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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의 향기

쓰니 |2026.01.29 12:41
조회 756 |추천 2

“한번 봅시다.”
그 한 줄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울렸다.
지금쯤 영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하필 이 시간에, 왜 나한테.

여린은 침대 끝에 앉아 휴대폰 화면만 오래 들여다봤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오히려 불안했다. 답장을 쓰려다 지웠다. “어디세요?”도 지웠고 “무슨 일이에요?”도 지웠다. 너무 흔한 말은 저 사람에게 닿기도 전에 힘을 잃을 것 같았다.

결국 여린은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보내지 못한 게 아니라, 보내지 않기로 한 쪽에 가까웠다. 한 줄을 보내는 순간, 저 사람의 무게가 이 집으로 들어올까 봐 겁이 났다. 여린은 지금도 겨우 균형을 잡고 있었으니까.

여린의 하루는 알람이 아니라 발소리로 시작됐다.

“엄마, 양말.”
“엄마, 오늘 체육.”
“엄마아— 나 우유.”

초등학교 5학년, 4학년 형제와 일곱 살 딸. 셋이 동시에 말을 걸면 문장들이 부딪혔다. 여린은 눈을 뜨자마자 부엌 불을 켰다. 밥솥을 열고, 계란을 깨고, 김을 꺼냈다. 반찬통 뚜껑이 닫히는 소리, 컵에 물이 차는 소리, 젓가락이 그릇을 두드리는 소리. 이 집은 그 소리들로 굴러갔다.

아침밥은 늘 협상이었다.

“두 숟갈만.”
“진짜 마지막.”
“진짜 마지막의 마지막.”

아이들 가방을 열어 공책을 확인하고, 딸 머리를 묶어 주고, “오늘은 빨간 줄 없는 날” 같은 걸 몇 번씩 확인해 주고 나서야 여린은 현관문을 닫았다. 큰애 둘을 학교로, 딸을 돌봄으로 보내고 나면 차 안에서 딱 10초만 멈췄다. 멈추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미끄러질 것 같아서였다.

여린은 인천 변두리에서 독서지도사로 일했다. 학원가 한쪽 끝에 있는 작은 공간. 큰길에서 한 골목만 들어가면 조용해지지만, 오후만 되면 다시 사람들 발이 바빠지는 곳. 아이들이 책을 읽다가 갑자기 멈추고 묻는 것들이 있었다.

“선생님, 사람은 바뀔 수 있어요?”
“선생님, 어른도 울어요?”
“선생님, 엄마가 없으면 어떡해요?”

여린은 대답하기 전에 잠깐 멈추는 버릇이 있었다. 멈춤이 아이들에게는 허락이 됐다. ‘괜찮아, 말해도 돼.’ 여린은 쉬운 위로를 잘 못 했다. “괜찮아”는 괜찮지 않은 사람에게 가끔 너무 잔인하게 들리니까. 대신 질문을 했다. 부드럽진 않지만, 사람을 다시 여기로 데려오는 질문.

그날도 여린은 평소처럼 살았다. 수업하고, 장 보고, 저녁 만들고, 숙제 봐주고, 양치 시키고, 이불 덮어 주고. 딸은 잠들기 직전에 꼭 말했다.

“엄마, 내일도 책 읽어줘. 매일.”

“응.”

대답은 약속처럼 먼저 나왔다.

아이 셋이 다 잠든 뒤에야 여린은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화면을 켜자마자 그 문장이 그대로 있었다.

한번 봅시다.

잊은 줄 알았다. 그런데 반가움이 먼저 올라왔다.
그 반가움이 더 무서웠다. 반가운 마음이 생기면, 마음은 자꾸 용기를 가장한 실수를 하니까.

여린은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컵을 씻었다. 물소리가 조용히 났다. 그 소리만이 자기 편 같았다.

며칠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 오후, 도서관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겨울 끝자락의 바람이 얇게 얼굴을 스쳤고, 사람들은 각자 핸드폰을 보거나 장바구니를 들고 띄엄띄엄 걸었다. 여린은 무심코 도서관 유리문 쪽을 봤다가 발이 잠깐 굳었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왔다. 말끔한 코트, 단정한 셔츠. 그런데 옷보다 먼저 눈이 알아봤다. 피로가 얇게 깔린 눈빛, 어딘가 비어 있는 표정.

인호였다.

지금쯤 영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질문이 목까지 올라왔는데,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인호도 여린을 봤다. 사람은 기억 속 얼굴을 현실에서 마주하면 꼭 한 박자 늦게 멈춘다. 인호도 그랬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큰소리를 내면 무언가가 깨질까 봐 조심하는 사람처럼.

“오랜만이에요.”

여린은 고개만 끄덕였다. 반갑다는 말을 먼저 꺼내면, 그 말이 너무 가벼워질까 봐 삼켰다.

인호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문자… 봤죠?”

여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봤어요. 근데… 못 보냈어요.”

인호는 화내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냥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알아요. 답이 안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말이 더 무서웠다. 답이 없어도 보낼 수 있는 문장이라니.

여린은 결국 아주 현실적인 말로 문을 조금 열었다.

“저기요. 도서관 옆 카페.”
“근데 저 오래 못 있어요. 애들 픽업 시간이 있어서.”

인호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시간만.”

