고 그런 일을 몰아서 하는 게 내 삶의 에너지를 아끼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자주 해라’, ‘그 때 그 때 해라’를 엄격하게 요구하면 점점 그 수위가 폭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보통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기준이 늘 의문이다. 정리정돈을 곧 ‘올바른 삶’의 척도로 삼는 문화. 그건 심판의 주관적 판정과 다르지 않다.



나에게는 나만의 속도와 기준이 있다.

그걸 인정해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평행선을 탈 것이다.



상대의 기준에서 그 너저분한 상태가

나에겐 인간이 머무른 흔적이고, 숨결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아무것도 없는 싱크대, 각 잡힌 책상, 이부자리는 마치 장례식을 치른 집처럼 느껴진다.

나는 정리정돈는 마음을 좀 먹고 우아하게 커피를 내리는 시간을 가지듯 마음이 여유로울 때 하고 싶다.



왜 인류는 정리정돈만큼은 ‘착하게 살아라’는 종교적 신념처럼 일말의 여유를 주지 않는 걸까?







제3장 – 배려라는 이름의 감옥







비를 흠뻑 맞고 싶은 사람에게,

“몸이 젖으면 찝찝하다”라는 본인 기분 때문에 왜 말도 없이 우산을 씌우는가. 그것이 진정한 배려인가?



안전할 것 같은 우산이, 오직 상대방의 키와 눈높이에 맞춰 내 시야를 가려버린다면 나는 더 답답해질 뿐이다.



“네가 안 하니까 내가 대신한다"라는 마음, 신경씀, 어쩌면 그 강제적 선의도 사실은 결국 네 눈앞의 너저분함은 정서적 안정을 해치기 때문이라는 걸 숨기고 단지 내 삶이 점점 나태해질 까 두렵다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나를 감싸는 것, 그 역시 배려가 아니다.

이 역시 오판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전 집주인을 떠올린다.

텃밭 흙이 바람에 주차장으로 넘어오면

아침부터 부지런히 쓸어 담아 다시 돌려놓던 모습.

그건 깔끔한 동네 환경 구축이라기보다 본인이 그 어지러움을 용서 못 하는 이유.



“나는 그냥 모두를 위해 치우는 거야.

바닥에 작은 흙먼지라도 남아 있으면 눈에 들어갈까, 차에 묻을까 불안해서 못 견디거든.

사실 나도 피곤하지. 나도 좀 쉬고 싶지.

그런데 내가 치우지 않으면 마음이 산산조각 나니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계속 치워야 해.

그러니 네가 게으른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야 버틸 수 있는 거라고.”



“그렇지만 그건 진짜 배려가 아니야.

아이..쯧..하며 한숨쉬고 쓸어담으며

네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나를 강요하는 순간, 그건 나에겐 폭력이지.”



서울서 월세 들어 살던 시절의 집주인과의 각종 이벤트는 나에게 이 정리정돈과 위생, 청결 분야의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제4장 – 정도의 문제인가, 기준의 문제인가









다들 프랑스 지하철은 매우 더럽고 지린내가 고약하다고 욕하면서도,

그들의 패션과 문화는 결국 지린내까지도 포용한다.

인도는 어디나 일관되게 더럽고 무질서하다는 이유로

늘 삶 전체를 ‘후진국’ 취급한다.



왜 어떤 더러움은 포용이 되고, 어떤 더러움은 끝내 용납되지 않는가.



처음 인도에 갔을 땐 이틀간 뉴델리 시내에서 과자 하나 못 먹었다. 심지어 미세먼지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였지만 며칠간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지독한 스모그, 자동차 매연, 소똥, 지린내와 길거리에 무분별하게 버려진 쓰레기들..좀처럼 그 환경이 용납이 안 됐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니, 완전 깔끔쟁이 친오빠도 어느새 원주민처럼 음료를 마시고 과자를 먹더라.



결국은 적응하고 정도의 다름을 인정하면 될 문제 아닌가.



나는 내 너저분함이 결코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면서 사놓고 안 쓰는 택배 물건이 집 여기저기 쌓인 적도 없고, 집을 너무 치우지 않아 해충에 노출된 적도, 먹을 접시·집기류가 부족했던 적도,

입을 옷이 바닥난 적도, 물건을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서 못 찾는 적도, 화장실 바닥에 검은 곰팡이가 핀 적도 거의 없었다.



