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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하(趙明河) 의사(義士)의 타이중시[臺中市] 반일의거(反日義擧)

개마기사단 |2009.03.27 21:58
조회 203 |추천 0

 

1919년의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은 국내·외의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을 조직화하고 지속성을 지니고 전개시켜 나가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또 3·1운동 직후에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어 이때부터 전개되는 민족해방운동은 대체로 임시정부와 직·간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추진되었다. 한편 3·1운동 이후의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은 중국 본토와 동북3성(東北三省)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하고 또한 무장독립투쟁(武裝獨立鬪爭)과 제휴하여 진행되기도 하였다.

 

특히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방향과 방법을 둘러싸고 이데올로기적 분화 현상이 나타나 종래의 민족주의 세력 외에도 무정부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 등이 독립운동 진영에 다양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운동 진영의 이데올로기적 분화도 서로 대립·갈등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일정한 목표를 지닌 독립운동의 형태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항일의열투쟁은 보다 적극적이고 과격한 투쟁 방법을 택하여 추진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많은 항일의열투쟁 가운데 가장 큰 역사적인 쾌거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단원인 윤봉길(尹奉吉)이 상해에서 벌어진 천장절(天長節) 기념식 행사장에 잠입, 폭탄을 던져 일본의 군·정 수뇌부에 큰 타격을 준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虹口公園) 반일의거(反日義擧)가 꼽힌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일어난 1928년 5월 14일 대중시(臺中市) 반일의거(反日義擧)는 조명하(趙明河)라는 애국 청년이 그 어떤 독립운동 단체에 소속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으킨 거사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할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인 것이다.

 

대중시 반일의거는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 일본 황제의 장인이며 군사참의관(軍事參議官)까지 역임한 일본 제국주의 당국의 고관(高官)인 구미노미야[久邇宮邦彦王] 육군 대장이 대만을 방문하던 중 다이쇼정[大正町] 도서관 앞에서 조명하라는 한국인 청년에게 피습당한 사건이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중국 침략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1927년 5월과 1928년 4월 두 차례에 걸친 산동성(山東省) 출병을 단행한 바 있었다. 따라서 당시 대만은 중국 본토 침략의 전진기지로서 일본군 입장에서는 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육·해군의 대병력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의 군사병력을 검열하기 위하여 구미노미야 대장이 대만에 들렀다가 조명하의 손에 들린 독검(毒劍)에 찔린 것이다.

 

이 의거의 주인공인 조명하는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에서 조용우(趙鏞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향리에서 풍천보통학교를 거쳐 송화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약방과 군청서기로 전전하면서 당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금지 도서로 지정한 한국통사(韓國痛史)·신단민사(神檀民史)·대동역사(大東歷史) 등의 서적을 몰래 읽으며 남달리 조국애와 민족의식에 불타는 열혈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1926년 송학선(宋學先)이 사이토[齋藤實]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금호문(金虎門) 반일의거(反日義擧), 의열단(義烈團)의 단원인 나석주(羅錫疇)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등을 폭탄으로 공격하고 일본 경찰대와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한 사건 등이 잇달아 일어나자 자기도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오사카[大阪]에서 1년 동안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거사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다가 뜻을 펼 마땅한 장소와 기회가 오지 않자, 그는 처음 중국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로 가려는 목적에서 먼저 대만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7년 11월 대만에 도착한 그는 쉽사리 거사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하여 일본인으로 위장한 후 대중시(臺中市) 영정(榮町)에서 일본인 이케다[池田正秀]가 경영하는 부귀원(富貴圓)이란 차포(茶鋪)의 고용원으로 취업, 월 10원의 보수를 받아 생활하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처음 대만총독부(臺灣總督府)의 야마가미[山上] 총독을 암살할 것을 계획하고 대만인 장천제(張天弟)로부터 단검(短劍)을 구입해 이를 숫돌에 날카롭게 갈아 칼날에 치명적인 독극물을 발라 놓고 거사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대만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해 황족 출신의 육군 사령관인 구미노미야[久邇宮邦彦王] 대장이 이곳에 온다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자, 그는 대만 총독보다 더 높은 거물급 인사를 처단하는 것이 조선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만방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마침내 그는 구미노미야 대장이 1928년 5월 13일 대중시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오전 10시에 대중역을 출발하여 기차편으로 대북으로 갈 예정이라는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는 구미노미야 대장이 지나갈 길을 사전답사하고 이튿날인 5월 14일 독이 묻은 단검을 몸 속 깊숙이 품은 채 집을 나섰다.

 

이날 9시 55분, 그는 대중시의 다이쇼정[大正町] 도서관 앞에 환송나온 인파 가운데서 몸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었다. 구미노미야 대장은 숙소인 지사(知事) 관저를 출발하여 무개차(無蓋車)에 앉아 일본군 병사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고 있었다. 이 때 도서관 앞 커브 길에서 차가 왼쪽으로 핸들을 꺾으면서 잠시 속력을 늦추는 순간, 조명하는 재빨리 단검을 뽑아 들고 환영 인파를 헤치면서 비호같이 차에 뛰어 오르면서 구미노미야 대장을 힘껏 찔렀다. 그러나 그의 칼은 구미노미야 대장의 왼쪽 목근처와 어깨를 찌르고 빗나가 운전사의 오른쪽 등에 꽂히고 말았다.

 

그는 다시 단검을 뽑아 들고 목을 찌르려는 순간 호위병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그를 발길질로 차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병사들을 뿌리치고 구미노미야 대장을 향해 단검을 힘껏 던졌으나 불행히도 또 칼은 적중하지 못하고 빗나갔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조명하는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른 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조명하는 2개월간의 심문을 거친 다음 그 해 7월 18일, 대만 고등법원 법정에서 열린 특별공판에서 ‘황족에게 위해를 가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일본 형법 75조가 적용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2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러나 조명하의 피습을 받은 구미노미야 대장은 독이 온 몸에 퍼져 병원에 입원해 6개월간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조명하(趙明河) 의사(義士)의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은 다른 반일의거(反日義擧)와는 달리 배후나 협력 단체가 없는 단독으로 행한 장거로서 일본 조야(朝野)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의 침략을 받은 중국인들에게 항일투쟁(抗日鬪爭)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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