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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5.新民府 ⑵

조의선인 |2009.07.10 06:49
조회 162 |추천 0

 

★ 신민부(新民府)의 성립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고 지휘관인 홍범도(洪範圖) 장군과 이별하고 북만주로 돌아온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병사들은 1921년 8월부터 밀산(密山)과 영안현(寧安縣)을 중심으로 군진(軍鎭)을 형성하여 다시 항일무장투쟁(抗日武鬪爭)을 벌이기 위해 준비하였다. 이 때에 구춘선(具春先) 휘하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계통 병력은 돈화와 액목현을 중심으로, 그리고 신민단(新民團)·광복단(光復團)·한민단(韓民團) 등의 병력들도 각기 영고탑(寧古塔)·목단강(牧丹江)·동녕현(東寧縣) 등을 중심으로 군진을 갖추었다. 이처럼 북만주 각 지역에 근거지를 갖춘 독립군들은 남북만을 연결하는 교통 요지인 돈화·액목·안도현을 거점으로 각지에 특파대를 파견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남만주의 독립군들과 연락을 취했다. 소련에서 돌아올 때 독립군들은 한 세력으로 뭉치지 못하고 작은 그룹으로 무리를 지어 돌아왔는데, 이들은 각기 한국인 촌락에 흩어져 들어가 있어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따라서 각 독립군에서는 자기들 소속의 병사들을 모으기 위해 사방으로 연락병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독립군 병사들은 원 소속 부대를 찾아 들어가기도 했지만, 일부는 새로운 주둔지에 계속 남아 그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가기도 하였다. 예컨대 돈화현에 머물고 있던 북로군정서 모연대장 이홍래(李鴻來)와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국민회의 향관(鄕官)인 허동규(許東奎) 등이 그같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주둔지에 북로군정서 일부와 국민회를 연합하여 간민국(墾民局)이라는 기관을 설립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양성된 독립군으로 무장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돈화현 내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실시하였다. 간민국은 다시 대한국민회의 회장 구춘선의 주도하에 독립군 총합부(總合部)로 확대·조직되었다. 이 독립군 총합부는 김성극(金星極)을 총지휘관으로 삼은 한 부대 당 50명의 대원을 보유한 4개의 유격대를 조직하여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펼치는 한편, 안도현 잉두산(仍頭山)에 또 다른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지속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활동을 펼쳤다.

 

자유시사변으로 전력에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독립군들은 이와 같이 북만주지역으로 돌아와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1922년 중반부터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가자 북만주 지역의 각 부대들 사이는 물론이고, 남만주 지역 독립군들과도 연락을 취해 상호전력을 보강해 갔다.

 

그러나 이들 독립군이 계속하여 소규모 무장대를 유지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북만주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각 독립군 부대들은 1922년 8월 통합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결성하였다. 즉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한교회(韓僑會)·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 등 남만주의 여러 독립군들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할 시기에 북만주에서도 혈성단(血誠團)·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군부(義軍府)·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신민단(新民團)·대진단(大震團) 등이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독립군 통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은 성립 후 경신참변 이전과 마찬가지의 활발한 무장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군단에 소속된 장병들은 1910년대 이후 두만강을 넘나들며 활발한 유격전(遊擊戰)으로 일본군경을 괴롭혔고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도 참전하여 일본군 격퇴에 수훈을 세웠던 사람들이었다. 김규식(金奎植)·최진동(崔振東)·박두희(朴斗熙)·최호(崔灝)·이장녕(李章寧) 등 항일전(抗日戰) 경험이 풍부한 역전의 용사들이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을 보좌하면서 대한독립군단의 수뇌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언제든 준비만 갖추어진다면 국내진공작전은 물론이고 전면적인 대일항전도 가능하였던 대한독립군단이었지만 1922년 겨울 목릉현(穆陵縣) 마교하(馬橋河)에서 한국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견제하는 중국 지방관헌에 의해서 소속 독립군 장병들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말았다. 이에 김좌진을 비롯한 주요간부들은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겨가 흩어진 진영을 재정비하였다. 중국 측의 탄압으로 무장해제를 당한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이전과 같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총기(銃器)·탄약(彈藥)을 구입해야만 했다. 따라서 소속 독립군 장병들은 자금 마련을 위해 북만주의 한국인 사회를 무대로 군자금 모금과 독립운동 의무금 모금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활동은 중국으로 귀화한 한국인들의 단체인 영안현(寧安縣) 입적간민호회(入籍墾民戶會)와 대상이 된 한국인들에게 불평을 사게 되었다. 이 시기 입적간민호회는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의 대항단체로 출발했기 때문에 중국 지방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들의 불만이 중국 지방정부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입적간민호회를 후원하던 중국 지방정부는 대한독립군단의 활동을 저지하려 하였고, 그로 인해 대한독립군단의 지휘부와 병사들은 다시 근거를 옮겨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대한독립군단은 1920년대 초반부터 기반을 넓혀가고 있던 사회주의 계열과의 마찰도 불가피하였다. 소련은 1920년 3월 하얼빈에 동지철도부속지공산당사무국(東支鐵道附屬地共産黨事務局)을 설치하고 북만주지방에 지지기반을 확고하게 설치하고 그를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같은 소련의 영향 때문에 북만주는 남만주에 비해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가 빨랐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을 경험했던 대한독립군단의 장병들은 사회주의자들에 적대감을 갖는 자들이 많았다. 때문에 대한독립군단은 목릉현 소추풍(小秋風) 일대에서 소비에트를 반대하는 선전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924년에는 적화방지단(赤化防止團)을 조직하여 사회주의 계열과 대립하였다.

