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2009-05-31]
챔피언스리그 결승 출전, 하지만 풀리지 않는 갈증
‘역대 최고’ 차범근일까 박지성일까
1970~80년대를 추억하는 올드 팬이라면 차범근 수원 감독의 위상을 똑똑히 기억한다. ‘차범근이냐, 박지성이냐’, 술자리에서 있을 법한 안줏거리 같은 논쟁에서 차범근 감독이 대부분 압승을 거둔다. 차 감독은 전성기 시절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연봉 랭킹 3위에 올랐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유럽 빅리그에서도 최고였다. 유럽에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기록 면에서도 박지성을 압도한다. 차 감독은 78년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엘 레버쿠젠을 거치며 308경기에서 98골을 기록했다. PSV 에인트호번(네덜란드)과 맨유에서 149경기 출장, 21골을 기록한 박지성을 압도한다.
하지만 UEFA컵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차 감독도 챔피언스리그 무대는 밟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챔피언스리그에는 각국 리그 우승팀만 출전했다. 분데스리가 팀 가운데 정상을 다투던 바이에른 뮌헨이나 함부르크SV 정도가 목표로 삼는 무대였다. 프랑크푸르트나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의 중상위권 팀이었다. 80년대 UEFA컵은 준우승팀들이 대결하는 무대였다. 한국축구가 세계 무대와 거리가 멀었던 때, 아시아의 축구 후진국에서 홀연히 등장한 천재 차범근은 월드컵 출전도 세 경기(86 멕시코 월드컵)가 고작이었다.
이에 비하면 박지성은 행운아다. 끝없는 노력의 결과이긴 했지만 히딩크 감독과의 인연에 힘입어 유럽에 진출했다. 히딩크 체제의 에인트호번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면서 유럽 전역에 자신을 알릴 기회를 잡았다. 덕분에 맨유로 가는 길이 열렸다. 한국축구가 용틀임할 때 박지성은 그 중심에 있었다. 멕시코 대회 이후 6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오른 한국은 아시아 최강 레벨을 지키고 있다. 이미 두 차례 월드컵에서 10경기를 뛴 박지성 앞에는 2010 남아공 월드컵이 또 기다리고 있다.
91년 유러피언 챔피언스컵이 챔피언스리그로 확대 개편됐다.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리그의 챔피언도 출전권을 얻었던 예전과 달리 철저히 인기 위주로 재편됐다. 잉글랜드·스페인·이탈리아·독일 등 메이저리그 팀의 출전권을 확대 배정한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깊어졌지만 팬과 기업체의 반응은 뜨거웠다. 빅리그의 명문이 다수 출전하면서 대회의 권위도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 세계 축구계를 양분하는 남미의 스타들을 대부분 흡수한 유럽 무대. 거기서 가려 뽑은 팀들이 나서는 챔피언스리그는 ‘별들의 전쟁’, 그중에서도 박지성이 출전한 결승전은 ‘꿈의 무대’라 불린다.
프로스포츠는 자본주의의 꽃이다. 대회 규모를 보면 챔피언스리그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UEFA는 다음 시즌부터 3년간 대회 총상금으로 매년 8억 유로(약 1조4000억원)를 내건다. 올 시즌보다 33% 이상 규모가 커졌다.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의 평균 관중은 4만 명을 넘겼다. 흥행이 가장 잘된다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보다 10%가량 많다. 세계 유수의 기업체를 스폰서로 끌어모으는 챔피언스리그는 아직 세계 경제위기와 무관한 곳이다.
완성되지 않은 ‘본 조카토레’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30년 넘게 이탈리아에서 생활한 축구팬이다. 그는 일본의 축구스타 나카타 히데토시(32·은퇴)가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일찍 은퇴하자 무척 아쉬워했다. 한때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은 나카타는 98년 페루자를 시작으로 AS 로마·파르마·볼로냐·피오렌티나를 거쳐 2006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볼턴 원더러스에서 은퇴했다. 당시 나이가 지금 박지성과 비슷한 스물아홉 살이었다. 미드필드를 장악하는 볼키핑 능력에 넓은 시야, 강력한 중거리슛을 갖춘 그는 타고난 축구 센스를 바탕으로 이탈리아에서 주목받았다. 이탈리아어까지 능숙했다. 하지만 부상이 잦았다. 파르마에서는 감독의 전술 적응에 실패하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나카타는 ‘본 조카토레(뛰어난 선수)’이긴 하지만 ‘카티베리아(근성)’를 지닌 ‘포리클라세(초일류)’는 아니었다”고 한탄했다. 일본축구의 ‘국보’ 나카타가 쓸쓸히 은퇴하자 일본 팬들의 상심을 대변한 것이다.
다행히도 박지성은 나카타보다 롱런하고 있다. 그것도 더 나은 리그, 한 수 위의 팀에서. 아직 전성기가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결승전이 끝난 뒤 쓸쓸히 경기장을 떠난 그의 뒷모습에 아쉬움이 남는다. ‘본 조카토레’로 남을 것인가. ‘포리클라세’로 뛰어오를 것인가.
