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읽어도 참 재미없지만서도 -,.-; 오로지 완결하리라는 집념아래 오늘도 열심히 **
CHAPTER 3. 동거는 즐거워 남자는 괴로워
준원과 야기의 동거는 그럭저럭 평온하게 흘러갔다.
과한 친절의 야기에, 준원은 그럴 때 마다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야기는 한 집 사는 사람들의 의리! 라는 핑계를 만들어 교묘히 위기를 빠져 나갔다.
야기에게는 꿈 같은 나날이었다. 더구나 그렇게 곁을 안 주던 준원이 한집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럼없는 태도를 취할 때마다 야기는 가끔 가슴 떨리게 행복함을 자각했다.
아침에 가장 먼저 보는 얼굴이 준원이었고 잠들기 전 차 한잔을 나누는 것도 준원이었다.
더구나 준원이는 야기를 상당히 친하게 생각하는 듯 같이 TV도 보고 대화도 나누는 등 정말로 한집에 사는 사람의 대우를 해주었다.
고등학교 때의 그 서늘함이 거짓말인 것처럼 준원은 명랑하고 활달했다.
“그런데 야기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주말 저녁, 귀가한 야기와 마주앉아 저녁을 먹던 중에 문득 준원이 그렇게 물어왔다.
한집에 살면서 따로 식사하는 것도 우습고 해서 어느샌가 식사는 같이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야기는 처음 저녁 식사를 같이 하는 날도, 다다다다~ 방으로 달려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얏! 살아있길 정말 잘했어!’ 를 외쳤다.
야기는 순간 긴장했다가 자신을 알아볼리 절대 없다는 확신에 나이를 밝혔다.
“22인데…”
“어머, 정말요? 나랑 동갑이네.”
“그… 그래요? 이런 우연이…”
아주 조금, 양심이 존재를 알려오는 통증을 무시하고 야기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준원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그럼, 우리 말 놓자. 동갑인데 서로 존대하는 것도 우습잖아.”
오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야기는 계속되는 꿈 같은 상황에 정신을 차릴 새가 없을 정도였다. 준원과 친근하게 말을 트는 것은 그야말로 바래왔지만 감히 말하지 못한 남자의 로망이란 말이지.
“그, 그럴까?”
“어차피 계속 얼굴보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서로 편하잖아.”
생글 웃으며 준원은 연타로 지복의 어퍼컷을 날렸다.
야기는 순간 ‘게이면 어때, 이렇게 준원이랑 지낼 수 있다면 게이여도 상관없어!’ 따위의 집안 어르신들이 들으면 경을 칠 생각을 태연하게 하고야 말았다.
말을 튼다는 것은 지금까지보다 더욱 친해진다는 당연한 수순으로 이어지는 one way ticket 이나 다름없었다. 자고로 사람이란 말을 편하게 하면 관계도 편해지는 법이다.
“그러자.”
“근데 말야, 야기, 너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거 같아. 왠지 낯이 익거든.”
야기는 마시던 물을 켁, 하고 뿜어냈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준원은 드러드러 하는 질린 얼굴로 야기를 외면하고 있어 이때 야기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사레가 들려 컥컥대는 와중에도 야기는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원래 좀 그런 소리 많이 들어. 내 얼굴이 흔한가 봐? 하…하…”
등으로 식은땀을 흘려내며 한 변명이 먹혔는지 준원은 화장지를 뽑아 건네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나름대로 결벽증이 있는 준원으로서는 야기의 입가에 줄줄 흘러내리는 물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 이미 자신이 한말에서는 관심이 멀어진 상태였을 뿐이었다.
야기뿐 아니라 준원도 확실히 말을 놓고 난 이후 준원과의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이 실감났다. 둘의 사이는 빠른 속도로 절친한 친구가 되어갔다. 야기가 게이라 생각해서 그러는지 준원은 스스럼없이 야기를 대했고 때로는 이런저런 고민도 털어놓았다. 영화 취향도 비슷해서 가끔은 같이 영화를 보러 나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야기에게 요즈음의 나날들은 축제와도 같았다. 날마다 즐거운 일이 계속되는 동화의 환상처럼 야기는 주어진 것들을 감사하며 마음껏 누렸다.
밥하기 귀찮다는 서로의 의견이 일치해서 저녁을 피자로 때우기로 결정하고 둘은 피자 배달이 오는 동안 거실바닥에 주저앉아 TV를 켰다. 마침 연예계소식을 전하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관심 없어 보이던 준원도 한국 사람이긴 한지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품평을 하며 야기와 잡담을 나누었다.
“아, 진영아다.”
“정말… 예쁘네.”
진영아는 요즘 최고주가를 올리고 있는 모델 출신 배우로, 요즘 들어 야기가 열광하는 아이돌이었다. 별명이 바비 인형일 정도로 볼륨있는 몸매에 늘씬하게 뻗은 긴다리가 트레이드마크이면서 얼굴조차 요정처럼 사랑스러워서 한국남자들의 우상으로 순식간에 급부상한 신예였다.
