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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가요.”
“얘, 잠깐만.”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일어난 나의 손을 잡아 앉히려 하셨다.
“엄마!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일단 앉아.”
나보다 더 화가 나 계셨던 엄마는 돈 얘기가 나오자 화가 말끔히 가신 모양이었다.
“몰라. 나 갈래.”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언제부터 그런 사람에게 예의를 지켰다고. 나오자 혼자 두고 온 엄마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돈을 받아가지고 오는 거 아니야? 설마. 내가 없는 자리에서 설마 돈을 건네주진 않겠지. 엄마는 딸 혼사길 막히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머리에서 열이 나는 듯 했다. 머리도 그랬지만 가슴도 답답한 것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재무 자식 때문에 이게 뭐야. 열 나. 시원한 거라도 마셔야지.’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망고 맛이 나는 시원한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얼마에요?”
“칠백 원입니다.”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지갑에는 달랑 천원 지폐 한 장뿐.
‘어, 이거 사면 집에 못가잖아.’
“잠시 만요.”
음료수를 다시 냉장고에 넣고는 황급히 나왔다.
‘서럽다. 서러워서 살 수가 없구나.’
터벅터벅.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역까지 가는 것은 꽤 시간이 걸렸다. 좋은 동네라 좋은 자동차들도 눈에 많이 띄었고, 길에 있는 사람들의 옷도 모두 좋아만 보였다. 왠지 그 사람들에게 위축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참 동네가 틀리군. 엄마도 이런 기분 느끼며 사셨겠지. 그래서 아까 쉽게 일어나지 못 한걸 거야.’
엄마가 측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빠도. 항상 배고프다고 투덜대는 동생도.
‘천만 원이면 동생 먹을 것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지. 컴퓨터 할부금도 다 갚아버리고. 그리고 난 오십만 원만 달래서 핸드폰 사고, 옷도 사면 좋겠네.’
흔들거리는 지하철안에서 내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엄마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글쎄. 천만 원이 어디에요. 그걸 바로 내준다고 하는데도 싫다고 뛰쳐나간 거 있죠?”
“그래서?”
“그래서는요. 어쩔 수 없이 그냥 나왔죠. 얼마나 아깝던지. 실장이라는 사람이 잘 생각해보라면서 집에까지 데려다 줬어요. 당신이 혜림이 들어오면 말 좀 잘해 봐요. 아빠가 말하면 들을지 알아요.”
“알았어.”
‘내가 없는 동안 그런 모의를 하고 계시다니 너무들 하시네.’
“나 왔어.”
안방 문을 열고 인사를 했다. 엄마, 아빠는 갑작스런 등장에 약간은 놀라신 듯 했다.
“혜림이 왔니? 지하철 타고 온 거야? 힘들었지. 이리로 앉아라.”
엄마는 다정다감 작전으로 나올 모양이군.
“일단 앉아라.”
아빠는 평소보다 목소리를 낮추셨다.
‘흠. 이건 어려운 형편임을 어필하는 작전. 이젠 다 안다구.’
“너도 알다시피 말이야.”
예상이 맞는 듯 했다.
“알아요. 우리 형편 넉넉지 않죠. 그래도 재무 여자친구 흉내 낼 생각 없어요. 이만 가볼께요.”
이럴 땐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 사실 나도 유혹은 느끼고 있었지만 부모님이 너무나 적극적으로 나오자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가긴 어딜 가? 엄마 말 들어. 넌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는데 뭐가 문제야.”
“엄마는. 내가 친구들에게 놀림당하는 건 안중에도 없지?”
“근사한 남자친구 있다는데 부러워했으면 했지 누가 놀려?”
“자꾸 이러면 내일 당장 신문사에 가버릴 거야.”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아니, 저게 버릇없이.”
안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방으로 들어가 빨리 문을 잠궜다.
‘근사하긴 누가 근사하다는 거야? 나쁜 놈. 그 놈 때문에 가족들이랑 싸우기까지 하고. 경배랑 스캔들 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돈도 벌고, 이 기회에 친해지는 건데.’
갑자기 경배가 보고 싶어졌다.