그저 청소가 매우 완벽하지 않았을 뿐이다. 바닥에 미처 청소기로 빨아들이지 못한 머리카락 몇 가닥, 구석의 작은 먼지 뭉침이 있을 정도였고 내 방의 책상, 침대 헤드, 서랍 위 여기저기에 책 몇 권, 지갑, 옷가지 등 살면서 자주 건드릴 수밖에 없는 물건이 조금 늘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름의 질서와 규칙으로 그 자리를 채운다.



그 방에서 정리가 안된 물건은 내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존재라 자극이 아니다.

오늘 하루, 횡단보도를 지나가다 만난 사람을 다 기억할 수 없듯이 가끔 중요한 물건을 챙겨야 할 때만 잡아서 치운다.



하지만 도대체 너저분함, 게으름의 기준은 어떻게 정의되는 것일까.

나의 이런 삶의 방식은 누군가에는 한 숨으로 다가온다.



가장 억울한 순간은 설거지와 빨래를 맞닥뜨리는 순간이다.



세탁물이 세탁기의 3분의 2가 찰 때까지 하루 이틀 빨래를 기다리면 안 되나? 요즘 세제는 항균·소취 기능이 탁월하게 좋다.

빨래 후 건조기로 그 많은 빨래를 한 번에 돌리면 전기료도, 품도 아낀다.

일일이 빨래를 탁탁 펴 널고 도로 빼서 접고 정말 피곤한 에너지다.

그 시간에 나는 더 나를 챙기고 사색하고 글을 쓰고 싶다.



설거지도 마찬가지다.

식기세척기에 꽉 차게 모았다가 밤에 고온·고압으로 살균 세척을 하면 편한 건 덤이고 손 설거지보다 훨씬 더 깨끗하다.



하지만 현실은, 아침에 시리얼 그릇, 컵 두 개, 수저 하나가 싱크대 설거지통 안에 담겨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마치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누군가에게 대역 죄를 저지른 듯한 압박을 받고 설거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나도 모르게 후환이 두려워 후닥닥 해치운다. 하지만 하면서도 괜히 무언가 억울하고, 왜 이렇게 답답하게 살아야 싶고 나만 아는 소외감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제5장 – 치우는 속도가 다른 삶, 그 속도의 다양성









나는 일부러 ‘너저분해지려고’ 한 적은 없다. 그냥 한정된 에너지를 처리하는 방식이 다른 것뿐…

나는 내 방식대로 정리하며, 위생에도 큰 문제 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왜 반드시 각 잡힌 정리, 티끌 없는, 군더더기 없는 상태만이 정답이어야 하나?



“나는 정반대야.

빨래가 조금만 쌓여 있어도, 싱크대에 접시가 한두 개만 있어도

머릿속이 어지러워져.

그 순간부터는 아무 일에도 집중이 안 되고, 그릇 하나를 씻어내야만 마음이 겨우 정돈돼. 그래서 지금 당장의 빨래, 당장의 설거지를 끝내야 해. 그게 내 마음의 호흡법이고, 살아가는 리듬이야.”



서로가 그걸 인정해 주는 게 진짜 배려다. 그런 불안함을 이해하고, 난 여지껏 나름대로 치웠다. 노력했다.

다만 나는 변하지 않는 극한 논리 속에 번아웃이 겹치며 이젠, 그저 다른 편에 사는 누군가가 하루만 내 너저분한 맛을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는다.



번아웃은 질병이다. 힘들다.

눈으로 보이지 않아 공감이 어렵겠지만, 바로바로 못 치우는 것이 오히려 살아가는 힘을 준다.



그러니 나를 좀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봐 주길 바란다.



사실, 어느 날엔 내 스스로 자꾸 치우는 것을 미루다 보면 정말 삶이 나태해지지 않을까 반문하고 걱정했지만, 좀 쉬고 힘이 생기니 슬슬 ‘좀 치워볼까?’라는 마음까지 절로 생기더라.



그러니 너무 나의 에너지를 걱정하지 말고, 제발 내 회복에만 느린 리듬을 맞춰주길 간절히 바라본다.



지금은 정리정돈의 메트로놈이 서로에게 필요한 시대.



보통의 기준에서 당연히 K.O 패라고 여겨졌던 습관들,

평소 내리던 심판을 이젠 오심이라고 차츰 인정해 주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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