카페는 조용했다. 여린은 습관적으로 창가 자리, 그리고 문에서 가까운 자리를 골랐다. 앉자마자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지갑이 아니라 수첩이었다. 수첩에는 시간표가 빽빽했다. 여린은 펜 끝으로 줄을 짚으며 말했다.

“3시 40분, 큰애. 4시 10분 둘째. 4시 50분 막내.”

인호가 조용히 물었다.

“막내도… 학원 다녀요?”

“학원이라기보단 돌봄이요.” 여린은 웃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일곱 살은 혼자 못 두잖아요.”

그 말이 여린의 삶을 설명했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됐다.

여린은 메뉴판을 펴고 물었다.

“따뜻한 거 괜찮아요?”

“네.” 인호가 말했다. “따뜻한 걸로.”

커피가 나왔다. 김이 얇게 올랐다. 여린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끝이 조금 풀렸다.

인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영국에서 발표는… 했어요. 박수도 받고, 사진도 찍고. 다들 좋다고 하고.”

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축하가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인호의 목소리에는 ‘성과’가 있었지만 ‘기쁨’이 없었다.

인호가 낮게 덧붙였다.

“근데 끝나고 혼자 있으면… 확 꺼져요. 누가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여린은 바로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밥은 먹었어요?”

“…공항에서 대충.”

여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대충 먹은 날은요, 마음이 더 대충 돼요.”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여린이 살아오며 만든 규칙 같은 거였다. 인호가 아주 조금 웃었다. 이번엔 웃는 흉내가 아니라 정말로 아주 조금.

“이상하게… 설득력 있네요.”

여린은 컵을 내려놓고 인호를 똑바로 봤다.

“근데 왜 여기까지 왔어요.”
포장하지 않고, 핵심만 꺼냈다.
“영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인호는 테이블 나뭇결을 한참 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그날 문자… 보냈잖아요.”

여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봤어요.”

인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누굴 보자는 게 아니라… 제가 지금 어디 있는지, 한번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문장을 여린은 속으로 한 번 굴렸다. 도망이 아니라 확인. 그걸 알아차리자 여린의 얼굴에서 긴장이 아주 조금 빠졌다. 대신 여린은 더 정확한 곳을 찔렀다.

“그럼 지금… 인호 씨는 어디에 있는 것 같아요?”

인호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길어지려는 순간, 여린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학원 도착” 같은 알림이 떠 있었다. 여린은 습관처럼 손이 빨라졌다. 수첩을 덮고, 가방 안을 확인하고, 끈을 고쳐 매고, 그러면서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단 1분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몸짓이었다.

여린이 말했다.

“제가… 이런 상태예요. 대화가 끊기면 끊겨요. 계속 이어서 살 수가 없어요.”

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린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해요. 긴 얘기 말고.”
“오늘 여기까지 온 이유, 한 문장으로만요.”

인호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말하듯, 사실을 꺼내듯 말했다.

“저… 무너지기 전에요.”
“누가 제 얼굴을 한 번만 제대로 봐줬으면 해서요.”

여린은 그 말에 대답을 바로 못 했다. 너무 정직한 문장은, 대답을 고르게 만든다. 대신 여린은 딱 한 줄을 떠올렸다. 예전에, 웃자고 부른 노래에서 귀에 박힌 한 줄.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여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움이 목을 지나가며 말이 단단해졌다.

“그럼 봅시다.” 여린이 말했다.
“근데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대단한 거 아니에요.”

인호가 물었다.

“뭔데요.”

여린이 말했다.

“밥.”
“그리고 내일도 일상.”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예요.”

말이 끝나자마자 여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들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이제 가야 해요.”

인호가 급하게 일어나려 했다.

“제가 같이—”

“아뇨.” 여린이 잘랐다. 단호하지만 차갑진 않았다. “처음부터 그건 아니에요.”

여린은 한 박자 쉬고 덧붙였다.

“내일.”
“도서관 앞 벤치. 12시 10분.”
“제가 점심 도시락 먹는 시간인데… 그때 20분만.”
“그때 또 한번 봅시다.”

인호는 그 ‘20분’이 가진 의미를 알아듣는 얼굴이었다. 세 시간짜리 위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일정 속에 끼워 넣은 만남. 여린이 줄 수 있는 최대치.

“네.” 인호가 말했다. “20분.”

여린은 문 쪽으로 걷다가 멈춰 섰다. 그리고 아주 짧게 뒤돌아 인호를 봤다. 충분히 짧게. 그렇지만 분명히.

“인호 씨.”

“네.”

여린이 말했다.

“동그라미 말고요.”
“오늘은 얼굴로 버텨요.”

여린은 더 말하지 않고 나갔다. 문이 닫히며 작은 종이 울렸다. 인호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인천 변두리의 오후가 유리창 너머로 느리게 흘렀다.

그리고 인호는 아주 늦게, 한 번 숨을 내쉬었다.

그날 여린은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길에 생각했다.
20분짜리 약속이 너무 작아 보일까 봐 겁났는데, 어쩌면 사람은 큰 약속이 아니라 작은 약속으로 내일을 만든다. 적어도 지금의 여린은 그걸 안다. 아이 셋을 키우며 배운 건, ‘매일’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반복되는 아주 작은 행동이라는 사실이었다.

내일, 도서관 앞 벤치. 12시 10분. 20분.
그 20분이, 누군가에게는 내일의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추천수2
반대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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