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한 유대적 관점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을 행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대교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악적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조상들이 저지른 죄의 짐을 지고 세상에 태어나지도, 그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죄(חֵטְא, chet)는 인간의 본성인 욕망(יֵצֶר, yetzer)이 올바르게 통제되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결과입니다.
'하테(חֵטְא)'은 문자 그대로 길을 잃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활쏘기에서 화살이 표적을 빗나갔음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이 죄의 개념은 올바른 길, 선하고 바른 것에서 벗어남을 시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가 사람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다고 믿습니다. 마치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본질적인 존재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필연적으로, 부도덕한 행위의 결과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행위 자체에 대한 죄책감뿐만 아니라 수치심까지 유발하여 죄인을 죄와 동일시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유대 사상에 따르면 죄는 영혼이 더럽혀지거나 부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원히 순수하고 부패하지 않는 자신의 본질과 상충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탈무드 사상에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일시적인 광기에 사로잡히는 순간이라고 현자 레이쉬 라키쉬(Reish Lakish)는 가르칩니다. “광기의 영이 그에게 들어가지 않는 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
죄는 우리 신성한 영혼에서 나오는 이성과 논리의 영적인 목소리를 차단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본질과 행복을 반영하지 않는 행위나 경험을 추구하는 데 우리의 능력을 이용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헛되고 무가치한 행위에 대한 어리석은 투자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규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은 언제나 순수 하고 신성합니다. 단지 우리가 그 본래의 상태를 존중하고 반영하는지, 아니면 폄하하고 모독하는지의 문제일 뿐입니다.
만약 악함이 우리 내면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면, 악인 자체의 소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이치에 맞겠지만, 유대교는 인류를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파괴될 수 없는 신성한 불꽃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악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그러한 부정적인 행동을 멈추면 그들의 본질적인 선함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죄악된 행동은 단지 내면의 신성한 빛을 가릴 뿐, 그것을 소멸시키거나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죄는 사람이 행하는 행위이지,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닙니다.
물론 이는 유대교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는 개인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창세기 7장): "죄가 네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네가 들어오기를 바라지만, 너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다. "
유대교에 따르면,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다가 우리가 방심하는 틈을 타 우리 삶에 침투하여 파괴를 초래하는 "어리석음의 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과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탈무드 속담에 따르면, " 문제는 쥐가 아니라 쥐가 들어온 구멍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교는 잘못된 행동 후에 흔히 따라오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행동 변화의 동기로 삼기보다는, 죄가 발생하기 전에 이를 예방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에 노력을 기울이도록 권장합니다.
사실, 하시딕 가르침에 따르면, 죄를 범한 후에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 그 자체가 일종의 죄로 여겨질 수 있으며, 이는 우리를 더욱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는 감정적 탐닉의 일종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부정적인 성향이 우리의 이전 행동에 대해 더욱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여 우울증, 절망, 무기력의 수렁으로 더욱 깊이 빠뜨리려는 계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실패를 용서받고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속죄일의 개념은 이에 답합니다: 그렇다.
이러한 개념들은 이미 성경 이야기들, 특히 토라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들,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그들의 죄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선지자들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됩니다. 이 기록들은 인간의 본성, 죄의 의미, 그리고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고찰합니다. 창세기의 초기 이야기들은 "사람 마음의 생각[יֵצֶר, 예쩨르]은 어릴 때부터 악하다"(창 8:21)라고 전합니다.
이는 유대교 랍비들의 개념인 예째르(יֵצֶר), 즉 인간의 본능적 충동의 근원이 됩니다. 이후 랍비들은 예쩨르 하토브(יֵצֶר הַטּוֹב, 선한 성향)와 예쩨르 하라(יֵצֶר הָרַע, 악한 성향)에 대해 논했습니다.
"용서" 또는 "사면"(히브리어 ס-ל-ח)이라는 단어는 금송아지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사하소서"(출애굽기 34:9). 정탐꾼 이야기도 비슷한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큰 자비로 이 백성의 죄악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이집트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참아 주셨듯이 말입니다" (민수기 13:5) .이 본문 뒤에는 속죄일 예배의 핵심 구절이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구한 대로 내가 용서하노라" (민수기 14:37).
이러한 서사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으로 확립합니다. 모쉐에게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심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에서보다 훨씬 더 완전하게 용서하시는 성품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강조하시며, "죄를 담당하시고" 벌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사랑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따라서 모쉐는 하나님의 본질이 절대적 존재와 절대적 자유뿐 아니라 근본적인 자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상세히 기술된 구절(출애굽기 34:6-7)이 대속죄일 기간 동안 용서를 위한 예배 의식의 초석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랍비 유대교에서 이러한 사상들은 하나님의 두 속성, 즉 정의의 속성과 자비의 속성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으며, 후자가 하나님의 활동에서 지배적인 양태로 여겨졌습니다. 『메실라트 예샤림(Mesillat Yesharim)』(18세기 윤리 문학 작품)은 자비의 속성이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즉시 완전한 벌을 내리지 않고 유예를 주시며, 회개할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악한 성향의 힘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의미라고 전합니다.
By Chabad.org
By Rabbi Dr. Reuven Ha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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