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 장군을 중심으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군단(義軍團)·신민단(新民團)·광복단(光復團)·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등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작전(聯合作戰)을 펼쳐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승리를 거두고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치며 전투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왕청현(汪淸縣) 북부 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일제(日帝)의「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게 되자, 일본군은 간도 지역에 사는 한국 민간인들에게 보복을 가하였다. 그들은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납치하고 촌락과 학교·교회 등에 불을 지르며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불리는 이 극악적인 사건에서 일본군은 반일운동(反日運動)에 가담하는 한국인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한다는 소위 초토화작전(焦土化作戰)을 전개하였다.
화룡현(和龍縣) 장암동(獐巖洞)에서는 28명의 한국인 기독교도를 세워 놓고 사격 연습의 과녁으로 삼아 총살했으며, 연길현(延吉縣) 의란구(依蘭溝)에서는 30여호의 전 주민을 몰살하고 어느 4형제를 불타는 가옥 속으로 몰아넣어 죽이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연길현(延吉縣) 와룡동(臥龍洞)에서 창동학교(昌東學校) 교사 현우석(玄優碩)을 붙잡아 얼굴 가죽을 칼로 도려내어 모두 벗기고 두 눈을 빼내어 누구인지 식별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또 어린아이를 참도(斬刀)로 베어 죽이고 시체를 태워 버렸으며 10대 소녀를 강간한 뒤 총기(銃器)로 사살하는 등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일본군의 야수적 만행에 적어도 3천 4백 69명 이상의 무고한 간도의 한국인이 살해당하였던 것이다. 일설에는 1만여명 정도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고도 한다. 독립군 지도자들은 일본군의 야만적인 학살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분개하였다. 특히 대한독립군의 사령관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펼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므로 당장 독립군의 모든 병력을 규합하여 조·만국경(朝滿國境)의 일본 군사기지를 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의 패전보복(敗戰報復)으로 일반 주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으므로 지금은 은인자중(隱忍自重)해야 한다며 신중론을 내세웠다.
1920년 12월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주도 아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신민단(新民團)·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의 대표자들이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가 장기항전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라는 이름의 통합된 부대를 결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에는 북로군정서의 총재인 서일(徐一)이 추대되었고, 김좌진 장군은 홍범도·조성환(曺成煥)과 더불어 부총재에 선임되었다. 총사령관은 북로군정서의 보병대대장인 김규식(金奎植)이, 참모장에는 이장녕(李章寧)이, 여단장에는 이청천(李靑天)이, 중대장에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졸업생 출신인 김창환(金昌煥)·조동식(趙東植)·윤경천(尹擎天)·오광선(吳光鮮)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의 총병력은 3천 5백여명이었고, 3개 대대로서 27개의 소대로 분류된 대부대였다.
이들은 대오를 정비한 뒤 북만주의 호림(虎林)·요하(饒河)현을 거쳐 1921년 1월에 우수리강을 건너 소련 땅 이만으로 들어갔다. 독립군의 시베리아 이동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대한국민의회의 회장인 문창범(文昌範)과 재무부장 한창해(韓滄海), 자유대대장 오하묵(吳夏默) 등은 독립군의 북만주 북상 소식을 듣고, 1920년 12월 초순경 하바로프스크에 주둔하고 있던 원동정부(遠東政府) 혁명군 제2군단 본부에 가서 독립군 부대들의 소련 이동문제를 상의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협상은 잘 진행되어 독립군 부대들을 우선 이만에 집결시킨 뒤 다시 자유시(自由市:알렉셰프스크)로 이동시키기로 하였다.
또 시베리아의 치타시에 있던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원동지도국 한국인 부서 소속 김진(金鎭)·계봉우(桂奉寓)·장도정(張道政) 등은 1920년 12월 21일 비밀회의를 개최하고 1921년 2월 10일 독립군 부대들의 대표회의를 치타에서 열고 군사위원회와 총사령부를 창설한다는 내부방침을 확정시켰다. 그 뒤 이들은 이 방침에 따라 만주와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무장세력을 시베리아로 집결시키게 된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 초순 이만에 진입하여 약 2주일을 주둔하였다. 그러는 동안 한창해와 오하묵이 독립군의 실질적 지도자인 김좌진과 홍범도 장군을 찾아왔다.
“이 곳 소련 땅의 동포들도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두 분 장군님들의 활약에 크게 감동하고 있습니다. 조국은 하루빨리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희들도 독립군을 위하여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하여 한가지 방략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고마운 일이오. 그래, 무슨 방략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오?”
“지금 새로 일어난 소련의 혁명 정부는 제정시대를 부활시키려는 백계군(白系軍) 세력을 토벌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만약 독립군이 혁명 정부의 적계군(赤系軍)을 도와 백계군을 진압하는 싸움에 참전한다면 소련 정부는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제공하고 피복과 군량도 지원해줄 것입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소. 우리 독립군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우는 군대요. 어찌 다른 나라의 내전에 참가하여 피를 흘린단 말이오? 나는 절대 응할 수 없소.”
김좌진 장군은 오하묵의 제안에 반발했지만 홍범도 장군은 생각이 달랐다.
“우리가 일단 시베리아에 들어온 이상 원동정부 당국과 원만한 협조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만주에는 이미 일본군이 진출해 우리 동포를 핍박하고 있으니, 독립군의 근거지를 개척할 수 있는 곳은 여기 시베리아 밖에는 없소.”
