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동거> [11] - 원피스와 커피 한잔의 유쾌함에 대하여
“옷이 그게 뭐야.”
출근하기 위해 방에서 나서자마자, 우 기자가 말했다.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두꺼운 스웨터에 골덴 바지, 위에는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우 기자의 말에 반사적으로 스웨터에 뭐가 묻었나 보았지만, 분명히 아무 이상 없었다. 지난번에 두번 입긴 했지만, 누가 겨울옷을 한두번 입고 빤다고. 이 정도면 됐지.
“왜? 옷이 어때서? 나, 오늘 인터뷰 없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무슨 날이야? 모르겠는데?”
“아이고, 이렇게 둔해서야!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오면 얘기해줄게. 오늘 같은 날, 바지가 뭐냐?”
“치마? 갑자기 치마는 무슨…. 나, 치마 잘 안 입잖아.”
“안 입는다구 오늘 같은 날까지 안 입냐?”
오늘이 무슨 날이지? 가만 있어보자. 오늘은 11월 26일. 수요일. 우리 잡지 나오는 날. 그래서 출근 조금 늦게 해도 되는 날. 그리고…, 그리고? 전혀 모르겠네.
“먼저 얘기해줘.”
“둔하다, 둔해.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얼른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오라니까?”
우 기자는 아예 나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무슨 날인지 알아야지 옷을 입지!”
내가 잊어버린 무슨 중요한 행사가 있나? 나는 투덜거리면서 잘 입지 않는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빨리 나와.”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기분 전환이 되는 듯도 해서 괜찮았다. 전신 거울이 없어서 못 비춰보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래도 추울 텐데.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왔더니, 우 기자가 감탄한 듯 보며 말했다.
“것 봐. 너무 괜찮다. 진짜 여자 같은 걸.”
“칫! 마음에도 없는 말을! 우 기자가 날마다 감탄을 연발하는 그 수많은 여자에 비하면 난 못 생긴 발톱 같은 존재 아니야?”
“그 발톱, 오늘 매니큐어 칠했네. 하하하.”
내가 노려보자, 우 기자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가끔 그렇게 하고 다녀. 여자들은 그렇게 치마를 입거나 화장을 예쁘게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던데, 이 기자도 그래?”
“가자.”
“말 돌리기는….”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잘 좀 생각해 봐.”
우 기자는 자기가 현관 문을 옆에서 정중히 열어주더니, 아예 엘리베이터 문까지 옆에 서서 잡아주었다.
“웬 매너?”
“모름지기 예로부터 신사란 숙녀를 보호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지요.”
“으으, 징그러워. 오늘이 무슨 날인지나 말해.”
그런데도 우 기자는 딴청만 피우며 웃고 있었다.
“빨리 말 안 해?”
“저 숙녀, 저러다 신사 치겠네, 하하.”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데, 찬바람이 휘잉 불어서 무지 추웠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왜 우 기자 말을 들어서 이런 고생을!
우 기자는 내가 노려보든 말든 호위한답시고 나를 인도 안쪽으로 걷게 하고, 자기는 바깥 쪽에서 걸었다. 나는 치마 입고 걷는 게 불편해서 계속 씰룩씰룩대고 있는데, 회사에 거의 다 왔을 때 쯤에야 우 기자가 말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냐면, 음, 말이지, 11월 26일은 무슨 날이냐! 그건 바로! 11월 26일이야. 하하.”
“뭐라구? 무슨 날이라구?”
“얼마나 중요한 날이야? 11월 26일. 1년에 한번 밖에 없는 11월 26일! 이 기자 평생에 한번 밖에 없는 2003년 11월 26일! 이런 중요한 날을 그냥 넘어가선 안 되지.”
나는 어이가 없어 차라리 웃고 말았다. 어쨌든 우 기자, 넌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다. 연구 대상이야, 연구 대상! 내가 우 기자하고 같이 살다보니, 속아서 이런 옷까지 입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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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커버는 무조건 미국 대선 예비전으로 해야 합니다, 이거!”
아이템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구 기자가 열을 내며 말했다.
“이제 내년 1월부터 시작되는 미국 대선 예비선거 취재할 타이밍이라고요. 다른 잡지사에서는 아직 손도 안 대고 있는데, 지금 시작하면 아예 우리가 이 아이템을 선점할 수 있잖아요!”
