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
북로군정서의 군사조직은 앞에서 설명한 바대로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사령부와 사관연성소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즉 사관생도를 교육훈련시켜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의 인적 기반을 조성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사관연성소의 소장은 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이었으며, 교수부장은 나중소, 교관은 이범석, 학도단장은 박두희, 제1학도대장은 최준영(崔俊榮), 제1학도대 제1구대장 한건원(韓建源), 제2구대장 김훈(金勳), 제3구대장 강화린(姜華麟), 제2학도대장 겸 제2학도대 제1구대장 오상세(吳祥世), 제2구대장 이민화(李敏華), 제3구대장 백종렬(白鍾烈) 등이었고 이 밖에도 교관으로 대한제국 시위대(侍衛隊) 부교(副校)를 지냈던 노은(芦隱) 김규식(金奎植), 대한제국 육군 참위(參尉) 출신인 김찬수(金燦洙), 흥업단(興業團)에서 파견한 강승경(姜承卿), 중국어 통역 담당 이천을(李天乙), 일본어 통역 담당 윤창현(尹昌鉉), 러시아인 마츠커델, 김홍국(金洪國) 등이었다. 사관연성소의 군사교육은 충실한 교관진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관연성소의 기숙사와 연병장은 1919년 가을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920년 2월 초에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에서 30리 떨어진 삼림 속에 설치했다. 이곳은 소왕청에서 90리 떨어진 깊은 산림지대로, 소왕청 입구로부터 60리가 되는 서대파 십리평까지는 우마차(牛馬車)도 다닐 수 없는 산실이라 북로군정서가 근거지를 설치한 후 4월부터 사관생도들이 작업하여 도로를 만들었다. 따라서 서대파 십리평에서 사관연성소가 있는 밀림까지는 30리 길을 지나야 병영까지 도착할 수 있는 오지였다. 물론 모든 통행과 운반은 인력에만 의존해야 했으나, 이러한 불편까지 감수했던 것은 일본군의 대규모 진입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북로군정서가 군사기지를 설치한 서대파 십리평 오지는 속칭 ‘양진산’이라 불리는 그다지 높지 않는 산기슭으로서, 동쪽으로 약 1백리를 가면 훈춘 황구에 도달하고, 동북쪽으로 1백리를 가면 나자구에 도달하며, 북쪽으로는 노령(露領) 연추(延秋)지방으로 통하고, 남쪽으로 약 56~60킬로미터를 가면 양자천자(凉子泉子) 방면으로 통하는 교착점에 위치하여 지리상으로 어떤 곳으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전략상 유리한 곳이었다.
대왕청에서 사관연성소가 있는 근거지는, 꼬불꼬불한 냇물을 따라 만든 소로를 따라 약 40리를 들어가다 보면 한인(韓人) 40여호가 사는 작은 촌락이 나온다. 마치 섬같이 생겼다 하여 1차도(次島)라 불리는 곳이며, 여기에서 10리를 더 들어가면 한인 20여호가 사는 2차도가 나온다. 여기에서 10리를 들어가면 한인 10여호가 사는 3차도, 다시 5리를 들어가면 한인 10여호가 살고 있는 4차도가 나온다. 여기에서 다시 약 5리를 더 들어가면 십리평에 도착하며, 십리평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25리를 들어가면 사관연성소 연병장에 도착하게 된다.
사관연성소 병영과 훈련장은 1920년 2월에 건설한 것이다. 병영은 중국식 6간방 6동과 5간방 2동 계 7동을 만들어 1동은 사무소로, 1동은 일반인 숙사로, 나머지 5동은 병동(兵棟)으로 사용하였다. 병동의 크기는 길이 60자에 폭이 20자였으며, 외벽은 통나무를 쓰고 천장은 목면을 천막식으로 중앙을 높게 하여 비와 이슬을 막았다. 연병장은 십리평에서 약 15리 떨어진 밀림을 개간하여 평지로 만들어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했다.
이곳에다가 29개의 가마솥을 걸고 대규모 병력이 모여 군사훈련을 하니 중국 연길 당국자와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군정서 외교부장인 김영학(金永學)은 누차 연길 도윤(道尹)에게 찾아가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한 군사훈련이라며 협조를 구하여 중국 당국으로부터 묵인을 얻어 냈다.
