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자살을 미화하는 미친 사회
노무현 자살은 기폭제 처럼, 온 사회를 들쑤셔 놓고 있다. 노사모들이 떼를 지어서 노무현의 자살을 미화하다 못해 숭상하기까지 한다. 자살 미화의 신 풍조라 할까.
모세율법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막에 임무를 맡을 때, 달거리 중에 있는 여성에게 가까이 하면 안 되었다. 또 죽은 시체에도 가까이 하면 안되었다. 가까이 하면 약 보름간은 성막 일을, 그들이 아무리 잘 씻었어도, 볼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바로 달거리와 시체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산 것들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것들의 하나님이 아니신 까닭이다.
인간에게 죄가 무서운 것은 죄가 인간을 죽음 상태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끊어놓음으로써 인간을 죄 중에 죽게 한다. 사망에 이르는 병이 바로 죄이다.
의로운 가운데 있다가 자살했다 하더라도 그 자살을 미화해서는 안될 터인데, 지금 한국에선 삼천년전의 모세 율법 시대보다 못한 풍조가 벌어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자살을 숭상하다 못해서 일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직대통령 노무현을 극도로 미화하는 해괴한 풍조가 확산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들은 노무현 자살 직전까지 노무현의 부패.비리를 대놓고 질타하던 같은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질타하던 모질음이 자살하고 나자 미안한 감정으로 바뀌어 그저 사죄하고 그저 수그리다가 급기야 자살 변사시신 앞에 조아려 경배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 그 자살자를 영웅으로 떠받들려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이명박대통령의 하나님이지, 자살자 노무현의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하지, 사망의 편에 서서는 안된다.
살아 있는 것을 감사할 줄 모르고, 심지어 업신여기며 조롱하는 미친 병에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바야흐로 걸려들고 있는 것이다. 신종 인플루엔자보다 무서운 질병이 바로 자살 사모증이라 할 밖에.
사는 것이 지긋지긋하고 싫은 사람들은 자살을 미화할 것이다. 자살자들의 용기(?)를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죽은 노무현이 지금 저승에서 살아 와글대는 이 땅의 사람들을, 심지어 억울한 와중에 처해 있는 이명박을 더욱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리라.
산다는 것은 축복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삶을 향하던 수용소 사람들의 삶에의 의지를 이렇게 한 폭의 그림으로 설명했다.
총든 독일군인들의 감시 속에 발목에 무거운 쇠사슬로 매이운 비쩍 마른 유태인들이 아침 일찍 중노동을 하러 이동하다가 문득 어떤 사람이 "아름답다"라고 감탄하면, 그 일련의 쇠사슬에 묶이운 사람들이 연이어 그 갓 피어난 작은 들꽃을 보고 감탄하고 감동하며 행복해하더라는 것이다.
생이란, 작은 들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 그것이다. 영원한 삶은 바로 이 작은 들꽃이 주는 감동에 감사할 줄 아는 겸손한 심성을 지닌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동네다.
작은 들꽃에 고마워할 줄 모르고 매일매일의 삶에 행복할 줄 모른다면, 그런 사람에게 영원한 삶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쇼펜하우어 말처럼, 지루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무의미한 선물 같이 될 것이다.
왜 생에 감사하지 못할까 ? 바로 극도의 자기애, 극도의 자기교만 때문이다. 자기는 특출하다고 믿고 자신은 대단한 대접을 받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런 심정으로는 생을 쉽게 걷어차기 일쑤다.
하지만, 세상에는 팔 다리가 없이도 생을 감사하고 겸손되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암에 걸리고 죽을 병에 걸려서 하루 하루 살아 버티는 그것을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대번에 지지자들이 돌아섰다 하여 자기 목숨을 끊는 노무현 처럼 미련한 짓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에서 지지가 끊어지면 어떤가. 절해고도 처럼 외로우면 어떤가. 남들이 나를 오해하면 좀 어떤가. 전도서에는 사랑할 때도 있고 미워할 때도 있다 라고 하였다. 인생에는 남들이 나를 사랑해줄 때도 있는가 하면 남들이 나를 미워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 고작한 미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해버리다니,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숭상하는 병에 걸리다니,
할 일이 그리 없나 라고 묻고 싶어진다. 노무현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삶을 진정으로 치열하게 살아 보았다면, 자살한 노무현에 연연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속절없이 버려 마땅한 것이 아니므로다.
영원히 사는 삶은 가치있는가. 노무현의 자살은 한국인에게 이 가장 심각한 질문을 던져놓고 갔다. 잠깐의 삶이 괴로워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된다면, 영원히 사는 삶인들, 그에게 주어진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잠시의 고통을 못 견디어 그대로 목숨을 끊은 일개 전직대통령을 저리 젊은이나 늙은이들이 사모하고 그리워한다면, 그들의 정신 안에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영원한 삶이 깃들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국의 교회들이 제 정신이 있다면, 노무현 자살은, 기독교리에 대한,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엄중한 반란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별로 들고 일어나 성명을 미쳐가는 한국인들에게 발표하여야하는 문제이다.
하루 하루의 삶은 가치있다. 하루 하루 지나가는 삶이란 충분히 행복하고 행복한 것이다. 그것이 설혹 고통과 슬픔, 눈물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낼 값어치 있고 겪어낼 이유,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살 유혹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아, 사람들아, 어린 아이들아, 병들어가는 이 땅아, 아침에 뜨는 햇볕을 보고, 어깨위로 흐르는 바람을 생각하며 기뻐하기 바란다. 우리 자신은 벌써 죄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인데, 하나님께서 깊으신 은총으로 이제껏 살려주시고 밥먹게 하시며 숨쉼과 자녀들과 애정과 우정을 누리도록 허락하신다라고 생각하자. 그리하면 충분히 행복할 이유는 널리고 널리었으니,
산다는 것의 가치를 못 깨닫는다면, 그들에게 영생을 주어준들 아무 값어치 없다. 하나님께서는 노무현의 자살을 통해 한국인들의 골수에 깃든 '죽음에 이르는 병'을 보여주고 계시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글을 통해 절망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문이 되리란 점을 말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지금 전 사회에 팽배하는 절망에는 전혀 신적이지도 않고 전혀 철학적이지도 않다. 수뢰죄로 조사받다가 자살하였다는 것은 명예도 아니요, 자랑도 긍지는 더더욱 될 수 없음에도 그 자살을 미화하고 있으니, 자라는 어린아이들이 그 못된 짓을 보고 배울까 염려하라.
지금껏 누리고 살아온 것의 가치, 행복을 고마워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께서는 기껏 그동안 누리게 주신 것도 다 거두어 가실 것이다. 북한 땅을 바라보며, 자살에 동경을 품는 노.사.모.들은 두려워하기 바란다. 저들의 행패는 실로 두려운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