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의 원주민 투피 과라니(Tupi Guarani) 종족은 일찍이 아순시온을 중심으로 거주하였는데, 후일 그들은 남쪽의 리오데라플라타 하구에서 남미 북부에 있는 오리노코(Orinoco) 강 사이의 전 지역에 산개하여 거주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는 파라과이 동부지역에서 발달하고, 특히 그들은 만디오카(Mandioca)와 옥수수를 교대로 경작하여 주식으로 활용하였다.
1525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알레이쇼 가르시아(Aleixo Garcia)는 스페인의 디아시 데 솔리스(Diaz De Soliz, Juan) 탐험대에 동승하여 파라과이 전역을 답사하였다. 그 후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5세는 1535년 페드로 데 멘도사(Pedro De Mendoza)를 보내어 파라과이 지역의 식민지화 정책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537년에 페드로 데 멘도사의 부하인 후안 데 살라사르(Juan De Salazar)는 아순시온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곧이어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 이랄라(Domingo Martinez De Irala)가 아순시온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1541년 9월에 최초로 아순시온에 6명으로 구성된 시의회(市議會)를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청(副王廳)이 세워질 때까지 아순시온은 남아메리카 남동부지역에서 스페인 귀족 세력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파라과이에서는 1556년에 최초로 카톨릭 주교가 도착하였고, 그 후 1588년에 헤수이타파 선교사들이 들어왔는데, 이들이 원주민과의 무역을 독점하는 활동을 벌여 많은 지주들이 이에 맞서면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려는 투쟁을 벌였고, 결국 1767년 에스파냐 왕실에서는 헤수이타파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자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지방 대도시였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가 되었다. 1810년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게 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자치 부왕령을 재건하고자 했다. 파라과이의 정치 지도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통치를 거부하고 포르투갈인에게 도움을 청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군사혁명위원회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1811년 1월 9일에 자체적인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베르나르도 데 벨라스코 이우리도브로 총독을 파면시키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1월 17일에는 풀헨시오 예그로스(Fulgencio Yegros)를 의장으로 선출한 정부 평의회가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강력한 중앙 집권주의 형태의 통합 정책을 추구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측 평의회와 갈등을 겪다가 1813년 10월 12일 파라과이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집정관(Consulado) 제도를 도입하여 1814년 10월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Jose Gaspar Rodriguez De Francia)를 5년 임기의 정부 수반으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아는 1816년 6월에 총통[El Supremo]에 선임되어 영구집정자[Dictador Peroetuo]의 자격으로 1840년까지 독재정치를 펼치면서 공중 집회를 금지하고 공공 교육을 강화하고 수도원 제도를 폐지하여 자산을 징발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외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하고, 새로운 사상의 유입을 막기 위해 모든 항구와 국경을 봉쇄하는 쇄국주의(鎖國主義) 노선을 고수하였다.
프란시아가 사망한 뒤 군사 평의회가 구성되었으나 로무알도 두레의 반란으로 붕괴되고, 1841년 2월에 집정관 체제가 부활되어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Carlos Antonio Lopez)가 집권하였다. 로페스는 아르헨티나의 코리엔테스 주와 외교, 교역 및 경계선 조약을 체결하고 교황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공공 교육의 강화에 노력하였다. 1844년 3월에는 새로운 의회가 소집되어 공화국 형태의 신헌법을 제정하고, 국기와 문장도 확정하였다. 임기 10년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로페스는 1862년까지 19년간 파라과이를 통치하면서 군부를 개혁하고 브라질, 미국, 프랑스, 영국 등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등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에게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하여 파라과이 정권은 한 개인이나 한 가문에 세습될 수 없다고 명시한 독립선언서에 위배되는 불법행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우루과이의 베난시오 플로레스(Venancio Flores) 장군은 바르톨로메 미트레(Bartolome Mitre)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1864년 대통령에 선출된 아타나시오 크루스 아기레의 새 정권에 저항하였고, 이에 따라 우루과이에서 내전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브라질이 1864년 8월 우루과이 연안에 해군 병력을 파견하였고 파라과이 정부는 브라질이 우루과이 사태에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어 양국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플로레스 장군이 몬테비데오에 입성하여 브라질을 지지한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자 파라과이 정부는 1865년 3월 5일 의회의 인준을 통해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양국에 대해 공식적으로 선전포고(宣戰布告)를 발표하였다. 그 사이 1835년 3월 1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및 우루과이 삼국의 비밀 동맹이 맺어졌고 1865년 6월 미트레 대통령이 직접 지휘하는 아르헨티나군이 파라과이 영토에 침범하였다. 이어 1868년에 브라질 해군이 파라과이를 공격하자 미트레 대통령은 작전권을 브라질군 수뇌부 측에 위임하고 파라과이에서 철수하였다. 그 후 삼국 동맹군은 1869년 1월에 아순시온을 점령했으며 파라과이의 실권자인 로페스는 아순시온에서 북부로 100km 떨어진 아사쿠라(Azacurra) 산맥에서 항전을 계속했으나, 1870년 3월 세로코라 전투에서 전사하여 전쟁은 종결되었다.