‘사진이라도 봐야겠다. 어디에 있을 텐데.’
장롱 위에 앨범을 모아둔 곳에서 먼지가 잔뜩 묻은 경배의 앨범을 찾을 수가 있었다. 어릴 적 경배의 사진을 스크랩해 놓은 것이었다. 뽀얀 먼지를 대충 거둬내고 앨범을 펼쳐 보았다.
‘내 신랑 경배’라고 파란색 매직으로 쓴 문구아래에서 경배가 살포시 웃고 있었다.
‘지금 봐도 멋지구리하구나. 근데 오년 만에 어찌 그리 망가진 것이야? 한약을 잘못 먹은 게야?’
당시 경배의 인기는 대단했다. 여덟 살에 햄버거 C. F로 데뷔, 어린 나이에 어른스럽게 잘생긴 외모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냉정한 눈빛 연기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 후 몇 년간 더욱 잘생겨지는 외모로 어른 팬들도 상당히 많았었는데 사춘기를 보내면서 급격히 살이 찌더니 오늘 날에 이른 것이었다.
‘나는 살이 찌고 싶어도 안 찌는데. 만나면 뭘 먹고 살이 쪘는지 물어 봐야지.’
다음 장을 넘겼더니 경배가 모델인 햄버거 광고지와 ‘칠년만 기다려. 내가 이뻐져서 시집갈께’라고 쓴 문구가 보였다.
‘칠년이면 이제 이년 남았네. 이년 안에 이뻐질 수 있을까?’
어느새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아니야. 경배도 망가졌는데 이제는 내가 좋다고 하면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일단 좀 가까이 접근을 하자. 친해질 계기가 생겼으면 좋겠는데. 꼬리치는 방법은 우리반 미소에게 물어보자.’
경배의 생각으로 재무에 관한 생각들을 조금 잊을 수 있었다. 머리가 맑아지자 의욕이 샘솟으며 내일 국사 시험을 대비해 공부를 좀 해볼까하는 생각이 약간 들었다.
‘아니지. 이뻐지려면 빨리 자는 것이 좋겠어.’
잠은 미련스럽게도 빨리도 왔다.
“엄마! 도시락.”
아침 시간만 분주한 혜림양.
“먹어도 살도 안찌는 게 꼬박꼬박 밥타령은.”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엄마는 혼잣말을 하셨다.
“도시락 줘. 늦었단 말이야.”
“여기.”
엄마가 내미신 것은 도시락이 아니라 돈 삼천 원이었다.
“사먹어.”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도시락도 안싸주다니. 아예 단식투쟁을 해버려.
“차비도 줘야 돼. 교통카드 충천해야 된단 말이야.”
엄마가 건네준 것은 만 원이 아니라 백 원짜리 열네 개였다.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어디냐.
학교로 가는 지하철에 오르고 보니 도시락이 없는 게 영 허전했다. 안그래도 힘든데 엄마까지 내편이 아니니 마음이 허전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가벼우니 좋기만 하구나.’
괜히 지하철 안을 뛰어 다녔다.
이 칸에서 저 칸으로.
저 칸에서 이 칸으로.
‘어머, 내가 살 빠지게 무슨 짓이야? 에이. 이 참에 가출을 해버려.’
하지만 그러기에는 돈이 너무 없었다.
교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또 아이들의 욕이 끊이지 않았지만 한번 경험했던 일이라 그런지 어제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혜림이 재무 덕분에 아주 벽에 똥칠하며 살겠구만.’
“혜림아!”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평화가 느릿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불렀다.
‘다급한 일인가 보네.’
“이게 뭐야?”
책상위에 또 선물이 놓여져 있었다. 꽃향기가 나는 최고급 포장지로 싸인 상자였다.
“또 선물이 왔어. 풀어보자.”
선물 때문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좋, 좋은 거면 좋겠다. 빨리 풀어봐.”
평화는 설레임으로 말까지 더듬거렸다. 나도 은근히 기대를 하게 되었다.
“어머나!”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예쁜 상자 속에 피 묻은 마른 오징어가 살포시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