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 피레네
크리스토퍼가 이끄는 로엔의 기마대는 꼬박 사흘을 밤새다시피 하며 달렸다. 그래도 시간이 모자라는지, 크리스토퍼는 쓰러질 기색을 보이는 군사들을 거듭 재촉하며 강행군을 이어갔다. 상황이 그쯤 되자, 일행은 예상보다 이틀이나 빨리 목적지 근처로 도달할 수 있었는데, 지는 태양 아래 비친 피레네 대륙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 순간만큼은 곧 이어지는 피바람을 상기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투가 일어날 조짐은 보이지 않았고, 적들의 행방 또한 풍문에 의해서만 들릴 뿐, 확인된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날이 저물자 크리스토퍼는 주위를 냉정히 살펴보며 지형을 관찰했다. 이윽고 매복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군사들에게 막을 치고 하룻밤을 묶고 간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 소리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던 로엔군은 서둘러 짐을 풀고 그 동안의 굶주림을 해결하며 좋아하기에 바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드넓은 피레네의 평원에는, 잠든 로엔군의 숨소리가 차가운 바람에 휘날릴 뿐,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 곳에서 불과 십 리 떨어진 곳. 정체 불명의 두 사내가 낮고 음침한 목소리로 이 광경을 차갑게 보고 있었다.
“로엔의 원군이 왔군.”
- “몇쯤 되 보이지?”
- “삼천 이상은 안 되는 것 같네.”
- “그런 것 같군… 어서 보고를 하러 가세나.”
그들은 유유히 그 곳을 빠져나가 어디로 인가 향하고 있었는데, 차림으로 봐서는 그랑카 군의 정찰대인 듯 하였다.
“헉!”
로엔군의 진영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잠에 들지 못하는 이가 있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소년이었다. 그는 벌써 몇 번째나 악몽을 꾼 듯, 일어날 때마다 이마에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옆에 있던 키오르는 그 뒤척임에 잠이 깼는지, 피곤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또 악몽을 꿨니?”
그가 고개를 살며시 돌리자 아직도 반쯤 넋이 나간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소년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안쓰럽다는 투로 되물었다.
“말 좀 해봐… 도대체 무슨 꿈인데 그래?”
기억하기 싫은 듯 하였지만, 소년은 애써 안정을 되찾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젠… 그녀가 자꾸 나타나…”
- “예전부터 그랬잖아…”
- “이상해… 한동안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잠에 들 때마다 그녀가 보여…”
- “그랑카 군 때문에 긴장 한 탓이겠지…”
- “괴로워…”
- “…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나 소년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이에 그가 심리적으로 불안정 상태에 빠진 것이라 단정 지은 키오르는 어느새 깊은 잠에 다시 빠져 버렸다.
그렇게 잠을 도통 이루지 못하던 소년은 안중에도 없는지, 어느덧 해는 뜨고 있었다. 전날의 개운치 않은 기분을 씻으려는 듯, 소년은 누구보다도 빨리 채비를 마치고 말 안장에 성큼 뛰어 올랐다. 이어서 모두가 짐을 꾸리자, 여느 날과 다름없이 로엔 군은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피레네의 성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피레네의 영주 ‘후센’ 은 밝은 얼굴로 성문 위에 모습을 보이더니, 큰 소리로 그들을 반겼다.
“친애하는 크리스토퍼, 이제서야 오셨군요.”
- “지체 되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피레네의 후센 영주님.”
그 한마디가 오고 간 후, 후센은 다짜고짜 성문을 열어 주었다. 로엔이 자랑하는 기마대가 친히 오자, 피레네 주민들은 크게 마음이 놓이는지, 마을 전체에서 환호 소리가 끊기질 않았다.
그러나 헬리오의 영을 받고 온 크리스토퍼는 그들처럼 느긋한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었는지, 급히 회의를 열어 사태를 논의하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 동안 근심이 가장 컸던 후센 영주였다.
“아시다시피, 그랑카 군은 여덞 갈래로 대군을 나누어 슈델리안을 향해 진격 중 입니다. 그 중 하나는 이곳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하였는데, 이는 피레네가 비록 작지만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그들 또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 군사는 어느 정도라 합니까?”
- “정찰대에 의하면 삼일 전 그랑카 소속의 삼천 여 기마대가 ‘세누아 강’을 건넜다 합니다.”
- “세누아 강! 방금 세누아 강이라 하셨습니까?”
- “틀림 없습니다.”
- “전 속력을 다해 강행군을 한 보람이 있었군요.”
- “그렇습니다. 제 측근들은, 이제 하루 이틀 후면 그 병력 또한 여기 도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실로 간발의 차이인 셈이지요…”
- “이제부터 알맞은 계책을 세워야 겠군요.”
그러자 엄중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던 이스마엘이 찬찬히 입을 열었다.
-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제가 보건 데, 피레네는 작은 데다 성 벽 또한 견고하지 못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실로 안에서 싸워서 이로울 것이 없는 성입니다.”
- “동감입니다.”
침통한 얼굴로 긍정을 표하는 후센을 뒤로 한 채, 그가 말을 이어갔다.
- “또한 공성전 위주로 가면, 자칫 잘못해 적들의 추가 병력에 둘려 쌓여 식량 보급이 끊기는 최악의 상황 또한 고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짧은 소견에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넓은 평원에서 결판을 짓는 것이 상책인 듯 합니다만…”
- “일리는 있는 말이네. 허나… 이 드넓은 들판에서 정면전을 펼치자면…”
- “아군 또한 피해가 만만치 않을 테죠.”
이스마엘이 그의 생각을 꿰뚫고 먼저 말하자, 크리스토퍼 또한 말문이 막히는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이윽고 그가 다른 방도가 없는 듯, 주위를 둘려보며 영을 내렸다.
“다른 계책은 없는 듯 하니… 미리 성 밖에서 진을 치고 적들을 기다리기로 하겠네… 부디 신의 가호가 로엔에 깃들기를…”
그렇게 먼 길을 달려온 로엔의 기마대는 성 십 리 앞에 진을 치고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이 피로함을 회복하고 사기를 되찾을 무렵이었다. 비로소 그들이 피레네에 도착한지 갓 이틀 되었을까, 북쪽에서 퍼지는 요란한 피리 소리가 새벽의 고요함을 일깨웠다. 화들짝 놀란 로엔 군이 서둘러 진형을 갖추고, 소리가 난 쪽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덧 저 멀리, 말로만 듣던 그 전설의 그랑카 기마대가 뿌연 먼지를 휘날리며, 아침 햇살을 뒤로 한 채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잠을 청할 때마다… 매운 연기에 신음하는 너의 모습이 보여…”
(아발랑슈의 일기 39쪽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