야기는 정신없이 진영아의 얼굴을 눈으로 쫓았다. 가볍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비음이 섞인 소프라노는 직격으로 야기의 뇌를 자극해서 야기는 침을 흘리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로 헬렐레 화면속의 그녀에게 빠져있었다. 옆에서 준원이 이상한 얼굴로 자신을 살피는 것도 모른채.
확실히 최근 들어 최고의 상종가를 날리는 여배우답게 그녀의 시시콜콜한 일상이 공개되고 짤막한 인터뷰를 곁들인 특집코너였다. 근 십여분을 눈도 떼지 않고 당장 화면으로 빨려들어갈 듯 정신을 놓은 야기를 보면서 준원은 위화감에 눈쌀을 찌푸렸다.
“진영아, 좋아해?”
“당연하지! 남자라면 누가 저 몸매에 반하지 않겠어? 저건 이미 예술이라고.”
진영아의 팬을 지나 추종자에까지 다다른 야기가 별다른 신경도 쓰지 않고 그렇게 대답하자 준원의 눈이 의심을 띄었다.
“게이도 몸매 좋은 여자한테 흥미 있어?”
순간 야기의 몸이 흠칫 굳었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준원에게 이상하게 보일까봐 그렇게 조심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해이해졌던가 보다. 야기는 초보적인 실수를 한 자신에게 내심 욕을 퍼부으면서 도대체 이 난관을 타개할 방책이 뭔지 궁리했다.
“혹시, 너… “
“아, 아니야! 그냥 예쁘니까… 그래서…”
“그런 눈이 아니었는걸.”
“내, 내가 뭘?”
“그렇게 순수하게 이쁘다 하는 눈이 아니었다고. 그건 완전히 남자가 여자를 보는 눈빛이었어.”
“아니라니까… 그냥 예쁘잖아. 몸매도 끝내주고. 그래서 부러워서, 그래, 부러워서일 뿐이야!”
“너, 사실은,”
“아냣!”
당황한 야기가 소리치자 준원이 스윽 야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더 이상하게 보일 거 같아서 야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등으로 주륵 땀을 흘려냈다.
“솔직히 말해.”
“뭘?”
“사실은 양성애자?”
“뭐, 뭐라고!”
야기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질 뻔 했다.
“아니라니까. 그냥 저런 여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니까… 그래서 진영아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고 보게 돼.”
조금 슬픈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그제서야 준원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등에서는 여전히 식은땀이 나고 있었고 가슴은 두근반 세근반 미친듯이 뛰었지만 준원의 의심이 가신 것 같아서 그나마 안심이 됐다.
“진영아가 부러워?”
“응. 저런 여자는 어떤 남자한테도 당당할 수 있을 거 아냐. 여자인데다 미인이기까지 하니까… 그래서 조금…”
여기서 포인트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준원이 미안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게이에게 상처가 되는 일을 자신이 들췄다고 자책하는 것이리라. 야기는 준원이 모르게 살짝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저 여자라고 해서 늘 행복하진 않을거야.”
한참만에 준원이 나즉하게 속삭였다. 나름대로 위로할 말을 찾았던 모양이다. 뺨이 희미하게 홍조를 띄고 있었다.
“그리고… 너,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니까… 그런거 부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 언젠간 널 봐주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
부끄러운지 조용히 말하는 준원의 배려에 야기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로 준원의 동정심을 이용한 것은 자신인데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머리끝이 간지러운 것이… 준원을 속이고 있다는 자각이 들어 뭔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 다정한 말같은건 잘 하지도 못하는 준원에게 이런 말을 입밖에 내어놓게 한 자신이 조금 가증스러웠다.
그래도 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겨우 준원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마냥 차고 딱딱한 게 아니라 그 가슴에는 한없는 따스함이 숨어 있었다. 그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너무 기뻐서, 그 따스한 온기를 나눠주는 대상이 된 것이 너무 행복해서 야기는 도저히 이 관계를 깨뜨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마워…”
“아, 정말 덥네.”
더위를 느낄만한 날씨가 아니었음에도 준원은 상기된 얼굴에 손부채를 부쳤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야기는 한동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둘 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지만 도무지 무슨 화제를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 초인종이 울렸다.
“피자다!” X2
둘은 동시에 소리치고 다다다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난감하던 차에 때맞춰 들이닥쳐준 피자에게 감사하며 둘은 마음속으로 이 피자집을 단골 삼으리라 결심했다.
“맛있겠네.”
“그러게 말야. 다음에도 여기 시켜야겠다.”