삼국 동맹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파라과이는 로페스가 구축한 산업 기반이 완전히 파괴되고 경제 및 재정 상황은 파탄 상태에 이르렀으며 외국 군대에 의해 6년 동안 점령되는 수모를 겪으면서 정치적 충돌과 내란 등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라과이는 중립적 입장을 취했으며 경제발전도 다소 이룩했다. 그러나 볼리비아와 경계를 이루는 서부 국경지방에서 방어 진지가 여러 군데에 구축되고 병기고가 설치되면서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1932년 에우세비오 아얄라가 집권할 시에 볼리비아의 군대가 차코 지역에서 파라과이군과 잦은 무력충돌(武力衝突)을 벌이면서 중요한 군사요새를 빼앗자 파라과이 측은 곧바로 군사력을 재정비하여 진지 회복 작전을 감행하였으니, 이 싸움이 유명한 '차코 전쟁(Guerra del Chaco)'이다.
미국, 콜롬비아, 멕시코 등 여러 나라들이 중재를 시도했으나 파라과이는 1933년 6월에 볼리비아를 향한 전면전(全面戰)을 감행하였다. 독일 출신의 한스 폰 쿤트 장군이 이끄는 볼리비아군은 이미 1932년 6월에 그란차코 북부지역에 있는 파라과이 기지를 점령했고 포르틴 보케론(보케론 성채)에 대항해 차코 중부지역에서 성공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8월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Jose Felix Estigarribia) 장군이 이끄는 파라과이군은 포르틴 보케론에 대한 반격을 감행하여 9월말에 함락에 성공하였다. 볼리비아는 군트 장군을 소환하고 병력을 남부지역에 집결시켜 포르틴 나니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이곳에서 여러 차례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10월말에 확대된 전선을 따라 일련의 공격을 감행했고, 볼리비아의 다니엘 살라망카 대통령이 군트 총사령관을 엔리케 페냐란다 장군으로 교체할 정도로 전세는 파라과이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3주 동안의 일시적 휴전이 끝난 뒤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1934년 1월 9일에 볼리비아의 발리비안 기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5개월 동안 전개된 발리비안 전투에서 볼리비아군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고, 파라과이군이 11월 17일에 발리비안 기지를 점령하자 살라망카 대통령은 사임해야 했다. 1935년에 파라과이군이 볼리비아의 영내에까지 침투하자, 볼리비아 정부는 1935년 6월에 파라과이 측과 강화(講和)를 맺었다. 이 전쟁에서 민간인까지 포함해 약 10만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두 나라는 많은 희생을 치르었다. 결국 1938년 7월 21일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르헨티나, 칠레, 미국 등의 중재로 평화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이 종결되었다. 파라과이는 분쟁지역 대부분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회랑지대와 푸에르토카사도 항구를 얻었다.
1936년 페브리스타스의 지도자 라파엘 프랑코가 집권했으나 펠릭스 파이바에 의해 그의 정권은 곧 붕괴되었고, 차코 전쟁의 영웅인 에스티가라비아 장군이 1939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0년 에스티가라비아 장군이 의문의 항공기 사고로 사망한 후 여러 차례 독재정권의 부침이 있은 후 1954년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로 장군이 집권하여 1980년대말까지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는 1989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될 때까지 파라과이의 공업건설화와 인플레이션 감소 등을 이룩하였다. 1989년 2월 3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고, 그는 1989년 5월 선거에서 콜로라도당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