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1.開化思想을 접하다 ⑷

조의선인 |2009.06.13 06:28
조회 175 |추천 0

★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독차지한 일본

 

김좌진이 김광호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1894년에는 한국의 근대사를 뒤흔드는 대사건이 세 차례나 일어났다.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청일전쟁(淸日戰爭)·갑오경장(甲午更張)이 그것이다.

 

조선 농민들이 반봉건주의(反封建主義)·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의 기치를 들고 무장봉기(武裝蜂起)하여 전개된 갑오농민항쟁은 1894년 1월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반항하여 일어난 고부민란(古阜民亂)에서 촉발되었는데,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자 동학접주(東學接主) 전봉준(全琫準)은 무장·고창·정읍·김제·태인 등지의 농민들을 백산에 집결시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명분으로 무장투쟁(武裝鬪爭)을 선포하였다.

 

농민군(農民軍)은 황토현(黃土峴)에서 무남영관(武南營官) 이경호(李景鎬)가 이끄는 전라감영군(全羅監營軍)을 격파하고 정읍·고창·무장·영광 등지를 공략했다. 조정의 명령으로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현지에 파견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장위영(壯衛營)의 경군(京軍) 선발대를 보내 황룡촌(黃龍村)에 유진하고 있는 농민군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농민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장성을 떠나 원평·정읍을 거쳐 4월 27일에 전주성(全州城)을 점령했다.

 

관군은 전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농민군과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전(攻防戰)을 벌였으나 아무 성과도 없이 피아간에 사상자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에 조정의 집권 세력인 여흥(驪興) 민씨(閔氏) 일파는 자력으로 농민군을 토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29일에 청나라에 구원병을 청했는데, 청군뿐만 아니라 일본군까지 조선에 들어오자 농민군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조정에서 이에 응하여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5월 7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전주화약 이후 조정의 폐정개혁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자, 농민군은 폐정개혁을 전라도 53주에서 집행하기 위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지방통치의 실권을 장악하여 이속과 행정의 말단조직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는 한편, 삼정업무를 관장하고 민간의 사송을 처리해 나갔다.

 

6월 21일에 불법적으로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7월 23일에 제멋대로 궁중에 난입하여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재집권시켰다. 그리고 7월 25일에 아산만 앞에서 일본 군함 세 척이 청나라의 군선 두 척을 포격하여 선전포고(宣戰布告)도 없이 청일전쟁이 개전(開戰)되었다. 8월초에는 섭지초(葉志超)가 이끄는 청군이 아산·성환 등지에서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의 공격을 받고 패주해 대동강을 건너 평양으로 후퇴했다. 이런 가운데 한양 주재 일본공사관 스기무라[杉村濬]의 요구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어 국왕의 전통적인 인사권·재정권·군사권에 제약을 가하고, 궁중의 잡다한 부서들을 궁내부 산하로 통합하여 그 권한을 축소시키는 한편, 종래 유명무실하였던 의정부를 중앙통치기구의 중추기관으로 만들고, 그 밑에 육조(六曺)를 개편한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 등 8아문을 분속시켜 그들 아문에 권력을 집중적으로 안배하는 의정부관제안(議政府官制案)이 마련되어 7월 27일에 공표되었으니 이것이 갑오경장의 첫번째 개혁이었다. 그 후 8월 22일에는 종래 18등급의 관등품계(官等品階)를 12등급으로 축소하여 칙임관(勅任官, 正從1·2品)·주임관(奏任官, 正從3∼6品)·판임관(判任官, 正從7∼9品)으로 구분하고, 관료충원을 위한 과거제도를 폐지하는 대신에 8월 12일 새로이 선거조례(選擧條例)와 전고국조례(銓考局條例)를 제정하여 주임관과 판임관의 임용권을 의정부의 총리대신 및 각 아문의 대신들에게 부여하는 궁내부관제안(宮內府官制案)도 실시되었다.

 

그러나 평양 전투에서 일본군이 청군 2천여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자 일본 측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고, 갑오정권(甲午政權)의 개혁적 성격도 희석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군수물자만 자국에서 가지고 왔을 뿐, 8월 27일 체결된 조일맹약(朝日盟約)에 의해 군수물자 수송의 노동력을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했으므로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의 자주권은 유린되었다. 그러자 농민군의 지도부는 그 해 10월 다시 전면적인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최고 사령관인 전봉준은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를 세워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하여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했다. 최시형(崔時亨)을 중심으로 한 북접(北接)세력을 설득하여 무장투쟁에 합세하도록 한 전봉준은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남접(南接)과 북접의 병력을 모두 이끌고 공주로 진격했으나 우금치전투(牛金瀨脇速)에서 성하영(成夏永)·이기동(李基東) 등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 제19대대에게 7만여명의 병력을 잃는 참패를 당하여 갑오농민항쟁은 좌절되었다.