★ 훈춘사변(琿春事變)
1920년 초반 노령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뿐만 아니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의군부(義軍府), 의민단(義民團), 신민단(新民團), 혈사단(血詞團), 광복단(光復團),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여러 단체가 일제의 군사력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홍범도(洪範圖)가 총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이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대담하게 감행하여 1919년 8월에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을 습격했고, 9월에는 갑산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하고 자성(慈城)에서 3일간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처럼 만주 독립군들의 크고 작은 유격전(遊擊戰)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커다란 지장이 발생하자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대규모 병력을 만주에 파견하여 독립군 세력을 일거에 소탕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박승길(朴承吉)이 이끄는 신민단 소속 유격대원 30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 소대를 격파하고 날이 저물어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니이미[新美] 중위(中尉)의 인솔 아래 1개 중대 병력과 헌병경찰대를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신민단 대원들에 대한 추격에 나섰다. 일본군은 삼둔자(三屯子)에 이르러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에 박승길 소대(小隊)는 마을 서북쪽에 있는 4백여미터 정도의 일광산에서 기습공격을 가하여 일본군 9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자군(自軍)이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서 패배했다는 보고를 접한 일본군 제19사단장 다카시마[高嶋] 중장(中將)은 야스카와[安川] 소좌(少佐)를 지휘관으로 삼은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가 독립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 때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안무(安武) 휘하의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소속 경비대, 최진동(崔振東)이 통솔하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등과 군사통합을 이루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라는 명칭의 연합군을 구성,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은 우선 마을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게 한 뒤 이천오(李千五)·강상모(姜尙模)·강시범(姜時範)·조식권(曺植權) 휘하의 병력을 동·서·북단 계곡에 각각 매복시키고 이화일(李化日) 분대(分隊)를 봉오동 입구로 보내 일본군을 포위망 안으로 유인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920년 6월 7일 오전 11시 30분경에 약 4백명 가량 되는 일본군의 전투병력이 봉오동의 골짜기 안으로 추격해 들어오자 6백여명의 독립군 병사들은 삼면에서 일제사격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무수히 쓰러뜨렸다. 일본군은 3시간 정도 응전하다가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고 퇴각했는데, 강상모가 이끄는 독군부 제2중대가 도주하는 적병들을 추격하여 다시 큰 타격을 가했다. 이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하고 2백여명이 부상당하는 참패를 당했으나 독립군은 고작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이 나오는 작은 피해만 입었을 뿐이고 전투 이후 일본군 측에서는 화룡현(和龍縣) 흡강(洽江)의 도구(渡口) 통행을 금지하는 등 독립군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면서 중국의 상해시보(上海時報)가 1920년 6월 22일자 기사(記事)로 보도하였다.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전투력이 예상보다 강력했으며,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의 수립이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월강추격대대장 야스카와 소장은 독립군에 대해 “전부 러시아식 소총(小銃)을 갖고 탄약(彈藥)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훈련도 상당히 받은 듯 하고, 방어전(防禦戰)을 치를 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고 다카시마 도모타케[高島友武] 사단장에게 보고하였다. 또 독립군이 ‘정식의 군비(軍備)를 착용하고 사령(辭令)에도 일정한 예식이 있는 등 통일된 군사조직을 갖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봉오동전투에서의 패배가 일본군에게 ‘심각한 악영향의 결과를 초래’했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일제(日帝)는 만주일대에서 독립운동 군사단체(獨立運動軍事團體)들이 눈에 띄게 군세(軍勢)를 확장하자 이에 불안감을 느끼고 만주 지역 각지의 영사관에 전투경찰병력을 크게 증가시켜 독립군에 대한 체포와 탄압에 열을 올렸으며, 때로는 중국관헌을 회유·협박하여 이용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1920년 5월에 이르면 조선총독부의 적지(赤地) 경무국장, 적총(赤塚) 봉천성(奉天省)총영사, 재등(齋藤) 길림독군 고문 등은 봉천에서 간도지역 독립군 검거에 관한 사항을 협의하고 자신들의 결정사항을 장작림(張作霖) 동삼성 순열사(東三省巡閱使)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봉천에서는 일본인 경찰고문 2명을 책임자로 하는 중·일합동수색대가 편성되어 독립군 체포와 독립군 기지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활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이러한 활동은 독립군 토벌작전에 착수했음을 의미한다. 상전대(上田隊)는 1920년 5월 13일부터 7월 3일까지 흥경·유하·해룡·통화 등지에서, 판본대(坂本隊)는 5월 15일부터 8월 18일까지 안동·관전·환인·통화·집안·임강·장백 등지에서 한족회(韓族會)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소속된 한국인들을 체포·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7월 16일에 다시 중국당국을 강박하여 일본군의 파견장교 재등(齋藤) 대좌(大佐) 등의 감시하에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중국군 제2혼성여단 보병 제1연대장 맹부덕(孟富德)의 부대가 동원되었다.