 

이 같은 활동을 벌이던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들은 1925년 초기에 주변의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여 보다 크고 굳건한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 생각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독립군단의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은 1924년 3월 김혁(金爀)·나중소(羅仲昭)·조성환(曺成煥)·현천묵(玄天默) 등이 동빈현에서 조직한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와 힘을 합해 북만주 한국인사회에 근거지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925년 1월에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夫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참가한 단체의 대표들은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협의하여 통합 독립운동 단체의 줄기를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같은 해 3월 10일 영안현(寧安縣)에서 북만주의 한국인사회를 이끌고 무력반일독립운동(武力反日獨立運動)을 전개할 군정부(軍政府)인 신민부(新民府)를 성립시킬 창립대회를 열었다. 신민부 창립대회에는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의 주도하에 중동선교육회(中東線敎育會)를 비롯한 16개 지역의 대표와 국내 대표들이 참여하였다.

 

이들 대표들은 5일간에 걸친 회의 끝에 신민부를 출범시켰다. 1925년 3월 15일에 성립된 신민부의 중앙조직은 삼권분립(三權分立)을 기초로 하여 중앙집행위원회·참의원·검사원으로 나누어 구성되었는데, 주요 간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爀)

중앙집행위원 조성환(曺成煥)·김좌진(金佐鎭)·박성호(朴性鎬)·최호(崔灝)·최정호(崔正浩)·허빈(許斌)·유현(劉賢)

보안총지휘 박두희(朴斗熙)·정신(鄭信)·이영백(李英伯) 

 

참의원장 이범윤(李範允)

참의원 김이윤(金裏潤)·양재헌(梁在憲)·황공삼(黃公三)·이장녕(李章寧)·안용수(安龍洙)·김규진(金奎鎭)·차동산(車東山)·홍종림(洪鐘林)·김송암(金松岩)·최문일(崔文一)·윤당(尹黨)·안호연(安浩然)·허영(許榮)·남극(南極)·이백향(李白鄕)

 

검사원장 현천묵(玄天默)

검사원 노호산(盧湖山)·강인수(姜寅秀)·강규상(姜奎尙)·황국민(黃國敏)·손일민(孫一民)·김기남(金基南)·지장염(池章念)·양윤삼(楊允三)·나중소(羅仲昭)·강명경(姜明鏡)

 

민사부위원장 최호

군사부위원장 김좌진

참모부위원장 나중소

외교부위원장 조성환

외교부 길림성청(吉林省廳) 전임외교관 윤복영(尹復榮)

법무부위원장 박성태(朴性泰)

경리부위원장 유정근(兪正根)

교육부위원장 허빈

선전부위원장 허성묵(許聖默)

연락부위원장 정신

실업부위원장 이일세(李一世)

심판원장 김돈(金墩)

 

한편 신민부의 군사조직은 다음과 같은 편제로 짜여져 있었다.

 

총사령관 김좌진

보안사령관 박두희(朴斗熙)

경무국장 이연(李淵)

별동대장 문우천(文宇天)

제1대대장 백종렬(白鍾烈)

제2대대장 오상세

제3대대장 문우천

제4대대장 주혁(朱赫)

제5대대장 장종철(張宗哲)

 

이렇게 신민부는 민사부·군사부·참모부·외교부·경리부·교육부·선전부·연락부·실업부 등 10개 부서의 짜임새 있는 조직으로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총수보안대를 포함하여 530명의 의용군 병사들을 보유하여 무장투쟁도 집중하려 하였다. 신민부가 이 같은 행정체계를 갖춘 것은 만주의 한국인사회에 깊숙하게 뿌리내리게 하여 산업과 교육을 육성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는 한편 그를 기반으로 조국을 광복시킬 힘을 기르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에 김좌진 장군은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기관을 세우고 그 이름을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라 지었다.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인 김혁을 교장에 선임하고 자신은 교감에 취임하였으며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출신인 박두희·오상세·백종렬 등을 교관으로 기용하여 한 해에 2기의 속성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신민부의 관할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민들 가운데 열일곱살부터 마흔살까지의 남자들에게는 동원령을 내려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그 즈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지사(志士)가 임시정부의 민족해방운동 노선을 외교활동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1925년 10월에 김좌진 장군을 정의부(正義府)의 외교부위원장 김동삼(金東三)과 더불어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은 임시정부에게 재만(在滿) 독립운동 단체들의 무장투쟁을 제대로 지원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고 국무위원에 취임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에서는 그 해 10월 10일에 다시 김좌진 장군을 군부총장으로 임명했으나 역시 사양하고 상해에 가지 않았다.