 

한편 일본군은 9월 17일에 청나라 해군 북양함대(北洋艦隊)를 패주시키고 10월 24일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했다. 부패한 청군 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18일에는 여순(旅順)이 점령되었고 일본군은 여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무르익자 이홍장(李鴻章)은 일본 측에 화의(和議)를 제안하였고, 1895년 4월 17일 청나라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되어 여순과 대련(大連), 대만(臺灣) 등이 일본의 영토로 넘어갔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자적인 지배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 일본인들이 조선의 국모(國母)를 살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

 

1894년 9월에 새 일본공사로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섭정(攝政)으로 있던 흥선대원군을 조정에서 쫓아내고 군국기무처에서 자신이 작성한 혁신안 20조를 고종에게 제출했다. 이것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되는 조항이었고,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여 이노우에를 고문으로 선임했으며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11월 21일에 고종의 친정이 다시 시작되었고 군국기무처는 자문기관이 되었다.

 

12월 12일에 고종은 세자 이작(李坧)을 데리고 종묘에 나가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맹세하는 서고문(誓告文)을 고했다. 실천을 다짐한 ‘홍범14조(洪範十四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나라에 의존하는 관념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실히 건립한다.

둘째, 왕실전범(王實典範)을 제정함으로써 대위(大位) 계승과 종친·척족의 명분과 의리를 명백히 한다.

셋째, 대군주(大君主)는 정전(正殿)에 나와 정사를 보고, 국정은 각 대신과 친히 논의하여 재결하며, 후빈종척(后嬪宗戚)의 간여를 금한다.

넷째,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는 분리하여 혼합됨을 금한다.

다섯째,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권한을 명백히 한다.

여섯째, 백성들이 내는 세금은 모두 법령이 정한 바에 따르며, 명목을 더해 함부로 징수하는 것을 금한다.

일곱째, 조세의 부과 징수와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할한다.

여덟째, 왕실비용을 솔선 절감하고 각 아문·지방관의 모범이 된다.

아홉째, 왕실비·관부비용은 연간예산을 작성하고 재정적 기초를 확립한다.

열째, 지방관제를 개정하고 지방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열첫째, 국내의 총명한 자제들을 널리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기예를 견습한다.

열둘째, 장관(將官)을 교육하고 징병법을 실시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립한다.

열셋째, 민법·형법을 엄히 제정하여 함부로 감금·징벌을 금지하며 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열넷째, 인재를 구함에 문벌·지벌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골고루 등용한다.

 

이 조항들은 그 동안 군국기무처에서 시행한 개혁정책과 이노우에가 제시한 20조 혁신안을 요약한 것인데,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확신하고 조선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일본 제국주의 예속화의 도구로 써먹은 표본이었다. 그런 가운데 개화당의 개혁 의지도 반영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는 조선을 자주국가로 인정하는 척 하면서 보호국화(保護國化) 작업의 수순을 밟는 일제(日帝)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1895년 1월에는 여러 개혁조치를 문서로 작성해 반포하고 이어 행정·군사·재정 등의 개혁조치를 항목에 따라 세분화함으로써 마무리지었다. 이것은 바로 을미개혁(乙未改革)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된 사건 전후(前後)에 실행되어 백성들의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극도에 이른 상황에서 일본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개혁이었기 때문에 민중의 반발이 매우 심했다.

 

이노우에는 을미개혁을 단행하면서 고종과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압박하여 드러내놓고 내정을 간섭했을뿐만 아니라 이권을 낚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는 조선의 철도와 전신 등의 이권을 독점적으로 확보하고자 했으며 조선에 차관(借款)을 제공함으로써 남부 곡창지대를 식량확보의 기지로 삼고 일본 화폐의 유통권을 형성시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후원하고 앞장섰던 개혁정책은 궁극적으로 일본의 이권과 맞물려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추진했던 보호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노우에가 이용하려 했던 김홍집·박영효 등은 도리어 그를 불신해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갔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를 확정짓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1895년 4월에 체결되었다.

