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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금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까니 |2026.02.22 07:32
조회 28 |추천 0




하느님을 섬기는 세월이라는 양만이 많이 지났다고 해서,
무조건 많은 복을 주시는게 아닐까요.

라고들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사실 객관적으로만 본다면 세월의 양은
겉에 곧, 겉모습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까.

양이 많다고, 그 신앙의 질도 좋은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자세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하느님께서는
겉보다 속을 보시는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을

우리는 많이 듣고 또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겉인 양보다 속인 질이 최우선이자 그로인해
그 질로써 질이 높은 물건은 세상에서조차 값어치가 높게

자리잡듯이, 이 신앙이라는 것 또한 하느님께서는
겉만이 아닌 속을 보시기에, 인간이 섬기는 세월이라는 겉인 그

엄청난 세월의 양만을 보시는게 신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훨씬 하등한 창조물 인간이라는 존재가 보는게, 바로 그 시선이

이런 시선이란 말입니다.





속을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존재가
신이 아닐까요.

그래야만 인간하고의 차이가
여기에서도 분명히 인간이 신보다 낮다는 사실이

또 드러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께서는 속마음 중에 가장 깊숙이 있다는 속 중에 속, 곧
심연까지도 항상 겉모습을 보시듯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항상 자신을 망각하기에
이를 밥먹듯이 자주 합니다.





그러면, 왜 심연까지도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극심한 어려운 상황이 뻔히 보이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왜 바로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존재의 높이는 차원이 인간보다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그분께서도 우리가 원하는 기도를 항상
들어주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한다면, 즉 거룩한 사람이 되면

그때서부터는, 지금 성령회관에서 보이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강사들처럼 또는 그 은사자들처럼, 기도를 하면 바로 들어주시는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피땀을 흘리며 노력해야 할 뿐입니다.






그 차원이 극명하게 다른 하느님께서도
은사자들이나 다른 성령회관 강사들처럼

기도를 들어주시고 싶으신데,
우리는 나의 거룩한 영의 차원이 가꾸어지지 않았기에,

성경에서도 말씀하신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십니다" 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누가봐도 거룩하지 않은 당신이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합당하게 여기는것은, 오히려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십니다"가

성립하지 아니게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하느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엄청난 은사자들이나 성령회관 강사들처럼
그들의 공과 노력은, 아직 그들의 노력을 따라갈수 없는,

아직 그들처럼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당신이 자신을 바라보기에도 딱맞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이 같은 양떼인데도 거룩하지 않은 양떼도 많기에,
왜 우리 일반양떼들의 기도는 쉽게 들어주시지 않는가를

알려 주는 지표가 은사자들이나 성령회관 강사들의 경험담이
말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초반에는 그 은사자들이나 성령회관 강사들에게
중보기도로 악으로부터 하느님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나다가

자신이 지은 자신만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노력했었던 앞에서의 그들과
똑같은 공과 노력이 갗추어진다면,

그들처럼 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만큼의 공과 노력이 없기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음에 쓰여진 두가지로만 본다면
당연하다고 여겨야 하겠습니다.



첫번째, 하느님께서는 신 중의 신 이라는 위치만큼
차원이 다른 높이에 서 계십니다.


두번째, 우리는 아직 거룩한 삶을 산 적이 없는
아직은 전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에 해당합니다.




이 두가지 사실에서 보면,
우리가 기도를 드려도 원하는만큼 받지 못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차별이 아닌 당연하다"





오히려 그 은사자들이나 성령회관 강사들처럼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는 증거이며, 그럼에도

한가지 희망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비록 지금은
거룩하지 않을지라도 그 은사자들이나 성령회관 강사들처럼

똑같이 완전히 똑같은 공과 노력을 쌓는다면,
완전히 똑같이 된다는 희망에 있습니다.




"정의와 공정."
곧,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 거룩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완전히 그들과 똑같이 노력한다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드디어, 그들과 완벽히 같은 능력을 받게 되므로, 그때에는

그들처럼 성령을 자유자재로 다룰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 그들처럼 우리의 기도가, 완전히 기도 능력수준이
은사자들이나 성령회관 강사들처럼 똑같아지기에,

그들처럼 지극히 거룩하고 높으신 하느님에게까지도
예전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쉽사리, 하느님께 도달하여

우리의 기도가 그분의 면전에 올라가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항상 그들처럼 쉽게 이루어질수 밖에 없는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은사자들이나 성령회관 강사들처럼 공과 노력의 양이
완전히 똑같다면 말입니다.



어김없이 그들과 완전히 똑같이 그어떤 차별도 없이
그들과 같은 능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아니겠습니까.

아니라면, 신이라는 존재가 또는 신중의 신 이라는
하느님에 의해 칭조되어진 일반적인 신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는다는 망언을
지금 하시고 계시는게, 당신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그렇게 많은 시련과 고난으로 그리고
우리를 갖가지수많은 테스트로 신께서는 우리를

시험하기 위함이기도 한다는 사실은
당신을 위로해 당신을 인내케 할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존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하심도 일부 신의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우리는 이제 막 신앙태도를 진지하게 바꾸려하는
지금 막 시작한 초보이기에, 우리는 지극히 높은 차원의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만큼
우리는 전혀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게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겠습니까.





거룩하지 않다는 한 예로,
당신은 매일 봉헌금을 일정량 이상 바치거나,

십일조를 개신교처럼 바치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이 시련이 기간이 끝나면, 당신의 눈앞에 보이는
그 성령회관에서 성령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강사들처럼,

그들이 실제로 겪었던 인내의 시간을 꼭 거쳐야 한다는 사실은,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시라는 호칭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정이라면,
당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건덕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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