 

그 당시 해림에서 음식점을 차려 놓고 영업하는 염봉기라는 자가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 가운데 어린 소녀들을 유괴하여 중국인 지주 식모나 술집 접대부로 팔아넘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좌진 장군은 신민부 의용군 별동대를 보내어 염봉기와 그 패거리를 처단하도록 하였다.

 

별동대 장교인 백종렬이 염봉기를 결박하여 권총으로 사살하고 팔려 갔던 동포 소녀들을 모두 구해 내어 자기 가족에게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해림은 말할 것도 없고 북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 동포들은 신민부와 김좌진 장군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였다.

 

그런데 신민부는 1927년 2월 단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일대 위기를 맞았다. 일본 경찰대가 동북군벌의 중국 군인들과 함께 석두하자에 옮겨 와 있는 신민부 본부를 습격하여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인 김혁과 경리부위원장 유정근·본부 직원 김윤희(金允熙)·박경순(朴敬淳)·이정화(李正和) 등을 체포하였던 것이다. 최고 간부인 중앙집행위원장과 핵심 간부를 잃었다는 것은 신민부라는 조직체가 큰 위기에 처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남아있는 간부들은 이 단체를 계속 지속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이념과 노선을 재고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따라서 신민부의 간부들은 1927년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 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에 참석한 신민부의 간부들은 크게 두가지의 의견으로 갈려 논쟁을 벌였다. 김좌진 장군은 군사부위원장 답게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민정(民政) 위주의 활동을 접고 무장투쟁(武裝鬪爭) 위주의 독립군단으로 개편하여 적극적인 반일운동을 전개하자는 노선을 제시하였다. 군사적으로 소극적인 노선을 취하다가는 결국 1925년 6월 삼시협정(三矢協政) 체결 후 극심한 압박을 가해오는 중국 관헌과 일제의 탄압 아래 더 많은 희생자만 낼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사부위원장인 최호는 계속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켜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길이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석두하자 총회에서 신민부의 간부들은 김좌진·박두희·황학수 등 무장투쟁 위주로 방향전환을 꾀하자는 군정파(軍政派)와 최호·이일세 등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자는 민정파(民政派)로 분열하게 되었다. 

 

군정파와 민정파는 자신들의 신민부의 정통조직임을 주장하며 근거지를 구축하고 새로운 조직을 편제하였다. 군정파는 영안현 밀강 신안진에 본부를 두고 다음과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위원장 김좌진

참모부위원장 황학수(黃學秀)

경리부위원장 겸 선전부위원장 정신(鄭信)

실업부위원장 유현

보안 제1대대장 백종렬

보안 제2대대장 오상세

보안 제3대대장 장종철

보안 제4대대장 주혁

보안 제5대대장 김종진(金宗鎭)

군사교육위원장 박두희

별동대장 서리 겸 군사부위원 임강(林堈)

군사부위원 조각산(趙覺山)·이종주(李鐘柱)·민무(閔武)·권화산(權華山)

외교부위원 박운집(朴雲集)·한규범(韓奎範)

경리부위원 권중인(權重仁)

고문 이탁(李倬)

 

한편 동빈현 소량자하(小亮子河) 농평(農坪)에 본부를 구축한 민정파는 다음과 같이 조직을 구성하였다.

 

책임비서 최호

차석 김돈

사법부장 이일세

경리부위원 문우천

연락부위원 독고악(獨孤岳)

선전부위원 최학문(崔學文)

정치부위원 송상하(宋尙夏)

조직부위원 이교언(李敎彦)

 

조직의 규모로 보아서는 군정파가 민정파보다는 훨씬 방대하다. 이는 북로군정서 시기부터 김좌진 장군을 따랐던 인물들이 신민부 시기에도 그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 민정파의 책임비서인 최호는 신민부에 참여하기 이전 동빈현(同賓縣) 입적간민권업회(入籍墾民勸業會)의 재무부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그를 따른 대부분은 성립 이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나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 소속이 아니고 이주한국인의 자치활동에 주력했던 인물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두 파로 갈라서게 된 신민부 중앙지역은 이후 만주지역에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 일어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이 전개될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민부의 지방조직은 이 단체가 북만주의 전 지역을 관할지역으로 한 까닭에 그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일시에 조직망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자연 중앙본부에서 가까운 지역, 그리고 이주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부터 지방조직이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1단계로 시작된 곳이 영안현 지방을 비롯한 내빈(來濱)·주하(株河) 등의 중동선(中東線) 지역이었다. 이들 지방에는 신민부 성립 초기부터 총판(總辦)이 설치되었고, 그 주관하에 이주한국인의 교육 및 산업 진흥활동이 행해졌다. 이후 1926년 6월부처 제2단계 지방 조직 설치 작업이 시작되어 액목·돈화·안도 등의 지방에 총 15개의 총판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신민부의 관할지역은 중동선을 중심으로 동서로는 장춘에서 구참(九站)까지, 그리고 남북으로는 백두산에서 흑룡강까지 미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신민부도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 등이나 북간도의 다른 군소단체들과 겹치는 지역은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기가 어려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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