 

민씨 왕비는 이노우에의 조선보호정책(朝鮮保護政策)에 저항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방략을 구상했다. 그녀는 청나라가 조선에서 누렸던 기존의 이권을 이제 러시아에 보장해 주어 러시아가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도록 했다. 물론 러시아가 이를 마다할 리는 없었으나, 그녀는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얻은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청나라에 돌려주게 했지만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발언권은 아직 살아 있었다. 민씨 왕비는 이것을 정밀하게 읽을 줄 몰랐고 알아낼 수 있는 통로도 없었다. 당시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親露派]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와 자주 만났고 때로는 궁중에 들어가 민씨 왕비와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던 일본 측은 러시아에 “조선을 분할하자”고 제안했다. 다시 말해 조선의 땅을 이리저리 찢어서 두 나라가 점령하자는 것이다.

 

민씨 왕비는 그 무렵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있던 앨런(Horace Newton Allen)을 이용해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무너뜨리고 박정양(朴定陽)·이범진·이완용을 기용해 새 내각을 구성했다. 민씨 왕비는 이렇듯 미국과도 손을 잡아 일본을 내치려 했는데, 미국공사 실(J. Sill)은 일본의 견제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보고 새 내각 구성에 참여해 성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조선에서 가장 금맥이 풍부하고 질 좋은 금이 생산되는 운산금광 채굴권을 따냈다.

 

조선에서 반일(反日)·친러[親露]의 기세가 점점 치솟게 되자 이노우에는 불안감을 느끼고 무단적(武斷的)인 방법으로 조선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후임으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천거했는데, 그는 육군 중장(中將)을 지냈던 전형적인 군인으로 외교(外交)에는 무지한 인물이었다. 미우라는 7월 13일에 서울로 부임했으나 신임 공사가 왔는데도 이노우에는 17일 동안이나 그대로 공사관에 머물러 있었다. 미우라와 함께 왕비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기 위해서였다.

 

미우라는 아다치 겐조[安達謙藏]가 서울에서 경영하는 한성신보사(漢城新報社)의 사원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여우 사냥’을 지시했다. 일본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는 흥선대원군을 왕비 제거 계획에 끌어들이고 조선 군대를 전면에 내세워 일을 진행시킨다면 조선 민중에게 왕비를 살해한 주범들이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들이라고 알려지게 될 것으로 여겼다. 결행일은 8월 20일 새벽으로 정했다. 각 부서와 책임자를 지정하고 역할을 분담시키고 행동지침을 하달했다. 일본공사관의 모든 인력, 서울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수비병력, 그리고 서울에 주둔하는 경찰관과 낭인들이 동원되었다. 또 당시 조선 조정에 고용되어 있던 고문관, 신문기자, 통신원이 망라되었으며 조선군 훈련대(訓鍊隊)의 지휘관 우범선(禹範善)과 갑오농민항쟁 진압으로 악명이 높은 이두황(李斗璜) 등도 합류시켰다.

 

이날 새벽 일본군의 한 무리는 조선 관리 이주회(李周會)를 데리고 공덕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찾아갔다. 일본군은 그를 경복궁(景福宮)으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거절하자 강제로 결박하여 돈의문(敦義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일본군 본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광화문(光化門)과 경복궁 일대에는 시위대(侍衛隊)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시위대장 홍계훈이 광화문 밖에서 강력하게 저항해 잠시 지체되었으나 홍계훈이 총탄을 맞고 쓰러지자 일본군과 낭인들은 거침없이 경복궁으로 난입했다. 가을철의 아침 6시가 조금 넘었으므로 사물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남여(藍輿)에 태운 흥선대원군을 근정전(勤政殿) 옆의 강령전(康寧殿)에 내려놓은 뒤 한 무리는 건청궁(乾淸宮)으로 달려가고 한 무리는 곤령합(坤寧閤), 옥호루(玉壺樓)로 몰려갔다. 낭인들은 잠결에 일어나 공포에 떨고 있는 국왕과 세자의 옷을 찢었고 세자는 상투가 잡힌 채 낭인이 휘두른 칼을 맞고 의식을 잃었다.

 

낭인들이 옥호루로 달려가는 모습을 본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이경직(李耕稙)이 달려가서 막으려 하자 칼로 그의 팔을 베고 총을 쏘아 죽였다. 낭인들은 이경직의 시체를 밀치고 내실로 들어가 왕비와 궁녀들을 칼로 베어 죽였다. 낭인들은 왕비의 시체에서 옷을 벗겨내 나체(裸體)로 만든 뒤 하의(下衣)를 벗어 남근(男根)을 유방(乳房) 사이에 넣고 하체를 움직이는 시간(屍姦) 행위를 하며 능욕했다고 한다.