박지성은 유럽 무대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그를 따라다니는 칭찬은 여러 가지다.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은 결승전을 앞두고 “박지성은 공이 필요 없는 선수다. 공이 없는 상황에서 부지런히 움직여 공간을 창출한다”고 추어올렸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두 개의 심장’은 엄청난 운동량을 말해 준다. 수비 가담이 좋아 ‘수비형 윙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전반 2분 호날두의 강력한 프리킥이 바르셀로나의 발데스 골키퍼를 맞고 나오자 잽싸게 달려들어 발을 갖다 댔다. 아쉽게도 상대 수비의 발에 걸려 골대 위로 넘어갔으나 이날 맨유가 얻은 찬스 중 가장 결정적인 상황이었다. 박지성의 슛을 막아낸 헤라르드 피케는 “박지성의 슈팅이 최대의 위기였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반 21분 박지성이 교체돼 나온 뒤 4분 만에 맨유는 추가골을 허용했다. 박지성이 빠진 맨유의 왼쪽 방어벽이 엷어지면서 생긴 공백 때문이었다. 박지성의 존재감은 분명했다.
하지만 0-1로 뒤진 상황에서 퍼거슨 감독은 추격을 위해 베르바토프를 기용하는 대신 박지성을 벤치로 불렀다. 여기 박지성의 아픔이 있다. 박지성은 경기의 흐름을 단숨에 바꿔놓는 ‘판타지 스타’가 아니다. 엄청난 스피드나 기술로 측면을 파고드는 스페셜 윙어도 아니다. 다음 시즌도, 그 다음 시즌도 박지성은 이런 상황이 닥치면 또다시 교체를 감수해야 한다.
고교시절 뛰어난 패싱플레이 다시 한번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박지성은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서른이다. 이제 와서 박지성에게 호날두가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박지성과 많이 닮은 파벨 네드베드(37)를 모델로 계속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네드베드는 체코 대표팀과 유벤투스에서 명성을 쌓은 유럽 정상급 미드필더다. 전성기 시절 폭발적인 운동량과 플레이 메이킹 능력에 결정력까지 겸비한 박지성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현 상황에서 특정 포지션의 스페셜리스트가 되기 어렵다면 운동량이란 장점을 바탕으로 패스와 슈팅을 더욱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김희태 포천축구센터 이사장은 28일 박지성의 출전경기를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수원공고에서 뛰는 비쩍 마른 소년 박지성은 고등학교 무대에서 찾기 어려운 패싱 플레이어였다. 김 이사장은 다른 대학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던 박지성을 자신이 감독으로 있던 명지대로 스카우트한 ‘은인’이다. 어느덧 최고 무대에서 뛰는 훌륭한 제자가 됐지만 예전에 자신의 눈을 사로잡은 매력 포인트는 많이 퇴색돼 있었다. 김 이사장은 “당시 지성이는 워낙 체구가 작아 몸싸움을 싫어했다. 자연스럽게 패스 위주로 쉽게 쉽게 축구를 했다. 패스의 방향과 질도 고교 수준을 넘었다. 이제는 몸도 커졌고 몸싸움이 심한 무대에서 뛰다 보니 전사(戰士)가 된 듯하다. 바람직한 변화이지만 아직 자신의 재능이 100% 발휘되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박지성의 DNA 속에 아직도 살아 있을 패스의 본능을 그리워했다. 그는 “지성이는 많이 뛰는 것 하나로 인정받게 됐다. 하지만 언제까지 확실한 특징 없이 뛰기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슈팅과 패스는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게 있다. 박지성이 그 포지션에서 아무리 슈팅을 날려도 득점왕에 오를 수는 없다. 게다가 세계 정상급 슈터도 아니다. 패스의 질을 좀 더 가다듬는다면 한 단계 올라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정무 축구대표팀 감독은 박지성의 ‘진화’를 낙관한다. 허 감독은 99년 명지대 1학년 박지성을 발굴해 태극마크를 달아 준 지도자다. 그는 “박지성은 유럽에 진출한 뒤 해마다 발전해왔다. 패스도 다듬어졌고 위치 선정 능력도 수준급으로 올라왔다. 무엇보다 성실한 게 희망적”이라고 기대했다.
패싱 능력은 박지성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소다. 박문성 위원은 “박지성은 라이언 긱스(맨유)의 길을 가야 한다. 측면의 스페셜리스트로서 박지성이 긱스의 레벨에 올라설 수는 없다. 하지만 측면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연착륙한 변신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측면은 스피드와 체력을 요구하는 포지션이다. 서른을 넘기면 젊은 후배들과 경쟁하기가 쉽지 않다. 빅리그에서 롱런하려면 중앙으로 위치를 옮길 준비를 해야 한다. 이때 패싱 능력은 필수 요소다.
김학범 전 성남 일화 감독은 “이미 틀이 잡힌 박지성에게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건 무리다. 이제 지금의 모습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 나갈 시기다. 이 단계에서 필요한 건 역시 전방으로 찔러 주는 예리한 타이밍의 패스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성의 축구 DNA 속에 패스의 본능은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여전히 숨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능력에 가렸을 뿐 그 한계에 다다른 것일까. 김희태 이사장은 “지금 나이에 슈팅은 발전이 거의 없어도 패싱 능력은 여전히 좋아질 수 있다. 노련미가 쌓이면 시야도 더 넓어진다”고 덧붙였다.
〔중앙선데이 장치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