김좌진 장군은 홍범도 장군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타국의 영토에서 분란을 일으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일단 한 발 뒤로 물러서기로 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에 원동정부 혁명군 제2군단은 독립군 측에 자유시로 가기 전에 총기(銃器)·탄약(彈藥)·폭탄류(爆彈流) 등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 이유는 수천명의 무장병사들이 자국 영토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적절한 통제를 가해야 하고, 독립군 부대가 갖고 있는 총기들은 그 종류가 일정하지 않아 효율적 활용이 어려우므로 일단 회수한 다음 러시아제 총기를 다시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독립군 장병들은 의구심을 갖고 선뜻 응하지 않았다. 특히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의 군인들은 원동정부 측이 일제와 결탁하여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시도하려 한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우리 독립군의 총기와 탄약은 간도 동포들의 피와 땀이 배인 성금으로 구입하였고, 그 일부는 일본군경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빼앗은 것이기도 하오. 장병들이 자신의 수족(手足)보다도 더 애지중지하게 다뤄 온 군사장비들을 순순히 내줄 수 없소.”
김좌진은 독립군단의 장병들을 인솔하여 간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홍범도는 그의 의견에 반대했다.
“소련 혁명공화국은 제국주의 강대국으로부터 핍박받는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소. 우리가 비록 청산리의 전역(戰役)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만주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의 강대한 군사력에 정면으로 맞설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오. 우리가 그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저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오.”
그러나 홍범도와 김좌진 두 독립군 지도자는 끝내 서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애당초 자주적인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 항일전(抗日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소. 나는 일적(日敵)의 탄압으로 고통받으며 신음하는 우리 동포들이 있는 간도로 돌아갈 것이오.”
결국 김좌진·이범석 등 북로군정서 계열의 일부 독립군은 이만을 떠나 우수리강을 건너 북만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이어 발생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독립군단은 결정적 타격을 받고 말았다.
1920년 9월 당시 우수리강 유역의 적계군 수비대장 오하묵은 한인자유보병대대(韓人自由步兵大隊)를 창설하고, 이어 10월에 니콜라에프스크에서 활동하던 박일리아의 니항군(尼港軍)이 자유시에 도착한 뒤 한국인 무장세력은 이제 양파를 중심으로 크게 양분되어 주도권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자유시에 도착한 독립군단 측은 오하묵과 박일리아 일파 사이의 주도권 쟁탈전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양파(兩派)에서는 간도의 독립군 부대들을 서로 자기 파에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1921년 전반기 시베리아 지방의 한국인 민족운동계는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고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연계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한국인 무장세력의 군통수권을 장악하기 위한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오하묵·김하석(金夏錫)·최고려(崔高麗)·문창범 등은 이르쿠츠크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고 박일리아·한형권(韓馨權)·이용(李鏞)·박진순(朴鎭淳) 등은 상해파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양파는 형성과정에서 개인적 감정의 대립이 없지 않았고 한국인 민족운동에 대한 노선의 차이도 있었다. 즉, 한국의 민족해방을 우선시하느냐, 아니면 혁명과정에 있는 러시아의 방위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우선 일본군과 싸우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약간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국을 해방시킨 뒤에 세우려고 한 정부의 형태에 있어서도 상당한 견해차가 있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1921년 3월 중순 이르쿠츠크에서 긴급히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臨時高麗革命軍政議會)를 소집하였다. 그 목적은 만주에서 오는 독립군 부대와 시베리아 한국인들이 조직한 모든 의용군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오하묵이 지휘하는 한인자유보병대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적계군체제로 개편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 의장 겸 총사령관에 러시아인 갈란다라시월리가 임명되었고 부사령관에 오하묵이 임명되었다. 5월 2일에는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임시사령관 자격으로 오하묵이 자유시에 부임하였고, 같은 달 18일에는 이르쿠츠크에서 정식으로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가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갈란다라시월리가 의장 겸 총사령관에 그대로 유임되었다.
시베리아에 남은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 홍범도는 양파의 갈등 속에서 가능하다면 이들을 조정하여 단결을 이루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5월 6일에 오하묵·최진동과 함께 자유시에 집결된 각 군사단체의 통일문제를 협의하였다. 6월 2일에는 박일리아의 방해를 무릅쓰고 부대원 440여명을 거느리고 오하묵 진영으로 넘어왔다. 홍범도·안무·이청천의 부대는 6월 25일에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의 군정의회 측 가담은 박일리아 진영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갈란다라시월리와 오하묵은 박일리아를 비롯한 상해파 독립군에게 군정의회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여러 차례 경고하였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자 1921년 6월 28일 한인자유대대와 러시아 적계군 29연대는 박일리아의 사할린 의용대와 최진동·허근 등이 이끄는 독립군을 포위·공격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생겼다. 상해파의 주장에 의하면 이 때 사망 272명, 익사 37명, 행방불명 250여명, 포로 917명 등의 희생자가 나왔다고 한다. 반면 군정의회 측에서는 그 해 9월 30일 사망 41명, 도주 50명, 포로 900여명으로 피해를 공식발표하였는데, 실제 희생자 수가 축소된 듯 하다. 또 현장에 있었던 김승빈(金承彬)의 주장에 따르면 전사자 30여명, 익사자 상당수, 포로 8백여명이었다고 한다. 포로 가운데 다수는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에 넘겨져 벌목 작업에 동원되었다. 이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그 내막이 아직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한국인 민족운동 세력 사이의 운동 노선을 둘러싼 내분과 혁명정부의 한국인 무장세력에 대한 전략 등이 복합적으로 엇갈려 발생한 것이었다. 만약 오하묵과 박일리아 등이 단합했더라면 후일 무력반일독립운동(武力反日獨立運動)이 훨씬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소련 적계군(赤系軍)과의 합작(合作)을 통해 항일전(抗日戰)을 벌이고자 했던 역전의 용장 홍범도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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