다음주 커버팀은 우 기자와 나였다. 그런데 구 기자가 저렇게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호, 우리 팀을 미국으로 보내시겠다, 이건가? 지난번 일본으로 보낸 것에 대한 보복 공격인가보군? 흠….
“그런데, 그건 다음 달이나, 아니면 1월 초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또 그걸 굳이 가야 되나 싶네. 신문사 쪽에서 미국 특파원이 몇 명인데, 우리까지 가야 될까? 거기 김병대 부장도 있잖아. 기사 내고 싶으면, 김병대 부장한테 얘기하면 되겠네, 뭐.”
하하. 김영준 부장의 말과 함께 ‘꼭 가야 한다’던 구 기자의 1차 시도는 간단히 실패로 끝났다.
“그럼 병아리 감별사는 어때요?”
“에? 뭐라고?”
김영준 부장이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병아리 감별사요.”
“벼, 병아리 감별사? 그게 뭐야?”
“병아리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감별한다는, 그 병아리 감별사 말이야?”
이번엔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우 기자가 되물었다.
“이거, 제가 얼마 전에 제보 받은 건데요, 우리나라 병아리 감별사 학원에서 자격증만 따면 서유럽에서 주 3, 4일만 일하고도 월수입이 수백 씩 된다고 사기를 친대요.”
우리들이 동시에 피식거림에도 불구하고, 구 기자의 의지는 결연하고도 진지했다. 이왕 보낼 거면 좀 그럴듯한 아이템이라도 잡아오지, 병아리 감별사가 뭐야?
“병아리 감별사 학원에서, 그 받기 어렵다는 독일 비자까지 다 받을 수 있게 해주고, 일자리도 알선해준다고 사기를 친대요. 자격증 딸 때까지 걸리는 기간은 1년 정도라고 하는데, 그 때까지 들어가는 비용이 자그마치 1000 가까이 된답니다.”
“피해 건수는 어떻게 되는데?”
“글쎄요, 그건 취재하는 팀에서 알아봐야죠. 저한테 제보한 사람은 독일에서 피해 당했다고 하던데, 자기랑 비슷한 피해자가 한명 더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 그래? 그럼 다 합해서 두 명? 두 명이라…. 그래서 우리 팀, 독일에 보내려구?”
우 기자가 묻자, 구 기자는 혀를 쏙 빼물며 웃어보였다.
“지난 번에 구 기자, 일본 가서 고생 좀 했나?”
김영준 부장이 묻자 구 기자가 과장된 포즈로 대답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여관에서 바퀴벌레도 나왔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뭐 이상한 벌레에 물려서 취재 내내 썬글라스 쓰고 다녔다고요. 일본은 물가도 비싼데, 출장비에 썬글라스 비는 포함도 안 되어 있잖아요. 다음부턴 출장비 좀 올려주세요. 취재 가서 여관이 뭡니까, 여관이? 적어도 호텔 정도는 되어야지.”
“호텔은 일생에 단 한번만 가면 되지, 뭐. 신혼여행 때! 나도 출장 가면 여관에서 바퀴벌레랑 같이 잔다구. 구 기자만 그런 거 아니니까 엄살 떨지 말고, 자자, 다른 아이템 내놔 봐. 이번 주에 우 기자하고 이 기자잖아. 뭐, 생각해 놓은 거 없어?”
“병아리 감별사는요? 독일에 안 가요?”
구 기자가 아쉬움이 남는 듯 다시 묻자 김영준 부장이 쐐기를 박았다.
“그거 재미있는데, 그럼 구 기자가 갈래? 독일 취재 재미있겠네. 독일 여관에는 바퀴 벌레 안 나올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그건 구 기자가 가고, 이 기자, 우 기자는 아이템 뭐 없어?”
“지난 주에 전(前) 대통령 추징금 기사가 하나 났던데, 그거 한번 쫓아가 볼까 해요.”
우 기자가 이리저리 신문을 넘기다 불쑥 말했다.
“그거, 지난 봄부터 여름까지 한참 기사가 많이 나서 신선함이 좀 떨어지지 않나?”
내가 우 기자에게 무심결에 태클을 걸었음에도, 우 기자는 아랑곳 없이 말했다.
“부장님, 이번엔 그거 할게요. 신선한 걸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뭐 벌써 잡은 게 있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원래 우리가 하는 일이 도박이잖아요. 한번 해볼게요.”