중국군이 토벌대를 편성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대한국민회에서는 맹부덕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첫째, 중국군은 일본군의 간도침입의 구실을 막기 위하여 부득이 독립군 토벌을 위한 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독립군은 이와 같은 중국 측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 대책을 세워 상호 타협·행동한다. 둘째,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상에서 군인의 복장이나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동함으로써 중국 측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 셋째, 중국군은 토벌을 위한 출동 전에 독립군에게 그 내용을 사전에 통보하여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준비와 시간을 갖게 한다. 넷째, 중국 인민과 독립군은 서로 피전(避戰)을 약정하고 중국군은 출동해도 독립군을 공격하지 않고 독립군의 이동과 산림지대 등지에서 새 기지 건설 등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이 합의를 통해 독립군은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전력을 보완할 수 있었다.
독립군과 중국군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자 대한국민회에서는 1920년 8월 하순부터 각 지방지회와 독립군 부대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통지하고 부대의 근거지 이동을 권고하였다. 이에 명월구에 주둔하고 있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안도현 방면의 백두산록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또 의란구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안무의 국민회 경비대도 안도현 방면을 향해 이동하였다.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신민단·의군부·광복단 등의 독립군도 근거지 이동을 시작하였다. 다만 왕청현에 있던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졸업식 때문에 이동을 미루고 있다가 중국군과 협의하여 9월 9일 사관연성소 생도들의 졸업식을 거행한 후 9월 17일에애 서대파를 출발하여 10월 12~13일에 청산리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각지에 산재한 독립군은 청산리로 집결하는 등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중국 군대를 이용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했던 일제의 계획은 처음부터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일제의 강압적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군은 9월 4일 대한독립군의 근거지였던 명월구에 도착하여 독립군의 막사만 파괴하고 연길로 돌아왔다. 9월 19일에는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서대파에서도 비어있는 사관연성소의 막사만 불태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이미 1920년 8월에 확정한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에 의거하여 직접 간도에 출병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제는 1920년 9월 12일과 10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장강호(張江好)의 마적단(馬賊團)을 이용하여 훈춘사변(琿春事變)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제2차 훈춘사변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약 4백명의 장강호 휘하 마적부대가 9월 25일 훈춘 북방의 번자구자(藩子溝子)에 출현하여 10월 2일 상호 5시에 3문의 야포(野砲)를 동원, 훈춘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 훈춘의 영사관 분관에 있던 일본인의 피해는 피살자가 14명(한국인 순사 1명 포함), 중경상자가 30여명이었다. 영사관에 구금되어 있던 한국인 3명과 중국인 1명은 피살되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저들의 피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10월 4일자『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는 마적의 계통은 분명치 않으나 중국군이 얼마쯤 섞여 있었고 일본인을 습격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배일(排日)조선인이 있는 듯하다고 보도하였다. 같은 날짜의 조선주차군사령부 발표에서도 ‘단순한 마적이 아니라 과격파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하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마적단은 독가스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장강호는 중야천락(中野天樂)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총독부 고등과장의 비호 아래 천우당약방(天祐當藥房)에서 독가스를 만들어 한국인 살해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훈춘사변 조작에 성공한 일제(日帝)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일본의 민주거류민 회장에게 일본인과 영사관의 보호를 위해 출병을 청원하는 전보를 당국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나남(羅南)에 있는 일본군 제19사단은 이에 응하는 형식으로 안부(安部) 대대(大隊)를 10월 2일 당일 훈춘으로 불법 파견하였다. 이후 조선주차군사령부는 10월 6일부터 작전계획에 따라 일본 육군 각 부대를 간도의 중요지역에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해당 사단에 하달했다. 10월 7일 일본 내각회의에서는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결정하였다.
일본 민간인을 해친 마적단을 소탕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제 목적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공격하고 만주 지역의 한국인들을 전부 제거하겠다는 데에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독립군에게 서서히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