풍성하게 놓여진 토핑과 구수한 냄새에 허기를 느낀 야기와 준원은 서로를 마주보고 생긋 웃었다. 그리고 가장 큰 조각을 먼저 집기 위해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그날 이후 야기는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워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점검했다. 준원에게 의심을 한번 더 사면 그거야말로 낭패. 그러나 준원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욱 야기에게 친밀하게 굴었다.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때로는 정말 가족처럼 서툴지만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준원 때문에 야기는 점점 이중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러지 마. 나, 남자라고. 그것도 너랑 엮이고 싶은 남자. 아흐, 미치겠다. 쟨 아무리 내가 게이라고 했다지만 너무 생각이 없는 거 아냐?’
금붕어처럼 뻐끔뻐끔 부족한 산소를 찾아 간신히 호흡을 하면서 야기는 순식간에 십도는 올라가버린 듯한 실내에서 에어컨 온도를 더 낮춰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야기의 앞에서 초 핫팬츠만 입고 하얀 다리를 팔랑거리며 걷는 준원 때문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러고 보면 같이 산지도 벌써 네 달이 넘어간다. 처음에 어딘지 서먹하던 준원은 어느 순간 야기를 자신의 선 안에 있는 사람이라 인식하고 스스럼없이 굴기 시작했다.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이렇게 가끔 야기를 시험하는듯한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스물 거리며 밀려드는 남자로서의 본능 때문에 준원 몰래 허벅지를 얼마나 찔러 댔던지 아주 성한 살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여름이라고 해도, 집안이라고 해도, 결정적으로 자신이 아무리 게이라고 해도 ㅠ.ㅠ, 지킬 것은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냔 말이다.
불편해진 야기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무래도 방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준원이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고민에 파묻혀 혼자 음울한 오라를 두르고 있던 야기는 그래서 준원이 한말에 열광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도저히 일어날 수도 없다.
“더워, 나 샤워할래. 밥은 조금 있다가 먹자. 너무 더워서 입맛도 없지만.”
건성으로 응, 하고 대답한 야기는 눈을 들었다가 준원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그대로 소리도 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화장실로 직행하며 야기는 스스로에게 동정을 느꼈다.
잠시후 여전히 찝찝한 기분으로 손을 닦으면서 거실로 나오던 야기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에어컨 바람이 가장 잘 드는 소파 끄트머리에 앉은 준원은 바스가운을 입고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다. 아직 다 닦이지 못한 물방울들이 목덜미와 가운 아래 드러난 다리에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촉촉히 젖은 머리카락과 습기를 머금은 하얀 얼굴. 분홍빛 입술이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다. 야기는 자기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등줄기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한기에 척추뼈가 바짝 긴장했는지 찌릿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뭐 먹을래?”
여전히 머리를 타월로 감싸 두드리면서 준원은 저녁메뉴 이야기를 한다. 만일 고개를 들어 야기를 보았다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며 쉭쉭 소리를 내는 거친 호흡에 경악했을 테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준원은 긴 머리카락을 건사하기도 바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야기에게는 치명타였으니… 섹시하고 은밀한 자태로도 모자라서 저녁메뉴를 운운하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마누라 같다는 착각이 든 것이다. 남자들의 위대한 착각이 상상이 되어 덮친 순간 야기는 그 자리에 무릎을 모은 채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쿵 하는 소리에 준원은 야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심상치 않은 기색에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준원의 눈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을 감추려는 야기. 그는 힘겹게 몸을 비틀어 등을 보이며 준원을 외면했다. 빨리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은척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상태론 도저히 불가능. 야기는 뒤통수에 파바박 와 꽂히는 준원의 의심과 놀람을 받으면서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남자의 생리상 대번에 벌떡 일어나기는 힘들었다.
“야기야?”
준원의 목소리가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냉기를 띄어간다. 야기는 그야말로 필사의 각오로 손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소리는 그야말로 개구라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으며 야기는 엉거주춤 선 자세로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그야말로 도망치듯 방으로 뛰어들었다.
“미, 미안. 몸이 안 좋아서 난 들어가 쉴게. 저녁은 못 먹겠어. 미안!”
바람같이 사라진 야기의 잔상을 멍하니 보던 준원은 이마를 찡그렸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것이 뭔지는 꼭 집히지가 않는다. 뭘까. 이 위화감은… 그러고보니 전에도 이런 느낌이 들었었는데… 준원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무언지 아주 불쾌한 가설이 만들어지려는 찰나, 준원은 애써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야말로 자의식 과잉이라고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하지만 불안의 불씨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언제라도 활활 타오를 준비를 하고.
한편 방으로 숨은 야기는 혹시라도 밖에서 들릴까 해서 욕실에도 가지 못하고 그저 방문앞에 귀를 대고 준원의 동정을 살피며 어정쩡한 자세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과 그보다 더욱 무거운 마음. 야기는 정말 울고 싶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러다간 준원이가 눈치채 버리겠어.”
위기감에 휩싸인 야기는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생각은 곧 이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신체 일부에 의해 중단되었다. 야기는 티슈를 물고 남자란 존재를 저주하며 끝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