 

낭인들은 왕비의 시체를 홀이불에 싸서 옥호루 옆의 숲 속으로 옮겨 놓고 장작을 쌓아 미리 준비한 석유를 뿌린 뒤 태워 버렸다. 타다 남은 시체와 재를 모아 우물에 쓸어넣기도 하고 땅에 묻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낭인들이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궁궐은 물샐틈없이 통제되었고 일본 군인과 영문도 모르는 훈련대 병사들이 삼엄한 경비를 펴는 가운데 민씨 왕비를 시해한 낭인들은 궁궐을 빠져나갔다.

 

미우라는 아침 7시쯤 경복궁에 들어와 고종을 알현하고 “훈련대 군인들이 궁궐을 난입했으니 그들을 엄벌하고 왕비가 궁궐을 탈출했으니 왕비를 서인(庶人)으로 만드는 조치를 내리시오”라고 강권했다. 하지만 왕비 시해의 범죄를 흥선대원군이나 조선군 훈련대에게 몰아세우려는 이런 음모가 먹혀들 리가 없었다. 미국인 고문 다이(W. M. Dye)와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A. J. Sabatin)이 그 현장을 생생히 목격한 것이다.

 

사건 직후 베베르와 앨런을 비롯해 독일, 영국, 프랑스의 외교관들은 미우라 공사를 불러 책임을 물었다.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훈련대를 동원하여 민씨 왕비를 살해했다고 강변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앨런은 미우라가 직접 개입한 사실을 조목조목 들었고 미우라는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베베르는 친일 내각의 외무아문(外務衙門)을 방문해 자국 정부의 전보를 보여 주며 “살인자와 살인 교사자는 재판에 회부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미국, 러시아 등 열강은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일본은 야만의 나라’라며 세계 여론은 일본을 규탄했다.

 

일본 정부는 미우라와 관련자 40여명을 자국으로 소환해 재판절차를 밟음으로써 이 사건을 무마하려 들었다. 즉 주재국 공사의 개입만을 인정하고 본국 정부는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함을 강조하며 최후 방어선을 쳤다. 8월 29일에 미우라는 본국에 소환되었고 관련자들은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감옥에서 영웅 대접을 받다가 다음해 봄에 사태가 잠잠해지자 증거 불충분이란 판결을 받고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그후 그들은 조선 침략의 첨병으로 활동하게 된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진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본 정부가 각본을 쓰고 이노우에가 감독을 맡고 미우라가 주연을 하고 낭인들이 일선 행동대로 출연해 한편의 드라마를 만든 것이었다. 흥선대원군과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한낱 구경꾼에 불과했다.

 

10월에는 안경수(安駉壽)·이재순(李載純)·이충구(李忠求)·이도철(李道徹) 등이 경복궁에 유폐되어 일본인들과 친일 내각에 둘러싸여 있는 고종을 탈출시켜 새 내각을 꾸미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정동파(貞洞派) 관료인 이범진(李範瑨)·윤웅렬(尹雄烈)·이하영(李夏榮)·윤치호(尹致昊) 등이 가담해 있었다. 그리하여 남만리(南萬里)와 이규홍(李奎泓) 등이 친위대 병사 8백여명을 거느리고 경복궁의 건춘문(建春門)으로 돌입하려 했으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삼청동으로 진출해 춘생문의 담을 넘어 경복궁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시위대장 이진호의 밀고로 어윤중(魚允中)이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삼엄한 경계를 펴면서 쿠데타를 모의한 군인들을 진압했다.

 

김홍집 내각은 미우라의 복안대로 궁내부대신에 이재면(李載冕), 군부대신에 조희연(趙羲淵), 학부대신에 서광범, 경무사(警務使)에 조희연 겸임, 내무부협판에 유길준(兪吉濬), 농상공부협판에 정병하, 탁지부대신에 어윤중, 중추원의장에 박정양이 임명되어 개편되었다. 친일 내각은 11월 15일 단발령(斷髮令)을 공포하고 국왕과 세자를 포함해 대신들부터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갈아입는 의식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새로 학부대신이 된 이도재(李道宰)는 4천년의 습속인 상투와 의복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며 단발령에 반대하고 사직했다. 이도재의 저항은 암울한 조선의 앞날을 예고한 것이었다.

 

{계속}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