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해결 될 것 같지 않는 일들을 인생의 절벽 끝에서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그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의식과 무의식 속에 남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그 고통을 절제하며, 왜곡 시키려 하는 사람들은 서랍 속에 오래간 묵혀두었던 ‘화성에서 온 남자 n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어 보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화장을 하고 화창한 날에 스타벅스 야외 벤치에 앉아 남의 시선을 통해 누군가에 의하여 거절된 자아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몸부림 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무의식 속에 잠재해 버린 고통을 의식적으로 억누를 수 없고,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그 억누르려고 하는 의식 조차 망가져 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바보천치’가 되는 거죠. ‘시간이 약’이라는 시대적 명언(?)은 이미 의식과 무의식이 고통에 지배당한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명약 일 수 없습니다. 또한 의식적으로 고통의 기억을 억눌러 감정의 흐름을 단기간 이나마 전향 할 수는 있지만, 잠재적으로, 무의식의 영향으로 인해 앞 서 말한 의식적 행동이 불가능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의식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요가나 불가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명상이 있는데, 이러한 행위는 내적인 자아의 성찰을 통한 마인드컨트롤, 즉 자아의식을 통한 생각-고통에 관한-의 흐름을 조정하는 것 이므로 ‘의식 세계’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무의식, 통제 할 수 없는 그 세계에 묻혀버린 고통의 조각들이 그토록 고통에 빠져버린 이들을 광란, 침체, 절망으로 빠져들어가게 만드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 무의식이 자아가 아닌 외부요인(혹은 내부에 있는 형이상학의 존재)에 의해 통제가 가능하다면, 그 외부요인에 의해 이 고통이 광란, 침체, 절망에서 기쁨, 기회, 소망으로도 인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일이 쉬울까요? 수력발전소에서 연간 몇 백만 와트의 전기를 발생시키는 일이 쉬울까요? 물길을 막고 댐을 건설하여 전기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에너지(형이하학의 모든 것)는 측정 할 수 있지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일에 대한 에너지는 그 측정을 위한 단위 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인간의 힘으로는 생산 불가능하죠. 다시 말해, 인간의 무의식의 통제는 인간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하고, 외부요인, 즉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만한 절대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외부존재 만이 그 통제를 가능케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인 힘을 빌리는 것이죠. 그 힘은 고통의 모습에 따라 믿음이 될 수도 있고 용서, 사랑, 소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종교를 갖고자 하는 생각이 잠재해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자아를 무신론자라고 지칭하는 이들도 고통의 문제 앞에서는 이러한 무의식에 영향을 받아 종교의 힘을 빌리곤 합니다.
고통의 문제 앞에서 더 이상 혼자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시간을 허비하기 보다는 무의식 속에 잠재된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고통의 문제를 의뢰하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