우 기자의 말투가 워낙 자신 있자, 김영준 부장도 수긍하는 듯 했다.
“이 기자, 뭐 딴 거 없어? 없으면 그걸로 가보자. 두 사람이야, 지난번 기사에서 워낙 대박을 쳐줘서, 이번에도 믿을게. 알았지? 정 잘 안 될 것 같으면 금요일 오전 쯤에 한번 다시 나랑 얘기하자구.”
회의를 끝내고 나가면서 우 기자를 쿡 찌르며 말했다.
“뭐 잡아놓은 거 있어? 난 별로 자신 없는데.”
우 기자가 씨익 웃더니 대답했다.
“아니. 아무 것도 없어. 그냥 필을 받아서. 커피 한잔 하면서 얘기하자.”
경쾌하게 앞서 걸어가는 우 기자의 뒷모습이 갑자기 믿음직해 보이기도 했다. 하긴. 우리가 지금껏 취재했던 것 중에 몇 번은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추진한 것도 있기는 했다. 물론, 그랬다가 실패를 한 적도 있었지만. 때로는 2, 3일 취재하다가 도저히 기사가 될 것 같지 않아 아이템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면 금요일 오전에 다시 급하게 아이템을 잡고 취재를 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
“필 받아서 아이템을 정했다구? 갑자기 웬 도박? 취재하다 아이템 뒤집히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면서 그래?”
자판기 커피를 우 기자에게 내밀며 내가 물었다.
“가끔은 대박을 위해 도박이 필요하지. 알잖아. 잘못된 역사 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가 우리 관심사 1번 중에서도 맨 첫번째였던 거. 그걸로 한번 가보자고.”
우 기자가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치이. 취재 아이템을 우리 관심사 중심으로 한번 잡아보시겠다? 휴우. 과연 지난번 같은 대박이 가능할까?
“야아, 둘이 또 뭐 하냐?”
구 기자가 유 기자와 들어오면서 물었다.
“그러는 너는 뭐 하냐? 왜 둘이 나란히 들어와?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쯧쯧.”
우 기자가 놀리듯 묻는데, 나를 보는 구 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기자, 오늘 무슨 일 있어? 선이라도 봐? 이번 주 바쁘잖아.”
“내가 뭐?”
“생전 못 보던 옷차림을 하고 오니까 그러지.”
나는 스칼렛 오하라처럼 고고하게 눈을 치켜뜨고는 말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선배?”
영문을 모르는 구 기자를 가운데에 두고 나와 우 기자가 마주 보며 웃었다.
“무슨 날인데?”
“무슨 날은! 11월 26일이지! 1년에 단 한번 밖에 없는 11월 26일! 구 선배 인생에 단 한번 밖에 없는 2003년 11월 26일!”
“야, 우 기자, 이 기자가 왜 너 닮아가냐? 어, 어? 둘이 표정이 왜 그래? 요즘은 왜 싸우지도 않아? 참 이상하다니까. 안 그래, 영숙이?”
“회사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구 선배, 유 기자, 연애들 하지 말고, 일해, 일!”
“이 기자야말로 그 옷 입고 일이 되겠어? 딱 연애 맞춤 복장인데. 가만…, 오늘이 이 기자 일생에 단 한번 뿐인 11월 26일인데, 며칠 안 남은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아무 놈한테라도 수작 한 번 걸어봐야 되지 않겠나.”
“뭐어? 선배!”
내가 노려보자, 구 기자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보면 어떡해. 난 사양이다. 난 우리 영숙이 밖에 없거든.”
“뭐어?”
“아쉬운 대로, 그 옆에 우 기자도 있네. 요즘은 안 싸우니까, 잘 해봐.”
“아쉬운 대로, 라니 임마!”
네 사람의 웃음 소리가 유쾌했다. 내가 변하고 있나? 다른 사람들의 농담이 재미있다. 이런 자리는 참 비생산적인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우 기자나 구 기자의 짓궂은 농담 때문에 기분 나쁜 적도 많았는데. 지금 마시는 커피 만큼이나, 이 오후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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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현정입니다^^
꾸준히 읽어주시고, 추천해주시고, 답글 주시는 친절한 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매일 두편씩 연이어 올렸는데요, 이따 오후에 한편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10편 '다른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2)' 다시 보기
이 기자가 마시는 커피 만큼이나 유쾌한 하루 되시기를..
김현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